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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53화 (53/201)

< 언제나와 같은 밤의 풍경이 돌아왔다 [여기부터 유료입니다] >

* * *

레빈은 쇠꼬챙이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 걸까.

정말로 허락된 일일까.

정말로 저 남자한테 이 쇠꼬챙이를 휘둘러도 되나?

문득 보리스가 마지막 순간에 한 말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또 너를 덮치려 하거든 이번에는 반쯤 죽여놓거라. 오늘의 너는 황제 폐하의 장식이다. 그걸 건드리는 놈은 당해도 큰소리로 항의하지 못해.]

그 말대로 해도 정말 괜찮을까.

저 남자한테 손을 대도 가족은 안전한가.

레빈은 머리가 나쁘다. 정말 괜찮은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레빈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루디가 말했다.

“오늘 하는 일은 분명히 폐하의 지시예요. 그러니까 괜찮아. 우리가 보리스 님의 의도대로만 움직이면 뒤에는 폐하가 버티고 있어요.”

“···.”

레빈은 그래도 계속 망설였다.

이대로 도망가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그때 대사의 으으릉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놈들! 가만두지 않겠다!”

어느새 일어난 대사가 다리 사이를 손으로 누른 채 촛대를 잡고 있었다.

대사가 촛대를 들자 옆으로 기울어지면서, 꽂혀 있던 초가 데구루루 굴렀다.

대사가 몸을 돌렸다.

촛대를 들고 있는 손에 힘줄이 돋은 것이 보였다. 대사가 자신을 만질 때 그 손이 피부를 기어 다니던 감촉이 되살아났다.

저 손이었다.

한 발, 대사가 레빈 쪽으로 한 걸음 옮긴다.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꾹꾹 눌러 담고 있던 분노의 뚜껑이 열렸다. 나오지 못하도록 몇 년 동안 누르고 있던 마음이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죽여 버린다. 죽여 버린다. 죽여 버린다. 죽여 버린다. 반드시 죽여 버린다.]

마음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댔다.

레빈은 쇠꼬챙이를 든 채 대사를 향해 달려갔다.

반쯤 정신이 나가있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죽여 버리겠다는 마음 밖에 들지 않았다.

레빈은 팔을 크게 휘둘렀다.

쇠꼬챙이가 붕, 소리를 내며 허공을 둥글게 가로질렀다.

등 뒤에서 루디의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레빈! 죽이면 안 돼! 살려둬야 해요!”

루디의 목소리는 그대로 귀로 스며들었다가 스르르 나가버렸다.

쇠꼬챙이가 대사의 어깨를 향해 떨어졌다.

퍽, 소리와 함께 대사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으아악!”

커다란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대사가 일부러 골랐을 정도로 외진 곳에 위치한 방이다.

문도 두꺼웠다.

비명소리가 혹여 새어 나간다 해도, 레빈처럼 힘없는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레빈은 다시 쇠꼬챙이를 휘둘렀다.

“레빈! 레빈! 정신 차려!”

루디가 허리에 매달려 소리쳤다.

그만둬야 한다고 머리 한구석으로 생각했지만 몸이 멈추지 않았다.

다시 휘두르려는데, 누군가가 그의 손에서 쇠꼬챙이를 빼앗아갔다.

무기를 빼앗긴 레빈은 발로 대사의 머리를 힘껏 찼다. 한 번, 두 번, 대사의 몸을 향해 계속 발을 박았다.

몇 번을 그렇게 했는지 모른다.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조용한 목소리였다.

화를 내거나 소리친 것도 아닌데, 깊은 곳까지 목소리가 닿았다. 머릿속에 차가운 물을 부어 넣은 것처럼 번쩍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언제 왔는지 보리스가 방 안에 서 있었다.

보리스의 손에 피 묻은 쇠꼬챙이가 들려있었다.

“어···.”

레빈이 멍청한 소리를 내자, 보리스가 살짝 한숨을 쉬었다.

“이런 녀석도···. 반 죽여 놓으라고 했지, 정말 죽이라고는 안 했다.”

보리스가 시선을 돌려 대사를 본다.

레빈의 눈도 뒤따랐다.

대사가 피투성이가 된 채 완전히 기절해 있었다.

"조금 지나치군."

보리스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레빈의 재킷을 젖히고 셔츠를 쭉 찢었다.

“어! 보리스님!”

깜짝 놀라는데, 보리스가 레빈의 얼굴을 손으로 잡고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헝겊을 방울처럼 동그랗게 만든 것이다. 여자들이 화장하면서 색을 입힐 때 사용하는 것과 비슷하게 생겼다.

헝겊의 표면은 푸른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루디, 물을 좀 갖다 다오.”

