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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51화 (51/201)

< 부드러울 때가 가장 무섭다 >

* * *

머리가 아프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머리가 울렸다.

황태자 로베르토는 얼굴을 약간 찌푸렸다.

천재라고 잔뜩 추켜올리던 젊은 마도구사의 시연회는 실패로 끝났다. 약간 실망스럽긴 하지만 이런 일은 의외로 자주 벌어졌다.

마법식을 새기는 건 상당히 까다롭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보통 사람은 무엇이 적혀있는지 형태조차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옆에서 도울 수도 없었다. 그 작업은 온전히 자신의 눈으로만 보고 해내야 하는 고난이도의 일이었다.

함께 온 남자들도 같은 가문 사람일 테지만 아마 마법 문자를 보지는 못할 것이다.

심지어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코레아 왕조라 해도 모두가 마법 문자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들었다.

문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를 찾는 일에 아버지가 혈안이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로베르토의 기분이 안갯속에 잠긴 듯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로베르토는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곁에 있던 시종이 금세 눈치채고 작은 환약과 음료수를 건넸다.

의국에서 만든 약이다. 정말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로베르토는 약을 삼키고 다시 정면에 시선을 주었다.

천재 마도구사가 물러나고, 다른 마도구사가 앞으로 나섰다.

그가 선보이는 것은 오래전에 잠깐 사용하다 납품이 중단된 마도구다.

차가운 바람을 뿜어내는 건데, 마석을 너무 많이 소모하기 때문에 한동안 납품 받지 않았다.

조금 개선됐다고 하기에 오늘 보기로 했지만 여전히 마석을 많이 사용했다.

마도구사는 마력 소모량이 적어졌다고 주장하지만 아마 대량 구매는 어려울 것이다.

오늘 시연하지 못한 마도구는 며칠 뒤 납품할 때 다시 황제나 황태자인 자신에게 보이게 된다.

‘마녀의 환상이라고 했나.’

그때는 미리 준비한 마도구를 가져오기 때문에 오늘 같은 실패는 없다.

하지만 마석을 많이 사용한다면 그것 역시 납품은 어렵다.

마력 소유가 너무 부족했다.

디코콰리아의 전쟁에서 마력 소유를 노예로 빼돌리려고 했지만 거의 구할 수 없었다. 카니아의 증오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카니아에서는 제정신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귀족을 잡아 죽였다. 증오에 눈이 뒤집혀 뒷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마력 소유의 대부분이 귀족이다. 그리고 점점 숫자가 적어지고 있었다.

제국이 마력 소유자의 부족에 시달리는 것처럼 카니아 왕국도 마력 소유가 적다.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에 와서야 제정신을 차렸는지 뒤늦게 마력 소유자를 추적하고 있지만, 이미 카니아의 손에 닿는 자는 없었다.

소수의 살아남은 자는 외국으로 도망간 것 같다.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도 그런 케이스라고 들었다.

‘그 아이가 도착하면···.’

문득 시선을 돌리자, 아버지와 어머니가 밝게 웃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는 특히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만난 금색의 아이를 보고도 그다지 화내지 않는다. 오히려 웃고 있었다.

하지만 로베르토는 지금 이 순간이 자신의 노예가 죽었을 때보다 더 두렵다.

다정하게 어머니를 보고 웃는 아버지의 의도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걸까.

아무리 젊게 꾸미고 있다 해도 어머니의 나이는 더 이상 젊지 않다. 벌써 50대 중반이다.

아버지가 나이든 첩비들의 방을 즐겨 찾는다 해도 40대까지가 한계였다.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50이 되기 전에 이미 밤의 방문은 끊겨 있었다.

한데,  여러 해 동안 찾지 않은 황후의 방을 갑자기 찾아 일주일에 서너 번은 함께 밤을 지낸다.

로베르토의 노예가 죽은 직후부터 그랬으니, 함께 밤을 지내게 된 지 벌써 일 년이 넘었다.

로베르토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이상하다.

처음에는 약간 의심하는 듯 보이던 어머니는 일 년 넘게 황제의 방문이 이어지자 안심한 모양이다.

어릴 때부터 아는 데다 오랫동안 함께 육체를 겹쳐온 사이라 그랬을 것이다.

한 발 떨어져서 보면 분명히 이상한데, 어머니는 남편의 사랑이 돌아온 거라고 믿었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완벽하게 황제인 아버지가 그럴 리 없는데.

황태자 로베르토는 배꼽 위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 자리는 비어 있다.

원래라면 오래전에 생겼어야 할 후계자의 문장이 아직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로베르토가 어린 시절, 어머니는 여러 번 아버지에게 항의했었다.

