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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48화 (48/201)

< 까마귀가 보고 있다 >

* * *

전제가 달라지면 과정도 결과도 다르다. 그리고 대응 방법도.

만일 루디 자신이 공작의 후계자가 아니라면 배에 있는 문장도 가짜일 것이다.

후계자 문장이 가짜라면 코레아 왕조의 문장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그렇다면 루디는 코레아 왕조도, 공작의 후계자도 아닌 단순한 전생자일 뿐이다. 마력만 잘 숨긴다면 굳이 숨죽여 살 필요가 없어.

하지만 그렇게 간단해지지는 않는다. 모든 게 가짜였다면 오히려 문제는 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경비대장은 공작가의 핏줄이니 뭔가 알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유모는 진짜로 믿는 것처럼 보였다. 루디의 눈이 썩은 게 아니라면 그녀는 진짜다.

일부러 문장을 만들어내고 탈출 시켜, 거기에 자신이 진짜 후계자라고 믿는 유모까지 있다.

그게 다 가짜였다면?

단순히 ‘아, 나는 진짜가 아니었나 보네요’로 끝나지 않는다.

‘젠장! 내 몸에 무슨 짓을 했을지 누가 알아.’

어쩌면 마력이 있는 것 자체가 뭔가의 저주이거나 트릭일 수 있다.

탈출할 때 먹었던 마법 사탕도, 자신이 후계자가 아니라면 문장을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겠지. 몸에 해로운 뭔가였을 지도 모른다.

루디는 경비대장과 유모에게 안겨 있을 때 자신이 어떤 얼굴이었는지는 모른다. 적이 외쳤던 말로 검은 머리라는 사실을 알 뿐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자신은 지금의 외모였을 수도 있다. 검은 머리가 만들어낸 것이고 사탕을 먹음으로써 본래의 외모로 되돌아왔을 뿐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 정도면 나을 텐데.’

마법이 있는 세계다. 어쩌면 시체술사가 존재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자신은 죽은 시체에 혼을 넣어 되살린 걸지도···.

‘토할 것 같아.’

생각 탓인지 갑자기 메슥거렸다.

루디는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이마가 땅에 닿는다. 여전히 속이 메슥거렸다. 한동안 그러고 있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갑자기 몸이 터지거나 녹아내리면 어쩌지. 만일 몸 안에 마력이 있는 것 자체가 무슨 폭탄 같은 거라면···.’

어쩌면 그는 제국이나 카니아 왕국 같은 적국에 보내기 위한 인간 폭탄이었을지도 몰라.

전염병을 퍼뜨리는 것처럼 저주 같은 게 붙여져 있는지도 모르고, 나중에 알고 보니 마력이 사실은 자신의 생명력이었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코레아 왕조라 마력이 많은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 혈통이 아니라면 뭔가 술수를 사용해서 생명을 마력으로 바꾸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쓰면 쓸수록 생명이 줄어들어 결국엔 엔진 꺼진 자동차처럼 멈춰 버리는 거야.

자신이 이곳에 왜 왔는지, 무엇이었는지도 모른 채 낯선 곳에서 혼자 외롭게 죽어버린다.

“···.”

마생물 제리를 쫓아, 온 저택 안을 헤집으며 돌아다니던 리리샤 공주가 그에게 달려왔다.

“루!”

리리샤 공주가 그를 부르며 밝게 웃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공주님.”

자신이 저주를 퍼뜨리거나 폭탄처럼 터져서 이 귀여운 아기가 다치게 된다면.

“저리로 가요, 공주님.”

고개를 외면하고 몸을 웅크리자, 리리샤 공주가 와락 그의 등에 올라탔다.

“루! 루!”

위로 해주는 걸까. 버둥거리며 등 위에 붙어서 목을 꽉 끌어안았다.

“무거워요.”

약간 코맹맹이 소리가 났다.

