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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46화 (46/201)

< 너무도 기쁜 듯 공주가 활짝 웃었다 >

* * *

매일의 일상은 항상 똑같다.

동이 트기도 전, 캄캄한 새벽에 시종 레빈이 마차를 타고 오면 루디는 모두가 잠든 저택을 나서 연무장으로 향했다.

한겨울의 새벽을 지붕 없는 마차로 달리면 머리카락부터 발가락, 발톱까지 모두가 얼어버린다.

덜덜 떨며 연무장에 도착하면, 이번에는 발바닥에서 불이 날 정도로 열불나게 뛰어다녔다.

보리스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사람을 이리저리 굴린다. 정말로 죽일 생각이 없는 걸까 싶을 만큼 혹독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 시간을 잠깐 겪은 뒤에는 보리스의 이야기를 듣거나 다른 사람의 동작을 보았다.

눈썰미와 약간의 예비지식만 있으면 상대방이 지금 공격하려는지 아닌지 대강은 알 수 있다고 한다.

공격을 할 때, 즉 칼이나 창을 내밀기 전, 주먹을 내지르고 발로 차기 전 등의 행동을 하기 전에 반드시 하게 되는 작은 동작이 있기 때문이다.

보리스는 사람에게 근육이 있는 한 절대로 그런 동작은 절대로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은색 노예들이 서로 겨루는 모습을 보면서 저 동작이 그런 것이라고 알려주거나 가끔은 뭔가가 보였는지 물었다.

하지만 움직임이라고 말하기에도 매우 작은 것들이다.

근육과 손가락의 미세한 위치, 허벅지에 힘이 들어갈 때 달라지는 피부의 두께.

그런 것들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솔직히 듣고 이해할 수는 있어도 실전에 써먹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새해 연회에서의 일에 대해서 황태자나 황후가 뭔가 해오는 일도 없이, 1월 한 달을  그렇게 조용히 보냈다.

하지만 의외로 뭐든 익숙해지기 나름일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정신없이 피하기만 하던 채찍의 움직임이 딱 한 번 루디를 덮치기 직전에 보였다.

채찍이 허공을 날아가는 뱀처럼 요동치는 순간, 문득 생각했던 것이다.

아, 저건 바로 여기에 떨어지겠구나.

아주 작은 차이였다.

긴 채찍이 둥글게 휘어지는 움직임을 보자, 그게 목표로 하는 지점이 어디인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보고 피한다거나 뭔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루디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채찍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내려오더니 갑자기 빨라졌다.

바닥을 치는 순간은 보이지 않았다.

귀가 먹먹할 정도의 소리가 울렸을 때는 이미 채찍 끝이 허공으로 떠올라 있었다.

채찍은 정확하게 루디의 가랑이 사이에 떨어졌다. 아주 조금만, 1cm만 벗어났어도 다리 사이는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보였다.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루디의 내부에서는 와삭, 소리를 내며 뭔가 두꺼운 껍질이 부서진 것 같았다.

그 안에서 아주 작은 게 툭 튀어나온다.

그게 뭔지 아직은 모르지만 분명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불새를 만났을 때보다도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생각했다.

‘아, 시바. 후궁에 있다가 정말 X 뗄 뻔했네.’

*

루디가 뭔가 보았다는 사실을 보리스도 금세 깨달았던 모양이다. 채찍질을 멈추고 가까이 다가와 루디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훌륭하구나. 처음 한 번이 어렵지 그 뒤는 쉽다. 지금까지 왜 그런 걸 못 보았는지 이상할 정도로 앞으로는 잘 보일 게다.”

레빈은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약간 멍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다가 어깨를 추욱 내리고 중얼거렸다.

“저렇게 어린 루디님도 뭔가를 알았는데 왜 나는···.”

글쎄, 그건 재질이나 능력 같은 것보다는, 단지 눈을 감아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레빈은 채찍이 자신을 향해 너무 가까이 오거나 피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 질끈 눈을 감는다.

초능력자가 아닌 이상 눈도 뜨지 않았는데 뭔가가 보일 리는 없다.

벌써 몇 번이나 보리스가 이야기하고 루디도 말했지만, 레빈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보리스가 히죽 웃었다.

“그렇게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닭이 된 계란은 모두 껍질을 깨고 나오게 마련이지. 단지 조금 늦을 뿐이야.”

레빈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보리스의 말을 격려로 받아들인 것 같다.

“···.”

루디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보리스가 그리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처음 본 날 알았지만, 상당히 짓궂은 게 아닐까.

계란은 껍질을 깨지 못하면 영원히 닭이 될 수 없다.

레빈이 그 사실을 깨달을 날이 먼저 올지, 껍질 깨는 날이 먼저 올지는 모르겠다.

연무장에 매일 오면서, 루디는 자신을 향한 은색 노예들의 적대감이 생각보다 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 적대감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눈이 마주치면 살기를 띠고 노려본다.

이를 드러내고 동물처럼 으르릉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보리스가 곁에 없다면 언제든지 달려들어 죽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금색 노예와 은색 노예의 사이에는 계급 같은 게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잘못된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친다고 했던 게 과장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보리스가 허공을 쳐다보았다.