[저 아이는 황태자입니다. 어째서 후계자의 문장을 내리지 않나요? 어째서 아직도···.]

그때마다 아버지는 황태자 자리에 있으니 그것으로 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그리고 어느 날 덧붙인 말.

[만일 로베르토 이후에 강한 마력 소유가 나온다면 그대는 아들의 목숨을 내게 내밀 수 있는가. 그걸 각오할 수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문장을 새겨줄 수 있다. 말해 보라.]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로베르토가 어머니에게 그 말의 뜻이 어떤 건지 물었지만 대답해주지 않았다.

나중에 시종장에게 그 말의 의미를 물어보았다.

그때 후계자의 문장은 한 번 몸에 새기면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 문장이 사라질 때까지 다른 사람에게 후계자의 문장은 새길 수 없다.

[로베르토님은 야속하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건 폐하께서 주시는 나름대로의 사랑입니다. 황가에 마력 소유자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지요. 어떤 걸 희생하더라도 반드시···.]

시종장이 그렇게 말하면서 그를 보았다.

[훗날 마력이 강한 황자가 태어나면, 아버님께서는 당신을 죽이고서라도 그 아이를 황태자 자리에 올리실 겁니다. 하지만 로베르토 님께 문장이 없다면 당신의 목숨은 살릴 수 있을 테지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지만, 시종장의 눈빛이 굉장히 차가웠던 것을 기억한다.

그날 이후 로베르토는 아버지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했다.

로베르토 이전에도, 그 후에도, 마력소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안심한 뒤에는 한동안 그런 아버지를 동경하기도 했다.

아버지처럼 강한 황제가 되어야지, 그래서 제국을 더욱 크고 강하게 만들어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야지 생각했다. 문장이 없어도 훌륭한 황태자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엔리코가 태어나기 전까지, 자신이 황태자 자리에서 밀려날 가능성은 없다고 믿었다.

로베르토는 배를 누르고 있던 손을 떼고 사람들 속에 파묻혀 있는 아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엔리코를 닮은 아이.

아버지의 금색 노예.

어쩌면 아버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나디아그라 비와 만나왔는지 모른다. 저 아이는 황제의 아들일지도···.

로베르토에게 후계자 문장이 없는 건 언제나 어머니의 목을 조른다. 빨리 조치하지 않으면 황태자 자리를 빼앗기고 만다며, 초조함이 어머니의 등을 떠미는 거다.

그 초조함 때문에 어머니는 엔리코를 죽였다.

그것은 실수였다.

아버지를 거스르지 말았어야 했다.

그 일은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분노를 건드렸을 것이다.

아버지는 진짜 화났을 때 부드러워진다.

벌컥 화를 내고 소리치는 건 언제나 정확하게 계산된 타이밍에 이루어졌다.

아버지는 절대로 진실한 감정을 겉에 드러내지 않는다.

‘이번에는 안 돼. 두 번은 용서받지 못한다.’

어머니는 알고 계실까.

엔리코가 죽은 이후 어머니의 모국에 의지하던 상당수의 광석이 다른 여러 나라를 통해 수입되고 있다.

천천히, 굉장히 느리게 진행되고 있지만 확실하게 어머니의 모국은 영향력을 잃고 있었다.

그걸 눈치채지 못한 것은 오직 제국이 헛된 돈을 쓰면서 황후의 모국과 관계를 이어왔기 때문이다.

로베르토 역시 일 년 전 자신의 노예가 죽기 전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끼고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우연히 그 사실을 발견했다.

두렵다.

얼마 전에는 그를 지지하던 국내의 귀족 중 한  가문이 발을 뺐다.

왜인지는 모른다.

그저 당주의 와병 때문에 당분간 영지에 머물게 되었으므로 황궁에 오지 못한다고만 답해왔다.

그 말을 끝으로 개인적인 연락이 완전히 끊겼다.

로베르토가 사람을 보내도 의례적인 감사와 인사만 되돌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머니에게 정기적으로 선물과 편지를 보낸다. 예전처럼, 아니 더욱 화려하고 정성스러운 물건을.

그래서 어머니는 로베르토가 이상하다고 말해도 자기편을 의심하는 못난 놈이라고 비난할 뿐이다.

어머니는 아들보다 그 사람을 더욱 믿고 있었다. 실제로도 어머니에게는 쓸모없고 나약한 황태자 따위보다 훨씬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을 거다.

그 가문의 당주는 오랫동안 어머니의 모국과 관계를 유지하며 도움을 주던 사람이었다.