리리샤 공주가 힘들게 루루의 등을 기어 올라 어깨로 얼굴을 쑥 내밀었다.

“루!”

“···.”

그냥 바닥에 서서 보면 되는데, 바보 같다.

‘바보는 난가. 나잇값도 못하고 겁에 질려서 훌쩍훌쩍하고 있으니.’

조금 진정하고 나니 부끄러워졌다.

문득 시선을 들자 벽 쪽에서 파지직 스파크가 일고 있었다.

불새가 그를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다.

생쥐 제리는 어디 숨어있는 것 같다.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

그렇게 속으로 불새에게 중얼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리리샤 공주가 옆으로 기우뚱하고 미끄지면서 루디의 앞으로 와 안겼다.

어른이 되었을 때 2살까지의 기억이 전혀 없는 건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다. 루디 역시 지구에 살 때의 어린 기억은 별로 없다.

하지만 지금처럼 나이가 어릴 때 이전의 기억이 전혀 없는 건 이상하지.

더구나 어린 몸이기는 하지만 어른의 정신이 들어가 있는 거다.

그런데도 두 살 때까지의 기억이 없다는 건 뭔가 인공적인 게 가미되어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것만 아니면 내가 가짜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을 텐데.’

아, 우물쭈물하는 거 싫다.

루디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공주가 손가락으로 구석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루! 찌찌기! 찌찌기!”

찍찍이라고 하는 걸까. 쥐를 봤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벽난로 안쪽에서 반쯤 투명해진 제리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찍찍 소리를 내는 것처럼 입을 오므리고 수염을 쫑긋거린다. 제리도 약간 걱정하고 있는 것 같다.

루디는 리리샤 공주의 손을 잡았다.

괜찮다. 아직 뭐가 진짜인지, 어떻게 됐는지는 몰라. 저쪽이 가짜일 가능성도 있다.

‘어떻게 보면 그럴 가능성이 더 크지.’

기억이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모든 상황은 루디가 진짜라고 말하고 있었다.

“···.”

만일 루디가 진짜고 저쪽이 가짜라면, 그걸 꾸민 녀석의 목적은 뭘까.

‘아, 하지만 후계자라는 건 분명히 어린 아이겠지.’

만일 그 아이가 이용된 것이라면 정말 슬픈 일이 될 것 같다.

루디는 자신을 마구 잡아당기는 공주에게 이끌려 벽난로 쪽으로 향했다. 공주가 제리를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다.

“조금 천천히 가요, 공주님.”

루디가 말하자 리리샤 공주가 더욱 빨리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이하고는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쪽은 정말 심각해 죽겠는데 고작 생쥐 하나 보자고 이렇게 난리니.

자기도 모르게 조금 웃음이 나왔다.

* * *

저벅 저벅, 발소리가 땅을 울린다.

디코콰리아에 들어가 있던 제국의 병사 중 일부는 이번에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를 호송하는 임무를 맡아 고국으로 돌아간다.

아스란은 그중 한 명이었다.

그 일을 위해 디코콰리아에서부터 먼 거리를 빙 돌아 다른 나라까지 들어가야 했지만, 솔직히 안심하고 있다.

디코콰리아는 기분 나쁜 곳이었다.

아니, 디코콰리아가 아니라 와토린구 공작령이 그랬다.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 전쟁으로 디코콰리아 사람들의 행색이나 건물은 초라했지만 그런 곳은 어디에나 있다.

오히려 와토린구 공작령은 오랜 전쟁에 시달린데 비하면 사정이 괜찮아 보였다.

몇몇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와토린구 공작가는 예전부터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한다.

그 영지에서 살고 있는 영민은 나라가 어려워졌어도 굶어 죽는 이가 전쟁 없는 나라보다 오히려 적었다.

모두 공작가에서 세금을 감해주고 각종 혜택을 주어 영민을 살려가는 거라고 했다.

그렇게 들었다.

“카악, 퉷!”

