< 그 아이의 약점은 정입니다 >
* * *
아무도 없는 밤, 기다리던 사람이 도착했다.
“안에서 기다리면 되지, 뭐 하러 여기에서 기다립니까.”
시종장 레이놀드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어둠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황궁의 한적한 정원, 나무 사이에서 보리스가 불쑥 나왔다.
“보리스!”
“일은 끝났습니다.”
“···.”
레이놀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에 만나는데 제대로 된 인사말 하나 없다.
귀족이나 황궁의 예절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는 누구보다 능숙한 편인데 거칠고 투박한 행동을 했다.
그게 손해라는 사실은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왜 그런지 모른다.
어린 시절, 살고 싶으면 상대를 죽여야 한다며 살인을 강요하던 보리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은 그 일이 필요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안다. 보리스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이 남자가 죽을 만큼 싫었다.
생각해보면 이 사람은 언제나 그랬다.
상대에게 정말 절실한 것을 가르치지만 당시에는 그게 왜 필요한지, 왜 그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한참 뒤에나 이 남자의 감사함을 깨닫게 된다.
손해 보는 성격이다.
레이놀드는 몸을 돌렸다.
“폐하께 가지요.”
보리스가 약간 뒤에서 걸으며 물었다.
“폐하께서는 이미 잠자리에 드신 시간 아닙니까?”
“직접 보고 받고 싶어 하셨습니다. 깨우라 하시더군요.”
오늘 보리스의 보고는 일 년 넘게 기다려온, 매우 중요한 일이다. 폐하가 직접 들은 뒤 질문하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사실은 보리스를 만나고 싶은 마음도 클 것이다.
황제도 인간이다.
누구에게나 가끔은 마음 편하게 이야기하고 기댈 수 있는 상대가 필요하다.
자신과 보리스는 황제가 마음 놓고 상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간이었다.
어두운 정원을 걸어 건물에 도착했다.
몇몇 시종이 늦은 시간에 궁을 돌아다니며 일을 하다 마주치자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방 앞에 서 있던 시종들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방 한가운데를 차지한 침대 위가 볼록하게 올라가 있다. 황제가 숨 쉴 때마다 이불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움직였다.
레이놀드가 침대에 가서 황제를 깨우는 동안, 보리스는 가만히 서서 지켜보았다.
조금 긴장된다.
어린 시절 보리스에게 훈련 받던 시기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폐하, 보리스가 왔습니다.”
몇 번 정도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자, 황제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커다란 배가 들썩거리고 움직이더니 이불이 흘러내렸다.
몸을 일으킨 황제가 수염을 찌그러뜨리며 말했다.
“오, 보리스! 늙었구나.”
“폐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보리스가 싱긋 웃으며 우아하게 절하자, 황제가 소년 시절처럼 킬킬거리며 웃었다.
“보리스, 자네가 그렇게 정중하게 인사하니까 뱃속이 간지럽다. 그만해라.”
“이전과는 입장이 다릅니다, 폐하.”
“그 폐하 소리를 들으니 귀에서 벌레가 나올 것 같다.”
“···.”
보리스는 소리 없이 웃더니, 약간 잔잔한 표정이 되었다.
“언제부터입니까, 그 수염.”
“···.”
황제가 어깨를 으쓱했다.
“살을 찌우는 것은 일부러 인가요, 폐하.”
보리스의 목소리가 유난히 부드럽다.
황제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움찔하더니 침대에서 내려섰다.
레이놀드는 침대 옆에 있던 가운을 황제의 어깨에 덮었다.
긴 가운을 어깨에 올린 채 황제가 걸음을 옮겼다. 침대 발치에 놓인 의자에 앉아 테이블 건너편의 의자에 턱짓을 했다.
“앉아서 이야기 하지.”
“···.”
보리스가 자리에 앉자 황제가 어깨를 약간 움츠렸다. 레이놀드가 와인을 가져다주자 한 모금 마시고, 황제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지 꽤 됐다. 몇 년 전부터 보면 알만큼 얼굴에서 살이 빠지기 시작했어.”
황제가 웃으면서 다시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이건 레이놀드의 생각이야. 저 녀석은 외모에 대해서 꽤 신경을 쓰니까 말이지. 수염이라면 누구의 눈에도 들키지 않을 거라고 말하더군.”
“병명은 아십니까?”
보리스의 말에 대답한 것은 레이녿드였다.