‘발을 뺀 건 아버지 때문이겠지.’

왜인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서히 목을 죄어 온다.

손과 발을 보이지 않는 끈으로 얽어매고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여전히 마력소유의 후계자를 포기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저 아이가 그런 건지도 모르지.’

로베르토는 음울한 눈으로 어린 금속 노예를 보았다.

한동안 사람들 속에 있던 아이가 졸졸 흐르는 황금 머리를 흔들며 구석으로 향했다.

멀어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로베르토는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이제 머지않아 타국에서 사로잡힌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가 도착한다.

아버지가 원하던 마력소유, 그것도 코레아 왕조의 문장을 가진 아이다. 그 아이를 황족 안에 끌어들이면 마법식을 보고 적을 수 있는 혈통을 확보할 수 있다.

아버지도 분명히 그걸 원하고 있다.

어머니는 그 아이를 황녀와 혼인시켜 황족에 혈통을 남길 거라고 예상하고 있지만, 로베르토의 생각은 달랐다.

추측이지만 아버지는 그 아이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싶어한다.

스스로 황태자 자리를 내놓는다고 말하면 될까. 그리하면 아버지는 그를 놓아주려나. 이제 그만 편해지고 싶다.

나약하다, 더욱 강해져라, 그를 다그치는 어머니에게도 의지하지 못한 채, 망망대해에서 구멍 난 조각배를 타고 혼자 떠도는 기분이 들었다.

* * *

레빈이 그 남자를 발견한 것은 시연회가 시작하고 조금 뒤였다.

황제의 근처에 서 있을 때부터 계속해서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그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순식간에 옆에서 멀어져 간다. 뇌 속에 숨겨두었던 몇 년 전의 일이 시간을 뛰어 넘어왔다.

레빈은 자기도 모르게 으드득 이를 갈았다.

시종 일을 배우러 들어온 소년들은 모두 간단한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창고에 수납한 물건을 고참과 함께 체크하면서 어디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눈에 익히고, 주전자를 잡는 방법부터 찻잔을 놓고 차를 만드는 요령까지, 일상생활에 가장 가까운 것부터 배웠다.

시녀도 그렇지만, 시종의 대부분은 귀족 자제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부류는 아니었다.

어떤 시종은 부유한 가문 출신이라 숟가락보다 무거운 건 들어본 적도 없고, 어떤 이는 작위만 가지고 있을 뿐 평민과 비슷한 생활을 했다.

레빈은 후자의 경우였다.

코딱지만한 영지에, 수입은 빈약한 농작물이 전부다.

가난한 영지의 더 가난한 영민은 자식을 우글우글 낳았지만, 그 아이들은 한 해를 넘기기 전에 대부분 죽었다.

살아남아 서너 살을 넘겨도 미래는 밝지 않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겨울이 되면 굶어 죽거나, 그 해를 간신히 넘겨 십 대가 되어도 결국에는 노예상에 싼값으로 팔려 갔다.

그리고 그들의 부모는 다시 아이를 낳았다.

똑같은 불행의 연속이다.

레빈은 그렇게 찢어지도록 가난한 지방 귀족의 많은 아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런 레빈이 황궁에 들어오게 된 것은 뛰어난 외모 덕분이다.

누군가의 연줄이나 소개, 혹은 뇌물 없이 황궁 시종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말이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레빈은 그걸 가능하게 할 정도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황궁에 들어가도 인생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본래라면 들어가지도 못할 장소에 취직한 레빈은 쉽게 무시당하거나 맞고, 때로는 성희롱 뺨치는 일도 당했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성희롱이라고 하기보다는  그저 괴롭힘의 연장이었다.

질 나쁜 시종이나 소년도 분명 있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잘 교육된 시종, 혹은 미래의 시종이다.

문제가 될 만큼 지나친 일은 없었다. 그 정도면 참아 넘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날이 되기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

가만히 서서 이를 악물고 있는 동안, 어느새 시연이 모두 끝난 모양이다. 중간중간 기억이 없었다.

어느새 그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아니면 그날처럼 커튼이나 방문 뒤에 숨어서 쳐다보고 있을까.

그날의 일은 미수로 끝났다.

누군가가 방에 들어오는 기척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체적인 면에서는 피해도 크지 않았다. 옷이 찢기고 피부를 약간 만져졌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씻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할 수만 있었다면 상대방의 손을 물어뜯고서라도 반항하고,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덤볐을 것이다.

그러지 못한 것은 상대방이 너무 높은 신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황후의 모국을 대표하는, 그 나라의 대사였다.

< 부드러울 때가 가장 무섭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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