아스란은 가래를 바닥에 뱉고 주섬주섬 물건을 챙겼다.

전쟁터를 돌아다닐 때 자신의 물건은 모두 스스로 지고 다녀야 한다.

물통과 창, 도끼를 비롯해 식량과 나무로 된 식기에, 공동으로 사용하는 냄비까지 챙기다 보면 물건이 끝도 없이 많아졌다.

높은 분들이야 종자들이 알아서 다 챙기지만 아스란처럼 농사짓다 끌려온 평민은 하라면 하라는 대로, 들고 가라면 들고 가라는 대로 모두 짊어지고 걷는다.

얼핏 듣기로는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가 잡힌 곳은 디코콰리아 근처에 있는 작은 나라라고 한다.

이제 거의 도착했다고 하는데, 까마귀를 보았다.

기분이 더러워졌다.

‘젠장.’

디코콰리아의 와토린구 공작령에도 까마귀가 많았다.

‘단지 시체가 많기 때문이야.’

전쟁을 하면 시체가 나온다.

사형장에서 목이 떨어진 뒤 남는 검붉은 피와 살덩이들, 들판에 버려진 남자와 여자의 시체. 여기저기 물건처럼 버려진 아이들의 하얀 몸뚱이들.

직접 손으로 찔러 죽이고 범하기도 했다.

나 혼자만이라면 몰라도 전쟁터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한다. 죄책감 가질 일도, 별로 끔찍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스란은 물건을 모두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료들은 이미 상관의 명령대로 대열을 만들고 있었다.

뚜벅뚜벅 걸어 동료들에게 향하자, 자신과 비슷한 얼굴색을 한 병사가 한 명 보였다.

‘저놈도 계속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걸까.’

와토린구 공작령은 조용했다.

지나치게 조용했다.

까마귀들이 그렇게 많은데 울지 않는다.

놈들은 그저 동그랗고 검은 눈으로 가만히 병사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와토린구 공작령의 여자를 바닥에 누이고 범할 때도, 아이의 입에 칼을 찔러 넣을 때도, 남자가 보는 가운데서 여자와 아이를 유린할 때도, 까마귀는 가만히 쳐다본다.

시체 때문에 모이는 게 분명한데 썩은 살덩이를 전혀 먹지 않았다.

기분 나쁘다.

뭔가가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아 정말 기분이 나빠졌다.

문득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까마귀는 말이여, 마녀들의 심부름꾼이야. 가끔가다 보면 이상하게 사람을 쳐다보는 놈이 있지. 한 사람만 계속 쳐다보는 거야. 그놈은 마녀의 심부릅꾼이다. 만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

젠장.

가래를 뱉고 다시 길을 걷는다.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가 있는 곳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까마귀가 다시 한 마리, 근처로 날아와 병사들 쪽에 시선을 주었다.

가만히 나뭇가지에 앉아 지켜본다.

[까악! 까악!]

“헉!”

갑자기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라자, 근처에 있던 병사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멍청한 놈! 까마귀 처음 보냐.”

“젠장, 비켜!”

아스란은 병사를 밀치고 뚜벅뚜벅 걸었다.

자신을 비웃은 병사의 이마에도 신경질적인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듯 눈 밑이 시꺼멓게 패여 있다.

‘그놈도 까마귀가 무서운 거야.’

까마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도 말하지 못한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은 아는데 설명할 길이 없었다.

까마귀가 무섭다는 말을 하지 못해 입을 다물고 있지만, 한 명 두 명 병사들 사이에서 서서히 공포가 퍼져 나갔다.

* * *

“이제 들어와 봐.”

어둠 속에서 불새의 몸이 파르르 떨리자, 눈송이처럼 작은 불꽃이 사방으로 퍼졌다.

가볍게 날갯짓을 하고 몸을 허공으로 쑥 내밀더니 곧바로 루디의 팔을 휘어 감는다.

