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도 모른다 >
* * *
홀의 가장자리에는 음식이 차려진 긴 테이블이 있고, 반대편에는 악단이 있다.
낮인데도 천정에서 내려온 샹들리에와 벽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너무 환하다.
가운데에는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볼 수 있도록 사치스러워 보이는 책상이 띄엄띄엄 세 개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아름다운 잉크 병이 주르륵 놓였다. 책상 한쪽 끝에서 다른 끝까지 빼곡하게 차 있었다.
한 번에 이토록 많은 마잉크를 쓰지는 않을 거다. 한낮에 켜둔 불도, 이것도 모두 과시하기 위한 물건 같다.
‘단순한 허세가 아니라, 정말 이곳은 풍요로운 것 같다.’
그다지 많은 곳을 본 건 아니지만, 궁을 장식하고 있는 물건도, 사용되는 비품도, 모두 잘 관리되어 있었다.
보리스와 함께 훈련하는 건물도 분명히 누군가는 피를 흘릴 텐데, 언제 누가 청소하는지 핏자국 하나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
루디의 시선이 책상 위의 잉크병을 주욱 훑었다.
‘정말 많구나.’
이 잉크도 나디아 비마마의 고국인 덴버에서 가져온 걸까.
나디아그라 마마의 저택에 있는 잉크는 그동안 상당히 줄었다. 아껴 쓰기는 했지만 이것저것 테스트하느라 소비가 많았던 탓이다.
물건에 대한 탐욕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조금 탐이 났다.
검은 머리의 마도구사가 모두 자리에 앉고, 시종 몇 명이 그들의 곁에 다가가 섰다.
루디도 황제의 명령대로 가장 젊은 남자의 곁으로 향했다.
“어머 귀여워라.”
“어린 신사네요.”
“인형 같아. 우리 영지로 데려가고 싶을 정도네요.”
“어머,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내가 먼저예요, 백작 부인.”
귀부인들이 은방울 굴러가는 목소리로 웃는다.
‘이 나이에.’
조금 부끄러워졌다.
루디에게 이끌린 것처럼, 홀 안을 가득 채운 남녀가 책상 주변으로 몰렸다.
각 책상 근처에는 여러 가지 잡다한 물건이 놓인 긴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 위에 있는 건 마도구가 들어 있는 듯한 작은 상자 몇 개와 손 씻는 작은 은대야, 자수가 놓인 수건,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간식 같은 것이다.
시종들은 각자 그 테이블 근처에 서 있었다.
젊은 천재 마도구사의 자리에도 시종이 한 명 있다.
마도구사 보조를 하라고 해서 모든 걸 혼자 해야 되는 줄 알았는데, 과연 시종 경험도 뭣도 없는 6살짜리한테 모든 걸 맡기지는 않는 모양이다. 다행이다.
루디가 젊은 마도구사의 곁에 서자, 테이블에 붙어 서 있던 시종과 시선이 마주쳤다.
홀 옆에 있던 방의 화려한 시종들과 달리, 조금 나이가 있는 남자였다. 표정이 변하지는 않는데 왠지 미소를 지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종이 정중한 태도로 상자 안에 들어있던 물건을 꺼내 마도구사의 책상 위에 놓았다.
알라딘의 램프처럼 생긴 것이다.
마도구사라고 해서 직접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줄 알았는데, 미리 만들어진 물건에 마잉크로 주문만 적는 모양이다.
‘조금 실망인데.’
루디는 속으로 살짝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만드는지 보고 싶었다. 어쩌면 나중에 스스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다. 뭐, 그 전에 마석을 잔뜩 구해야겠지만.
램프의 뚜껑은 그냥 모양만 만들어 놓은 듯 열리지 않았다.
대신 꼭지 부분을 뽑았다 끼울 수 있게 되어 있다. 그곳이 마석을 넣는 부분인 것 같다.
마석가루로 된 굵은 선이 예쁜 무늬를 만들며 램프 전체를 휘감아, 마석이 들어갈 꼭지 부분까지 이어져 있었다.