“아니, 모릅니다. 의국에서 가장 실력 있는 의사 한 명에게만 보였는데, 모르겠다고 손을 들었어요. 그가 모른다면 이 세상 어떤 의사도 모를 겁니다.”
“···.”
“지금은 독과 약초에 정통한 의사를 의국에 넣어 몰래 약을 조달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 덕분에 통증이나 상태가 많이 호전됐지요.”
황제를 바라보는 보리스의 눈동자에 부드러운 빛이 어렸다.
“그래서 그토록 급히 와토린구 공작을 치신 거군요. 폐하답지 않게 일을 서둘렀다 싶었습니다.”
“결국엔 놓쳤지만 말이야.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머무는 법이지. 몸에 병이 드니 머리가 맑지 않아.”
“···.”
보리스가 입을 다물자, 황제는 큰 소리로 웃으면서 의자에 등을 기댔다.
“뭐, 내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그 일은 잘 끝났습니다.”
황제는 오랫동안 황후 모국의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제 거의 마무리되었다.
필요한 광석도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 조달할 수 있게 되었고, 여기 저기 제국에 퍼져 있던 그 나라의 첩자들도 상당수 잡아냈다.
황후와 황태자를 후원하던 국내의 귀족들도 상당수 회유하거나 그럴 수 없는 자는 힘을 없앴다.
앞으로도 남은 일은 있지만 황후와 황태자는 손발이 묶였다. 그들이 날뛰어도 이쪽에서 다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이 서자, 마지막으로 남은 황후 모국의 대사에 손을 댄 것이다.
그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증언을 모으고, 마지막으로 황제의 소유물에 손을 댔다는 죄목을 씌워 이 나라에서 추방했다.
물론 모든 것은 비공개다.
대사가 했던 일은 마지막 것만 빼면 모두 사실이었다.
저쪽에서도 그런 수치를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은 수월하게 진행됐다.
그 대사는 다시 제국에 오지 못할 것이다.
물론, 적이 많은 대사를 물어뜯을 자들도 준비했다. 뒤에서 돈을 대고 조금만 부추기면 다들 손쉽게 넘어왔다.
귀국하면 그 대사는 자신의 후계자에게 배신당해 강제로 은거하게 된다.
다음에 오는 후임 대사는 제국의 입김이 닿은 사람이었다. 그 나라의 왕은 전혀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도록 오랫동안 뒷공작을 해왔다.
담담하게 그런 일을 보고한 보리스에게 황제가 물었다.
“루디, 그 아이는 어떻던가?”
보리스가 히죽 웃었다.
“괜찮더군요. 자질도 있고 눈치나 판단력도 뛰어납니다. 뭐든지 가르치면 쉽게 익히고, 감정을 제어하는 일에도 뛰어나요. 몸보다는 눈이 더 좋은 것도 장점입니다. 무기도 능숙하지만, 다른 사람보다 눈이 좋아요. 관찰력이 뛰어납니다. 그 아이는 뭐 하나 모자란 점 없는 좋은 황제가 될 겁니다.”
“그래.”
황제가 안심한 듯 깊이 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보리스에게 일 년 동안 맡긴 것은 정말로 그 아이가 황제가 될 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 판별하기 위한 것이다.
마력이 강하기만 해서는 황제가 될 수 없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그저 황녀와 짝을 지어 황족 안에 끌어들이는 것으로도 족하다.
황후와 황태자를 제치고 황제의 후계자 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그 이상, 평범을 뛰어넘는 것이 필요했다.
황제는 루디에게 그런 자질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보리스의 눈이 더 확실할 것이다. 그는 지금의 황제를 길러낸 사람이니까.
“하지만.”
보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아이에게는 약점이 있어요. 매우 치명적입니다.”
“···.”
황제가 긴장했는지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어떤 걸까.
레이놀드도 궁금해졌다.
그 아이에게 약점이라고 할 만한 게 있었던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눈빛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아이에게 약점이라니···. 전혀 없을 것 같다.
보리스가 조용히 말했다.
“그 아이는 정에 약합니다.”
“···.”
“그 아이는 경계심이 강하기 때문에 쉽게 마음을 열지는 않습니다. 상대가 정치적인 면이 있다고 알면 아마 괜찮을 거예요. 하지만 상대가 순수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느슨해집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함께 지내다 보면 정에 빠지는 거죠.”
“아···.”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루디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린 모양이다.