잠시 뒤 불새의 몸이 사르르 녹듯이 루디의 팔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찌르르, 팔 전체가 저려왔다.

‘음···.’

루디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픈 것은 아니다.

처음에 전신이 감전된 듯 저렸던 것과 비교하면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저릿저릿했다.

‘역시 불새의 힘이 너무 강한가.’

그냥 통과할 때와 달리 불새가 몸속에 머물면 꼭 방전되는 밧데리를 품고 있는 기분이 든다.

생쥐인 제리는 이렇지 않았던 걸 보면 불새의 몸이 크거나 타고난 성질이 성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팔 전체에서 파직파직 하얀 불빛이 번쩍이며 전기가 일어났다.

‘역시 불새를 몸 안에 넣는 것 조금 어려울지 모르겠다.’

몸속이 저린 것도 문제지만, 너무 눈에 띈다.

제리도 몸에 넣으면 가끔 손끝에서 전기가 일어나지만, 불새는 아예 숨길 수가 없었다.

‘조금 익숙해지거나 뭔가 방법을 마련하면 달라지려나.’

루디가 한숨을 쉬자, 팔의 표면에서 파직 파직 작은 불꽃이 일었다.

불새가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다.

몸속에 있어서인지 감정이 조금 더 직접적으로 전해졌다.

‘괜찮아. 이건 네 힘이 강하기 때문이니까 오히려 좋은 거야.’

마력이 혹시 생명력이라면 어쩌나 싶어서 불새와 제리를 몸속에 넣어보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좋은 발견이 되었다.

마생물을 몸에 넣으면 마치 마생물과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루디가 따로 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이 직접적으로 감정이 전해지기 때문에 자신의 몸처럼 움직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렇게.

루디는 가볍게 손을 털었다.

손끝에서 파지직 전기가 일어 구불구불 앞으로 뻗어 나갔다.

손을 뒤집으며 약간 당기자, 허공을 가르던 전기가 곧바로 사라졌다.

단지 불새가 팔에 있다는 것 하나로, 자유자재로 전기를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루디는 가만히 손바닥을 보았다.

손끝에서는 파지직 계속해서 전기가 작게 일어난다.

마치 불새가 묻고 있는 것 같다.

[다음에 할 일은 뭔가요, 주인님. 명령을 내려주세요.]

지금은 전기만 훈련하고 있지만, 불도 물도 낼 수 있다.

“이제 됐어.”

루디가 말하자, 불새가 스르르 팔에서 빠져나오며 날갯짓을 했다.

이번엔 제리의 차례다.

작은 생쥐가 쪼르르 책상을 가로질러 오더니 루디의 손바닥 위로 뛰어올랐다.

작은 생쥐의 몸이 손바닥 안에 삼켜지듯 들어가는 것을 보고, 루디는 자기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것도 할 수 있는데.’

병의 치료는 쉽게 할 수 없다.

마법은 만능이 아니다.

해독은 할 수 있지만 그냥 치료라고 적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너무 광범위한 단어는 먹히지 않는 것 같다.

혹시나 싶어 ‘심장병 치료’라고도 적어봤지만 되지 않았다.

어쩌면 달리 조건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모의 병이 더 깊어지기 전에 방법을 찾아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만일 자신이 뭔가 이상한 주술에 걸려있는 거라면. 최소한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는 뭔가 좋은 걸 주고 가고 싶다.

괴롭게 하거나 죽게 만드는 존재는 되고 싶지 않아.

작게 한숨을 쉬자 불새가 머리를 기울여 루디의 몸에 부리를 살짝 갖다 댔다.

위로해주는 것 같다.

“고마워.”

루디가 말하는데, 생쥐 제리가 손바닥 위로 불쑥 머리를 내밀더니 코를 쫑긋거렸다.

“너도 위로해주는 거야? 고마워.”

손가락 사이로 제리의 꼬리가 불쑥 나와 흔들렸다.

< 까마귀가 보고 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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