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여기까지 무료입니다] >
* * *
레빈의 시야에 둥근 사람의 무리가 보였다.
루디는 젊은 천재 마도구사의 시연이 끝난 직후부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루디를 중심으로 둥글게 퍼진 사람 대부분 귀부인이다.
색색의 꽃송이 같은 여자들 드레스에는 보석이 가득 달려있다. 여자들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보석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여자들에 가려 보이지 않는 루디가 뭔가 말했는지, 꽃송이처럼 퍼져 있는 여자들 무리에서 웃음소리가 퍼졌다.
본래는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빠져있는데, 이상하게 루디의 주변에는 빛이 머문다. 저 아이에게는 자신이 갖지 못한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강한 마음, 어쩌면 뛰어난 두뇌.
뭔지 모르지만 루디는 뭔가 특별한 걸 갖고 있다.
“···.”
잠시 뒤, 여자들의 동그란 치마가 옆으로 조금씩 움직이더니 루디의 황금 머리가 그 길을 나아갔다.
화장실에 간다고 했었던 것 같다.
루디는 밝은 빛 아래 황금빛을 뿌리며 빠른 걸음으로 홀을 가로질러갔다.
어느새 홀 안은 사람들의 대화와 음악 소리로 가득하다.
레빈은 약간 초조해져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 남자, 황후 모국의 대사는 어디에 있는 거지?
잠시 루디를 보고 있는 사이 대사의 행방을 놓쳤다.
대사와의 일이 있은 뒤, 레빈은 그 남자에 대한 여러 가지 소문을 들었다.
그 남자는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서 아름다운 것이라면 뭐든 손을 댔다. 남자, 여자, 소년, 소녀.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루디는 아름답다. 누구나 루디를 보면 넋을 잃었다. 그 아이는 반드시 그 남자의 욕심을 부추길 거다.
‘루디가 그 남자에게 발견되어 어두운 방으로 끌려가기라도 하면···.’
끔찍해졌다.
보리스에게 여러 가지를 배웠다고는 해도 아직 어린아이다. 당황하면 배운 것도 모두 잊어버리고 속수무책으로 당할지 모른다.
게다가 그 남자는 의외로 힘이 강했다.
루디처럼 가벼운 아이라면 한 손으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지 모른다.
레빈이 조금 이상했던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괜찮아?”
시종 중 한 명이 작은 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제 조금 쉬다 와. 연회가 끝날 때까지는 계속 이 근처에서 웃고 있어야 하니까 눈치껏 쉬지 않으면 내일은 일어나지도 못하게 될 거야.”
다른 시종이 싱긋 웃으며 쉬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얼굴이 형편없어. 어서 가봐.”
먼저 말을 걸었던 시종이 살짝 그의 등을 밀었다.
“감사합니다. 잠시만 있다 돌아올게요.”
“응. 어서 가. 하지만 명심해, 레빈. 너는 오늘 황제의 보석이다. 어디에서도 추한 모습은 보이지 마. 누군가가 너를 폄하한다면 반드시 보복해야 한다. 가만히 있는 건 황제 폐하를 모독하는 일이 될 거야.”
아름다운 얼굴의 시종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말했다.
“···네.”
레빈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일은 당신들처럼 힘 있는 가문 출생이나 가능한 거겠지.’
가문이 뒤에 서서 버텨주는 저들과 레빈의 처지는 다를 것이다.
평민보다야 낫다지만, 레빈은 다른 귀족보다 배움이 짧다.
머리가 똑똑한 것도 아니었다.
황제의 특별한 소유물이라고는 해도 귀족 아닌 노예를 모시고 있다.
그 노예 아이는 황제의 발길도 닿지 않는 후미진 비마마 처소에서 살고 있었다.
저 아름다운 시종들과는 처지가 다르다.
누군가가 힘이 되어 준다면 모를까.
레빈은 후원하나 없는, 쫓겨날지 모를 가난한 귀족 소년일 뿐이었다.
오늘은 황제의 보석이라도, 내일은 평범한 레빈이 된다.
“···.”
레빈은 방긋 웃었다.
가지고 있는 것은 아름다운 얼굴 하나뿐.
언제나 그래 왔듯이, 이런 미소라도 도움이 된다면 얼굴에 경련이 일 때까지 사용하자. 사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쓰지 않으면 이런 세계에서 살아갈 수 없다.
“그럼 잠시 다녀올게요.”
레빈은 어느새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루디를 찾아 홀 가장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
홀은 여러 개의 방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문을 닫으면 개별적인 커다란 방이 되고, 문을 활짝 열면 커다란 홀이 되게끔 되어 있었다.
그런 구조이다 보니 곳곳에 커튼이 쳐져 있고, 작은 공간도 있다.
시끄러운 연회 중, 누군가가 커튼 뒤의 인적 없는 작은 공간에 숨어 버리면 찾기가 어렵다.
레빈은 초조한 마음이 되어, 루디가 향했던 길목의 곳곳을 확인하면서 걸었다.