보리스의 시선이 천장 구석을 향해 있는 걸 보고 가슴이 뜨끔해졌다.

거기에는 불새가 숨어 있다.

루디의 눈에도 보이지 않지만 그쯤에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안다.

아주 가끔 불새는 루디에게 사념을 보냈다.

말이 되어 전해지는 것은 아니고 그저 좋아, 라든가 따뜻한 감정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럴  때에는 드물게 정전기 같은 작은 전기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었다.

눈에 띌 정도는 아니니까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보리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렇게 먼 곳에서 일어나는 정전기 따위를 눈치챌 수 있나?’

보리스는 잠깐 천정 구석에 시선을 준 뒤 다시 머리를 내렸다. 그 뒤로 그가 천정에 신경을 쓰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루디의 마음에는 작은 경계심이 켜졌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해 불새를 데리고 다녔지만,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야 할지도 모른다.

보리스가 말한 적이 있다.

황궁에서는 아무도 믿지 마라, 라고.

그것을 자신에게 가르치는 보리스 역시 그 대상에 들어갈 것이다.

루디는 보리스가 한 말을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되새겼다.

[믿지 마라. 황궁은 인간을 잡아먹는 뱀들의 소굴이다. 누구도 믿지 마.]

의외로 그런 것은 어렵다.

옆에 누군가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기대고 싶어진다.

아마 인간이 사회성 동물이라 그런 걸 거다.

리리샤 공주처럼 순수하게 자신을 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아마 보리스에게 완전히 마음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루디는 한숨을 쉬고 지친 다리를 마차에 올렸다.

도르르 마차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하자마자 쓰러지듯이 잠이 들었다.

깨어나는 것은 언제나 마차가 멈췄을 때다.

그가 내려도 레빈은 계속 자고 있었다.

처음 몇 번은 깜짝 놀라 깨어난 적도 있지만 레빈은 예쁜 외모와 달리 성격은 능글능글한 것 같다.

시종 일을 열심히 하겠다고 맹세하거나 울먹이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훈련 도중 보리스가 먹여주는 음식 중에서 가장 맛있는 건 슬쩍 자신이 가져갔다.

심지어 먹는 양도 많아.

한창 클 때니까 그렇겠지만, 먹는 걸 보면 여자가 아니라 남자애구나 라고 확실하게 알게 된다.

생각 탓인지 만났을 때보다 레빈의 키도, 몸집도 조금 커진 것 같다.

루디도 처음 이 세계에서 정신 차렸을 때에 비하면 많이 자랐다.

벽에 기대 놓고 연필을 그어보면 몇 센티 정도는 자란 게 아닐까.

어쩌면 단순히 보리스에게 올바른 자세를 배웠기 때문에 많이 커진 것처럼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보리스는 앞으로의 성장에 필요하다면서 매일 뭔가를 먹이고, 이 시대에는 없을 것 같은 스트레칭을 가르쳤다.

루디가 마차에서 내리자, 입에서 하얀 김을 내뿜던 말이 멀어져 갔다.

문득 하늘로 시선을 돌리자, 하얀 하늘에서 불새가 연한 빛을 뿌리는 것이 보였다.

평상시와 조금 다르다.

조금 불길한 마음에 허물어진 담장 옆을 지나 달렸다.

햇빛이 닿지 않는 담장 구석에는 눈이 쌓여 있다. 불새가 순식간에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며 눈 속에 몸을 숨겼다.

파지직 작은 스파크가 눈의 표면 여기저기에 거미줄처럼 퍼졌다.

불새가 가까이에 있자 작은 감정이 호수 표면의 물결처럼 조금씩 루디의 마음에 닿는다.

언어나 영상처럼 뚜렷한 것은 아니지만 유모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은 다리를 빨리 움직여 저택으로 다가가는데, 불새가 지면과 풀에 몸을 숨기며 이동해왔다.

불새가 건물의 뒤편으로 향한다.

건물을 빙 둘러가자, 뒤편의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유모가 보였다.

이쪽에 등을 돌리고 있어서 유모는 루디가 온 것을 모른다.

가까이 가며 발소리를 내자, 깜짝 놀란 듯 유모가 고개를 들었다.

“아이고, 루디 왔구나. 오늘은 좀 이른가?”

파랗게 된 얼굴로 유모가 웃었다.

아직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 가슴에 손을 대고 있었다. 추운 날씨인데도 이마에 송송 땀방울이 맺혀 있다.

“유모님!”

루디가 다가가자 유모가 영차, 하며 몸을 일으켰다.

“걷다가 허리를 삐끗했지 뭐야. 괜찮단다.”

“···.”

불새가 일부러 알릴 정도면 그런 건 아니었을 것이다. 뚱뚱한 몸과 나이를 생각하면 심장병일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그리 가벼운 것은 아니다.

이런 시대에 심근경색이나 심장마비 같은 게 걸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역사에 큰 관심이 없는 루디도 중세의 의료는 쓰레기에 가깝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이발사가 외괴수술도 했다는 괴담이 사실은 진짜 있었던 일이라는 것에서부터, 가축의 똥을 치료제라며 상처에 바르는 일도 있었다고 들었다.