다른 마도구사의 책상에도 상자에서 꺼낸 마도구가 놓였다.
젊은 마도구사의 램프와 달리, 다른 건 전등이나 불 마도구처럼 동글납작하게 생겼다.
오늘의 특별 상품은 젊은 마도구사의 것 뿐인 모양이다.
다른 마도구사의 시종들이 잉크병 뚜껑을 열어 마도구사의 앞에 당겨 놓는다.
루디도 하려고 했지만, 그의 키가 너무 작았다. 책상 위를 볼 수는 있어도 손이 잉크병에 닿을 것 같지 않다.
미리 예상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예비 의자가 있었는지, 시종이 테이블 뒤에 있던 작은 의자를 가져와 마도구사 옆에 놓았다.
그리고 루디를 안아 그 위에 올려놓는다.
주변을 둘러 싼 귀족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퍼졌다.
‘하아···.’
정말 부끄럽다.
아무래도 진짜 보조를 한다기보다는 마스코트 같은 느낌으로 있으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귀족들이 예쁘다, 귀엽다를 연발하는 걸 보면, 보조를 명한 것도 그저 내 금색 노예 귀엽지? 라며 자랑하는 의미였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에게 향할 시선을 루디가 빼앗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젊은 마도구사가 얼굴을 찌푸리더니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루디는 의자에 올라간 상태에서 책상 위로 몸을 조금 내밀었다.
제일 화려해 보이는 잉크병을 앞으로 당긴다.
뚜껑을 열고 책상 옆에 놓인 긴 접시에서 젓가락처럼 생긴 은막대를 들었다. 그걸로 잉크병을 살살 저어 마석으로 만든 펄과 검은 잉크를 섞었다.
바닥에 가라앉은 마석이 올라와 잉크에 반짝거리는 게 보이자, 마도구사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또다시 귀부인 사이에서 귀엽다는 말과 함께 웃음소리가 울렸다.
젊은 마도구사의 눈썹이 더욱 찌푸려졌다.
젊어서일까. 사람들의 이목 끄는 걸 상당히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드디어 시작이다.
마도구사가 허리를 펴고 엄숙한 동작으로 펜을 들었다.
무슨 주문을 적는 걸까.
루디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마도구사들은 책상 옆에 양피지로 된 종이를 펼쳐 놓고 있지만, 이 젊은 천재는 아무것도 준비해오지 않았다.
숨을 가다듬더니 천재가 램프를 기울여 책상 위에 뉘었다.
램프 옆면에 깃털 펜을 댄다.
그리고 글자를 적어 넣었다.
[동영상]
“···.”
이게 뭐야.
자기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올 뻔해서, 루디는 황급히 입술을 당겨 물었다.
쓰여진 단어도 이상하지만, 선 하나 하나 그리는 시간이 길다.
무슨 주문을 쓰는지 알아보기 이전에 늙어 죽는 게 아닐까.
글자를 쓴다기보다는 섬세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보였다.
마도구사가 주문을 적어 넣는 게 그토록 느리니, 시연회가 연회처럼 변해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코레아 왕조의 가문이 자랑스럽게 내놓은 천재 마도구사는 ‘ㄱ’자의 선 하나 그리면서도 눈길을 좁히면서 한숨을 쉬거나 없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쳤다. 온갖 폼을 잡는다.
게다가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니, 글자를 쓰는 순서가 이상했다.
‘영’이라는 단어를 쓸 때 ‘ㅇ ㅕ ㅇ ‘의 순서로 쓰는 게 아니라 ‘ㅇ ㅇ ㅕ‘처럼 왼쪽부터 채워서 쓴다.
그리고 아까도 생각했지만 굉장히 느렸다.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느리다.
다른 마도구사도 그런가 하고 살짝 곁눈질해보았는데, 양피지를 베끼고 있는 만큼 그들은 이 천재보다도 느린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는 루디도 이들이 왜 이렇게 느린지 알게 되었다.
‘이 사람들, 글자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구나.’
한글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자신들이 적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다.