보리스의 말에 루디가 근처에 있는 은대야의 물을 그릇에 조금 덜어 왔다.

보리스가 동그란 헝겊에 물을 조금 묻히더니 레빈의 얼굴 곳곳에 조금씩 문질렀다. 눈두덩이와 입가에 몇 번씩 문지르고, 그 뒤에는 목과 가슴에도 조금씩 묻혔다.

루디가 지친 듯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맞은 듯 루디의 눈두덩이가 약간 붉었다.

설마, 아까 자신을 말리려다 맞은 걸까.

“어···죄, 죄송해요.”

보리스가 하는 대로 몸에 이상한 걸 묻히면서 말하자, 루디가 괜찮다는 듯 히죽 웃었다.

보리스가 몇 번 더 레빈의 얼굴과 몸을 확인하고 헝겊더미를 다시 옷 속에 넣었다.

“됐다.”

그리고 돌아서 루디를 보더니 웃었다.

“너는 멍을 만들 필요도 없겠구나.”

역시 저건 자신이 만들었던 것 같다.

“죄, 죄송합니다.”

레빈이 말하자, 루디가 가까이 다가와 작은 손으로 툭툭, 그의 팔을 쳤다.

“괜찮아요.”

“···.”

보리스가 문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너희는 잠시 움직이지 말고 조용히 있어라.”

두꺼운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몇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한 명은 귀족인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부하인 것 같았다.

그리고 한 명, 왕궁 시종이 그들의 뒤에 조용히 서 있었다.

보리스가 조용히 고개를 숙이자, 귀족 남자도 살짝 머리를 숙였다.

귀족 남자의 시선이 레빈과 루디를 향했다. 잠시 레빈과 루디의 멍에 귀족 남자의 시선이 머물렀다.

귀족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대사에게 다가가 발로 그를 뒤집었다.

“···.”

귀족 남자가 보리스를 보았다.

“괜찮습니다. 살아있어요.”

보리스의 말에 귀족 남자가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고 부하들에게 신호했다.

부하들이 의식을 잃은 대사를 일으켜 양 옆에 끼우고 단단하게 허리를 안았다.

대사는 발을 약간 끌면서 남자들에 이끌려 방을 나갔다. 멀리서 보면 꼭 술 취한 사람을 부축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사람들이 모두 나간 뒤, 보리스가 몸을 돌려 레빈과 루디를 보았다.

“수고했다. 너희들은 이대로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면 된다.”

보리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구석에 서 있던 왕궁 시종이 앞으로 나섰다.

“이쪽으로 따라 오세요.”

귀신에 홀린 것 같다.

레빈은 루디와 함께 휘청휘청 방을 나섰다.

시종의 뒤를 따라, 아무도 없는 복도를 조용히 걸어갔다. 레빈도, 루디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다른 때와는 달리 레빈이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레빈은 왕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건물에서 살고 있었다.

시종과 하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마차는 그 건물 근처에 잠시 섰을 뿐이라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굉장히 커다란 건물이었다.

그런 건물이 이쪽 면만이 아니라 ‘ㅁ’자 형태로 옆과 반대편에도 있다고 한다.

레빈은 아직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잘 모르는 듯했다. 조금 멍한 상태인 것 같다.

계속해서 루디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가만히 손끝을 보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릴 때는 상당히 풀이 죽어 있었다.

지금에 와서야 자신이 신분 높은 사람을 죽기 직전까지 때렸다는 사실을 실감한 모양이다.

위로해줄까 생각도 했지만 가만 두기로 했다.

머리가 복잡하다.

보리스가 갑자기 두 사람을 왕궁으로 끌고 갈 때만 해도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황제의 보석이다, 보석이다, 여러 사람들이 말할 때도 그런가 보다 했다.

루디는 그저 이것이 교육의 일환일 거라고 생각했던 거다.

황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어리숙하거나 어린 두 사람을 훈련시키는 실습 같은 거.

하지만 아니었다.

레빈과 루디, 두 사람은 정치적인 상황을 조절하는 데에 쓰였다.

어쩌면 레빈은 처음 황궁에 올 때부터 그런 정치의 작은 조각으로 사용된 건지도 모른다.

오늘의 남자가 목적이었을까.

‘그 남자, 다른 나라의 대사라고 했지.’

보리스 혼자만의 생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분명 황제와 그 외 수많은 사람들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오늘 만났던 아름다운 시종 중에도 개입된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황제의 보석이니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폄하당해서는 안 된다, 보복해야 한다고 말한 시종이 몇 사람 있었다.

보리스가 한 말이 떠올랐다.

아무도 믿지 마라.

약간 어깨가 내려갔다.