‘이쪽으로 쭉 나가면 화장실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조금만 더 가면 화장실이다.
사람들의 인적이 뜸해졌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이상한 기색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커튼 너머로 신음소리나 물건이 부딪치는 소리 같은 건 전혀 듣지 못했다.
‘어쩌면 너무 예민하게 생각했던 건지도 몰라.’
오랜만에 그 남자를 봐서 그랬을 거다.
생각해보면 루디는 이제 겨우 여섯 살. 누군가의 성적인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 일렀다.
‘나도 참, 바보 같아.’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이 조금 느려졌을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의 손에 입이 막혔다.
두꺼운 팔이 뒤에서 나와 그의 몸을 덥석 안는다.
다리가 허공으로 뜨면서, 레빈은 누군가에게 잡혀 순식간에 근처 방으로 끌려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자, 남자가 레빈을 바닥에 내던졌다.
“오랜만이구나.”
빙그레 웃는다.
황후 모국의 대사, 그 남자였다.
“!”
레빈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눈이 뜨겁다. 눈동자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밤마다 꿈을 꾸었다.
짐승처럼 놈의 목을 물어뜯어 죽이는 꿈.
보리스 님에게 훈련을 받은 뒤부터는 검으로 놈의 목을 베는 꿈을 꾸었다.
가뿐하게 칼을 날려 허공을 그으면 놈의 목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떨어진다.
레빈은 멈추지 않고 한 번, 두 번, 계속해서 수평으로 칼을 그어갔다. 둥근 얼굴이 얇게 저민 고기처럼 차곡차곡 잘라져 쌓이다 어느 순간 확,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그리고 꽃잎처럼 하늘거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레빈은 여전히 힘없는 시종일 뿐이다.
눈앞의 이 남자를 죽일 수 없어.
결코 그 순간은 손에 넣을 수 없다.
으드득, 이를 악물었다.
‘안 돼, 참아. 반항해서는 안 돼. 그랬다가는 가족에게까지 화가 미친다. 이 자리에서는···도망쳐야 해. 이 남자와 부딪쳐서는 안 돼.’
레빈은 가까이 다가오는 남자를 피해 문으로 달려갔다. 아슬아슬하게 남자의 손이 팔을 스쳐 지나갔다.
소름이 돋는다.
지금 당장이라도 놈을 죽여버리고 싶다.
남자가 다시 그를 잡으려고 손을 뻗는 순간 문에 닿았다.
손잡이를 잡아 비트는 순간, 남자가 레빈의 머리카락을 잡았다.
문을 잡은 채 놓지 않자, 남자가 짧게 욕을 하며 강하게 팔을 당겼다. 머릿가죽이 뽑히는 것 같다.
문이 조금 열렸지만, 레빈은 다음 순간 보기 흉하게 바닥에 내던져졌다.
“젠장, 반항하다니! 네 가족이 어떻게 돼도 좋은 거냐!”
벌떡 일어서려던 레빈의 동작이 멈췄다.
대사가 낮은 소리로 웃었다.
“그래, 그렇지. 가만있어라.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되어 얼마나 찾았는지···. 더 아름다워졌구나.”
대사가 가까이 오지만, 레빈은 움직일 수 없었다.
···탁!
그때,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동시에 약간 높은,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하고 있는 거야?”
여자인지 남자인지 아직 분간되지 않는 아이의 목소리였다.
“루디 님!”
레빈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왜 이 아이가 여기에.
레빈이 말도 못한 채 눈을 크게 뜨고 있는데, 대사가 루디를 보고 꿀꺽 침을 삼켰다.
“아깝군. 금색 노예만 아니었으면···.”
하지만 루디는 대사를 쳐다보지 않고 레빈을 보고 있었다.
루디가 얼굴을 조금 찌푸린다.
“뭐 하고 있는 거예요, 레빈. 오늘 보리스 님이 한 말을 잊어버렸어요?”
“···.”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대사가 히죽 웃더니 루디에게 다가갔다.
“좋은 생각이 났다. 너를 건드릴 수는 없지만, 네가 보고 있겠다면 나도 어쩔 수 없겠지.”
“뭘 하려는 거예요! 루디 님을 건드리지 마!”
대사의 눈동자가 번들거리는 것을 보고 레빈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적어도 루디만큼은 안전하게 내보내야 한다.
하지만 루디가 먼저 움직였다.
루디는 작은 몸을 재빨리 옆으로 굽히며 근처협탁에 놓인 장식물을 들었다.
반쯤 벌거벗은 어린아이가 뾰족한 화살을 들고 있는 작은 상이었다.
그건 레빈도 아까 바닥에 팽개쳐지면서 보았던 거다.
어딜 가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탈출구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는 것.
두 번째가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보아두는 일이다.
저 장식물 외에도 뾰족한 것이 여러 개 있다.