‘나’와 ‘너’의 차이도, 이 사람들에게는 그저 점이 왼쪽 오른쪽에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의미를 모르다 보니 어떤 게 중요한 단어인지도 알 수 없다.
누군가는 마법식을 고치거나 새로 만들려고 시도했을지 모르지만, 단순히 글자의 순서나 단어의 순서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마법식을 만들 수 없다.
다른 마법식과 조합해보려고 단어를 가져와 써봐도 물 마법식에 불 종류를 갖다 쓰면 제대로 발동될 리 없을 것이다.
결국엔 그저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주문을 그대로 사용하는 게 가장 안전하고 쉽다는 걸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반 사람과 마찬가지로 마도구사 역시 한글이 정확하게 보이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 사람들 역시 흐릿한 창을 사이에 두고 글자를 보는 느낌인 듯했다.
황제 앞에서는 젊은 천재가 새로운 걸 고안해낸 것처럼 말했지만, [동영상]이라고 쓰는 걸 보면 아마 오래전에 쓰인 주문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뿐이리라.
어느새 시종들이 음료가 담긴 쟁반을 들고 귀족들 사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시작한 건지, 악단도 은은하게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조금씩 분위기가 흐트러지고, 귀족들이 마도구사 가까이 다가와 마법식 적어넣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젊은 여성 한 명이 마도구사를 동경하는지, 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마법식을 보지도 않고 적는군요. 다른 마도구사도 여러 번 만났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보지 않고 혼자 적는 마도구사는 처음이에요.”
자세를 꼿꼿하게 세우고 마법식을 적어 넣던 천재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글쎄요, 제게는 다른 사람들이 이상해 보입니다. 외우면 훨씬 빠르고 간단해지는데 어째서 이걸 외울 생각을 하지 않는 걸까요? 그런 사람들이 마도구사라고 고개를 들고 다니는 걸 보면 우스워지곤 하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걸요.”
“후훗, 그건 변명일 뿐입니다. 재능보다는 노력의 문제인 거죠.”
“그런 걸까요.”
젊은 여성이 말을 하다 문득 루디를 보았다.
“어머, 너도 마도구사가 부러운 거니?”
루디가 천재를 쳐다본 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젊은 여성이 몸을 굽혀 눈을 마주치고 말했다.
“괜찮아. 너도 언젠가는 이분처럼 훌륭하게 될 수 있단다.”
천재가 흘깃 루디를 쳐다보며 웃었다.
“글쎄요, 노력도 중요하지만 재능과 혈통이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면 어려운 일도 많으니, 너무 희망을 주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노예 신분으로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으니까요.”
“···.”
루디는 부끄러운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눈을 살짝 치뜨고 주변을 살피자, 음료 쟁반을 들고 홀을 돌아다니던 시종이 근처에 와 있었다.
사람들이 새 잔을 들고 한 입 마시는 걸 보고 천재도 목이 마른지 침을 축인다.
루디가 눈을 깜박이며 바라보자, 시종이 눈치채고 가까이 다가왔다. 혹시라도 중요한 마도구에 쏟지 않도록, 시종이 뒤로 돌아 천재의 뒤편에 섰다.
루디는 쟁반에 있는 잔 중에서 가장 차가워 보이는 걸 골라 들고, 천재에게 내밀었다.
“목이 마르신 것 같아서요.”
방긋 웃자, 기특하다든가 귀엽다며 귀부인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천재와 이야기하던 젊은 여성도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웃고 있었다.
“흠, 그래.”
천재가 음료수 잔을 받아 들고 책상에서 약간 떨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대부분 천재에게 몰린다. 이틈이다 싶었는지 사람들이 천재에게 말을 걸었다.
새로운 종류의 마도구가 나왔는지, 자신들의 영지에도 방문했으면 좋겠는데 언제쯤 시간이 나는지, 그런 말들이 많았다.
시종들의 시선도 잠시 천재에게 향했다.
루디는 사람들의 시선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바닥에 내려가려는 척 책상에 몸을 기울였다.
마도구에는 마법식의 일부가 적혀 있다.