조심했는데도, 보리스에게 정이 조금, 아주 조금 옮겨갔던 모양이다.

훈련받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그를 스승이라고 생각하고 믿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이곳에서는 조금만 마음을 놓으면 정이 옮는다.

루디가 마차에서 내리고 담장 안으로 들어서자, 허공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불새가 포로로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동그란 눈으로 루디를 바라보며 소리 없이 울었다.

“고마워.”

레빈이 위험에 빠진 걸 알려준 것은 불새였다.

화장실에서 막 나왔는데, 갑자기 불새의 작은 불꽃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레빈이 어떤 일을 당하는지 불새가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위험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만일 루디가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면 레빈은 그 남자에게 몹쓸 짓을 당했을지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렇다.

보리스는 아마 근처에서 모두 보고 있었겠지만 레빈을 구해주지 않았을 거다. 모든 일이 끝난 뒤에야 나타났겠지.

어리숙한 레빈이 자신의 말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보리스는 그걸 말해주지 않았다.

“···.”

조금 피곤해졌다.

루디는 크게 숨을 쉬었다.

이 담장 안으로는 외부의 것을 끌고 가기 싫었다.

이 안에서는 시간이 평범하게 흘러간다.

아침이 되면 일하러 나가고 시간이 되면 밥을 먹는다. 어린 아이가 소란스럽게 돌아다니고, 시끄럽게 웃고 울었다.

이곳에는 허리가 아파도, 모든 걸 잃고 노예가 되어도, 비록 가끔은 밉살스럽지만 다들 열심히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 초라한 저택은 상처 받은 사람이 모이는 작은 성.

함께 사는 동안 어느새 그들에게 정이 옮아 버렸다.

아마 이제는 떼어낼 수 없을 것이다.

“···.”

어두운 감정을 털어버리고 저벅저벅 안으로 들어간다. 크게 자란 풀이 루디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택에 가까이 가자 리리샤 공주의 세찬 울음소리가 건물 밖에까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업···마업···.”

여전히 마법을 마업이라고 부르는 공주가 목 놓아 운다.

평상시보다 몇 시간이나 늦었다.

아직 해가 있으니 공주가 깨닫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알아차린 걸까. 아이에게는 동물적인 감각이 남아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서둘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리리샤가 와락 달려들면서 울부짖었다.

“···마업 고아아아···마업 고아아아앙···.”

마법이 고장났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안 고장 났어요, 공주님.”

루디가 말했지만 믿지 않는다. 계속해서 마법이 고장 났다고 울부짖었다.

노예 마리가 지친 듯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공주님은 힘이 장사시라.”

마리가 십 년 정도 늙어 보이는 얼굴로 힘없이 말했다.

“유모님은 조금 전에 지쳐서 비마마와 잠이 드셨어요. 오늘은 비마마께서도 하루 종일 깨있으셨거든요. 공주님을 보고 저 아이는 누구인데 여기에서 우느냐고 자꾸 물어 보셔서 곤란했습니다.”

“···.”

오늘은 다들 힘든 날이었던 것 같다.

그날 저녁, 아무도 깨어있지 않은 시간이 되었을 때 루디는 사과를 겸해서 싸구려 노예 목걸이로 동영상 플레이어를 만들었다.

종이처럼 잉크가 완전히 정착되는 재질이 아니라면, 마력을 부여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지울 수도 있다. 동영상 플레이어가 필요 없어지면 나중에 다른 용도로 사용하면 된다.

기왕 만드는 거니, 나중에 자신도 볼 수 있도록 주제어나 배우 이름으로 검색하는 기능도 넣어봤지만 거기까지 만능은 아니었다. 검색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제목을 알면 그 영화가 상영되는 것까지는 가능하다.

하지만 같은 제목이 있는 경우에는 랜덤으로 나오는 것 같았다.

킹콩이라고 명령어를 입력하자 오래전의 흑백 영화가 나왔다. 그 뒤에는 최신 것, 그 다음은 다시 본 적 없는 버전의 킹콩이었다.

한밤 중, 울면서 잠이든 리리샤 공주를 살며시 흔들어 깨웠다.

반쯤 잠에 걸쳐있던 눈이 반짝 떠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약간 오래 된 버전의 신데렐라였지만 공주는 매우 만족한 것처럼 보였다.

애니메이션을 보다 어느새 스르르 눈이 감긴 뒤에도 ‘신데에라’라고 중얼거렸다. 신데렐라 꿈을 꾸었던 것 같다.

언제나와 같은 밤의 풍경이 돌아왔다.

< 언제나와 같은 밤의 풍경이 돌아왔다 [여기부터 유료입니다] > 끝

작가의 말

여기부터 유료입니다.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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