책상 위에는 날카로운 펜이 있고, 벽난로 근처에는 쇠꼬챙이도 있다. 무기로 사용할 만한 건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레빈이 짧은 시간 동안 확인했을 정도이니, 눈 좋은 루디도 당연히 봐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 돼.
대사는 굉장히 높은 사람이다. 황후의 모국에서도 상당한 신분인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런 사람을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아무리 금색 노예라 해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황제의 잘못이 되어버릴 거다.
황후의 모국에서 항의라도 하는 날엔 루디의 목숨도 날아간다.
황제의 기분 하나로 살고 죽는 게 노예이니까.
레빈이 그렇게 생각하고 작은 몸을 잡으려는데, 루디가 재빨리 장식물을 대사의 가랑이 사이에 던졌다.
“커헉!”
화살 든 아이상은 정확하게 남자의 요점에 맞았다. 대사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레빈은 입을 뻐끔뻐끔 벌렸다.
‘맙소사! 무슨 짓을.’
발등을 향해 던질 거라고 생각했다.
귀족이 실내에서 신는 신발은 부드러운 것이 많다. 그 장식물 정도면 충분히 상대의 발을 못 쓰게 만들 수 있다.
한데 남자의 요점을 치다니, 저러다 후손을 못 낳게 되면 그 벌을 어떻게 받으려고.
대사의 목구멍에서 으르릉거리는 듯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개만 들어 루디를 노려본다.
대사의 눈이 시뻘겋게 보였다.
“···감히···감히 나를···이 더러운 노예 애새끼가···으···가만두지 않는다···절대로 가만두지 않아···죽여버릴 테다···.”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큰일 났다. 정말로 큰일 났다. 대사가 굉장히 화 났어. 루디님은 대체 어쩌려고 이런 일을 한 걸까.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랐던 걸까.
아마 그랬을 거다.
루디는 후궁 깊은 곳에서 살고 있는 아이다. 똑똑해 보여도 겨우 아이일 뿐이었다. 그래서 저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루디는 전혀 몰랐던 거야.
하지만 레빈과 달리 루디는 전혀 겁먹지 않은 것 같다.
힐끔 대사를 쳐다보더니 벽난로로 달려갔다.
벽에 걸려 있는 긴 쇠꼬챙이를 떼어낸다.
장작을 뒤집는 쇠꼬챙이는 앞이 창처럼 뾰족했다. 손잡이에는 둥근 고리가 달려 있다. 둥근 고리가 꼬챙이에 떨어지면서 쩔겅쩔겅 쇳소리가 울렸다.
대사가 한쪽 무릎을 일으켰다.
여전히 아픈 것 같다. 제대로 몸을 펴지 못하고 엉거주춤 엎드린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나 루디를 쫓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서운 눈으로 루디를 노려보고 있었다.
레빈은 당황해서 루디를 뒤쫓아갔다.
어쨌든 이 장소를 피하자. 보리스 님에게 뭔가 변명을 하고 도와달라고 말하면···.
심장이 너무 벌컥벌컥 뛰어서 지금 당장이라도 멈출 것 같았다.
“루디 님!”
벽난로 근처로 달려가 막 입을 여는데, 루디가 쇠꼬챙이를 레빈에게 내밀었다.
“여기! 이건 나한테는 너무 무거워요.”
“어! 루, 루디 님! 안 돼요. 이 사람은 엄청 높은···.”
“괜찮아요. 보리스 님이 우리한테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우리는 폐하의 보석이니, 오늘 우리를 폄하하거나 손대는 자는 가만둬서는 안 된다고.”
반강제로 쇠꼬챙이를 레빈에게 준 루디가 힐끔 대사를 보았다.
대사는 아직도 반쯤 엎드린 상태지만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다.
루디는 곧바로 책상으로 다가가 깃털펜을 손에 쥐었다.
섬세하게 조각된 긴 펜대의 뾰족한 촉이 창에서 쏟아지는 빛을 받아 번쩍 빛났다.
루디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명령을 받은 거예요.”
“어···어···.”
“보리스 님이 훈련받을 때 자주 말했잖아요. 신분이 높은 사람은 모호하게 대화하는 경우가 많다고. 그 뒷면에 있는 뜻을 알아듣지 못하면 황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고 한 거, 기억하죠?”
“···네···어···하지만···.”
“폐하의 시종들도 계속해서 말했잖아요. 오늘 우리가 누군가에게 폄하 받으면 그건 황제 폐하를 모욕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루디가 손을 까닥해서 레빈의 고개를 숙이게 했다.
레빈이 몸을 굽히자, 대사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소리로 말했다.
“보리스 님이 누굴 노리고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아마 오늘 우리한테 시비를 걸었던 사람 중에 있었을 거예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당하면 당한 대로 갚아라. 그게 오늘 우리가 받은 명령인 거죠. 그러니까 괜찮아요.”
“···.”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여기까지 무료입니다] > 끝
작가의 말
여기까지가 무료였습니다.
다음화는 유료예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