[동영상 플레이어 ; 이어 보기 ; 신데 ]
아까도 생각한 거지만, 이 천재라는 마도구사가 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하고 많은 것 중에 황제한테 보여주려는 게 동영상 플레이어야.
뭐, 사람들이 보면 놀라기야 하겠지만 이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무기도 아니고, 랜덤으로 영화가 튀어나오는 것도 아닌 모양이니.
‘나라면 물폭탄이나 화염방사기 같은 주문을 골랐을 텐데.’
어쨌든 이게 젊은 천재의 인생 최대 업적이 될 모양이다.
루디는 손가락을 내밀어 마도구의 글자를 조금 문질렀다.
그의 작은 손가락에는 차가운 잔 표면에 있던 물기가 약간 묻어 있었다.
마도구가 발동하지 않으면 거기에 적힌 것은 그저 펄잉크에 불과하다. 종이라면 모를까. 도자기에 쓴 잉크 따위는 살짝만 문질러도 지워질 것이다.
루디는 ‘동영상’이라는 글자가 ‘동영싱’이 된 걸 확인하고 손가락을 뗐다.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알아도 그게 어디인지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점 하나 잘못 찍힌 걸 찾아내려면 고생깨나 해야 하겠지.
심지어 글자가 똑똑히 보이지도 않는 상태라면 더욱 힘들 거다.
재능과 혈통, 노력으로 인생의 성공가도를 달리는 천재가 어떻게 위기를 넘기는지 한 번 보자.
천재가 마법주문을 다 적어 넣은 건 그로부터도 한참이 지난 뒤였다.
몇 번이나 휴식 시간을 갖고, 중간중간 음식도 먹었다.
처음의 두근거리던 감정은 마법식의 [동영상] 글자를 보는 순간 모두 사라졌고, 이제는 지루하기만 하다. 하품만 나왔다.
그래도 억지로 입을 다물고 있지만, 하품 참는 것도 한두 번이다. 이제는 가만히 의자에 앉아있는 게 무슨 고문 받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마침내 기다리던 마도구 시연 시간이 되었다.
그제야 아주 조금 가슴이 뛰었다.
사람들이 조용해지고, 젊은 천재가 황제의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새 황제 앞에 화려하게 생긴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젊은 천재가 그 위에 램프를 놓았다.
“오늘 폐하께 보여드리는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마도구입니다. 저희는 이걸 ‘마녀의 환상’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기대에 찬 환호성이 올랐다.
루디는 미리 이야기 들은 대로 마석이 들어있는 그릇을 들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것을 공손히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천재가 고개를 끄덕여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램프의 꼭지를 열어 마석을 한 개 넣고 다시 닫는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너무 놀라지 않도록 조심해주십시오. 이걸 보고 너무 놀란 바람에 기절한 사람도 있으니까요.”
천재가 빙그레 웃고 숨을 가다듬었다.
“들어라, 이 세상 모든 것을 움직이는 이치여, 인간과 동물, 그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는 마녀의 세상을 이곳에 구현하리니, 나타나라! 투명한 인간아, 그리고 영혼들아!”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흠, 당연하다.
당황한 젊은 천재가 다시 주문을 외웠다.
“들어라, 이 세상 모든 것을 움직이는 이치여, 인간과 동물, 그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는 마녀의 세상을 이곳에 구현하리니, 나타나라! 투명한 인간아, 그리고 영혼들아! 나타나 모습을 드러내다오!”
“···.”
마찬가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구에 동영상 플레이어는 있어도 동영싱 플레이어는 없으니 당연하다.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당연한 일도 생각하지 못한다. 천재는 자신이 적은 주문이 틀렸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것 같다.
하긴 여기에 오기 전에 수십, 수백 번은 되풀이해서 적어봤을 테니, 당연히 맞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얼핏 볼 때는 특별히 틀린 부분도 없어 보일 테고.
결국 두 번이나 더 주문을 외쳤지만 동영상이 나오지 않자, 황제가 그만두게 했다.
아주 조금 미안해졌다.
< 아무도 모른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