그 아이는 그때 나디아그라 비를 위해 목숨 걸고 자신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한 상대와 싸웠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 증명해냈다.
만일 그때 상대 죽이는 걸 망설였다면, 황제는 그 아이를 그저 누군가 공주의 배필로 삼아 꼭두각시로 황족에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겠지.
그때 아이가 상대를 죽이는 모습을 보고 황제는 그 아이를 단순한 마력소유로 활용하기보다 후계자로 삼는 게 낫다고 결론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그렇다.
그 아이가 나디아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은 황제로서는 약점에 불과하다. 장점이 될 수 없었다.
“반대로 말하면 그것 외에는 약점이 없다는 말도 되는군.”
황제가 씨익 웃었다.
둥글게 밑으로 처진 배가 숨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약간 흥분한 것 같다.
보리스가 싱긋 웃었다.
“그렇지요.”
“그래, 그렇다면 어쩐다.”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보리스, 자네는 어떻게 하면 좋다고 생각하나?”
“최선은 그 아이가 정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을 최소화하고 그 외의 사람에게는 정을 주지 않는 환경을 만드는 겁니다.”
“황제가 되면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 그 아이는 황제에 최적이군. 매우 좋아. 그 아이에게 소중한 사람을 하나 만들어주자. 아니, 서너 명 정도도 괜찮겠지. 그 아이를 이 나라에 얽어 맬 목줄이 될 거다.”
황제가 흡족한 듯 웃자, 보리스가 살짝 한숨을 쉬었다.
“폐하, 그 아이를 다룰 때에는 조심해야 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 아이는 경계심이 강합니다. 상대에게 정치적인 면이 약간이라도 있다고 알면 순식간에 눈치채버려요. 금방 발을 뺄 겁니다.”
“···.”
“그 아이는 이미 공주와 나디아 마마에게 애착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가 그걸 족쇄로 사용하려고 하는 사실을 눈치 채면 어떻게 될지 몰라요. 루디가 어린아이답지 않게 머리가 좋다는 걸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래.”
황제의 대답에 보리스가 한숨을 쉬었다.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서 그 아이 스스로 빠지게 해야 합니다. 폐하의 의도가 들어가지 않은 상태로 진행되는 게 가장 좋아요. 시간을 들이십시오.”
황제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물끄러미 와인잔을 바라보다 불쑥 말했다.
“보리스, 그 아이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잘 가르쳐주게. 황궁에 난무하는 음모와 술수를 능숙하게 피할 수 있도록 기초를 만들어 줘.”
“···.”
“그 아이가 후궁을 나오면 후계자 수업을 시작할 거야. 데리고 다니면서 전쟁을 가르치고 나라를 운영하는 방법도 보여야지.”
“···폐하.”
보리스가 입을 열자, 황제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물론 자네 말은 명심하지. 공주나 나디아를 이용해서 인위적으로 그 아이를 조종하려고 하지 않겠네. 내 의도를 그 아이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심하지.”
황제의 눈썹이 약간 밑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야. 그 아이를 놓치면 이제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황제가 힘없이 웃었다.
“내겐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네. 몇 달 전에 의국에 넣었던 파블로에게 진찰을 받았지. 그가 그러더군. 병명을 몰라도 신체의 상황을 보면 남은 시간은 짐작할 수 있는 법이라고.”
황제가 다시 와인을 한 모금 삼켰다.
황제의 와인에는 파블로가 처방한 약이 소량 섞여 있었다. 그것이 황제의 상태를 조금 호전시켜 주고 있다.
“최대한 노력해도 십여 년. 어쩌면 그것보다 짧을지도 모르지. 나는 그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있지 못해. 그 전에 모든 걸 가르치고 싶네.”
황제가 머리를 의자에 기대고 천장을 노려보았다.
“보리스, 더 이상 마력소유가 태어나지 않는다면 이 나라는 끝이야. 순식간에 주변 놈들에게 잡아먹힐 거다.”
거의 모든 나라의 통치자와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마도구가 있다.
그 중에는 당연한 일이지만 무기도 있었다.
푸테그린 제국이 오랫동안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보다 뛰어난 무기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 나라가 모두 두려워하는 전설의 무기.
하지만 지금은 그걸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무기는 대부분 굉장한 양의 마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황제마저도 가장 마력이 풍부하던 젊은 시절, 제한된 시간만 사용할 수 있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보리스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 그 아이의 약점은 정입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