그때는 어쩌다 나온 우스갯소리였지만 지금은 현실이다.

유모가 심장병을 앓고 있다면 손 쓸 도리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새해 연회 때 만난 의사는 그 이후로 만난 적이 없다. 그 의사와 인연이 닿으면 혹시···.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이 이상했던 모양이다.

유모가 가까이 오더니 루디의 어깨를 툭툭 쳤다.

“괜찮아. 허리가 아픈 게 어디 한두 번이니.”

입술 주위의 일그러진 근육과 송송 베여 있는 땀방울은 여전히 유모가 아프다고 말한다.

루디는 유모의 손을 꼭 잡고 함께 저택의 문으로 향했다.

‘전기 침 같은 게 있다고 본 것 같은데.’

루디는 써본 적이 없지만 동료가 아버지에게 전기 수지침을 선물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예전에는 직접 피부에 뜨거운 걸 놓아 뜸을 놓던 걸 지금은 전기가 대신한다고 하던가.

마석은 색에 따라서 가지고 있는 힘의 종류가 다르다.

난방에 쓰이는 건 붉은 마석, 물에는 푸른 색, 전등에 사용되는 건 노란색이다.

마리의 목걸이는 혼합된 쓰레기 마석이지만, 와토린구 공작가 노예의 목걸이에는 황금색에 가까운 것이 쓰였다. 그 목걸이에는 전기 충격기라고 적혀 있었다.

쓰레기 마석이 사용된 싸구려 노예 목걸이라면 전기 수지침은 물론 레이저 같은 것도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저택의 문 근처에 갔을 때, 유모가 문득 루디를 보았다.

“얘야, 비마마와 공주님을 부탁한다.”

유모가 빙그레 웃었다.

“···.”

플래그 세우지 마라, 유모.

저택의 문을 열자, 루디가 돌아오는 시간을 어느새 몸으로 습득한 리리샤 공주가 쓰러지듯 안겨 왔다.

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던 것 같다.

루디의 배에 이마를 박은 공주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루! 마업! 마업!”

“···.”

사람들 있는 데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아이한테 비밀이라고 말해봐야 소용없다.

루디는 공주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제대로 일으킨 뒤 머리를 손가락으로 예쁘게 가다듬었다.

솜사탕처럼 하늘로 삐죽비쭉 올라가 있던 황금색 머리카락이 조금 밑으로 내려왔다.

리리샤 공주는 기분 좋은지 해쭉 웃으며 루디를 꽉 끌어안았다.

“공주님, 우선 비마마한테 인사부터 해야 돼요.”

“···부우···.”

공주의 입이 오리 주둥이처럼 툭 튀어나왔다.

처음에는 비마마 앞에만 서면 바짝 얼어붙었던 리리샤 공주도 더 이상은 어머니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가끔 큰 소리를 지르거나 정신에 혼란이 올 때만 바퀴벌레처럼 사사삭 구석에 숨을 뿐이다.

“···마업···.”

눈동자에 금세 눈물이 차오르는 걸 보고, 루디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이것도 매일의 일이다.

“남이 보면 풀어지는 마업이 대체 뭔지, 원. 매일 네가 나가면 마업 마업 시끄럽게 말씀하신단다. 어여 해주고 오려무나. 마마께서는 조금 아까까지 자수를 놓다 잠깐 잠이 드셨으니 괜찮아.”

유모가 허리를 짚고 안으로 들어가며 투덜거렸다.

루디는 공주의 손을 잡고 공주의 목욕통이 놓여 있는 파티션 뒤로 향했다.

피타션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리리샤 공주가 이마를 쑥 내밀었다.

“마업!”

“···.”

이마에 살짝 입술을 댔다 떼자, 리리샤 공주가 다시 이마를 내밀었다.

“마업!”

“마법은 하루에 한 번 뿐이에요.”

“···부우···.”

또 입이 오리 주둥이다.

‘이래도 되는 걸까.’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이걸 마법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지만, 언젠가는 제대로 설명하기도 전에 약속을 어기게 되는 날이 올지 모른다.

갑자기 루디가 죽거나 황제의 명령에 의해 강제로 이동될수도 있다.

그때 리리샤 공주는 자신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 아닐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마음이 아플 것 같아.

루디는 리리샤 공주의 오리 주둥이를 손가락으로 살짝 잡고 빙긋 웃었다.

확실한 것은 언젠가 이 평화로운 일상이 끝난다는 것.

후궁의 비마마를 모실 수 있는 남자아이의 나이는 7살이 한계라고 들었다.

그 이상이 되면 어린아이라도 비빈의 처소에 들어가는 일에 약간씩 규제를 받기 시작한다.

“공주님, 오늘 딱 한 번뿐이에요. 마법은 원래 하루 한 번이라고 정해져 있거든요.”

그렇게 말하고 살짝 이마에 키스하자, 너무도 기쁜 듯 공주가 활짝 웃었다.

< 너무도 기쁜 듯 공주가 활짝 웃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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