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45화 (45/201)

< 공주에게 주는 비밀의 마법 주문 >

* * *

분명히 몸이 너무 어리니 당분간은 눈으로 보는 훈련이라고 말했다.

단 몇 초 사이에 몸이 훌쩍 커버린 게 아니라면, 분명 그 말을 들었을 때와 같은 나이일 텐데 어째서 지금 자신은 구르고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처음 십여 초 정도였다.

허공을 나는 채찍이 언제 자신의 몸에 떨어질지 모른다.

루디는 손을 몸에 붙여 동그랗게 몸을 말고 데굴데굴 굴렀다.

바로 옆에서는 레빈이 연달아 수십 번이나 채찍에 쫓겨 이리 저리 뛰고 있었다.

채찍이라는 게 마법 없이도 여러 곳에 한꺼번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바닥을 찰싹찰싹 때리는 채찍은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매우 아플 것처럼 보였다.

언젠가 채찍이 음속을 돌파할 정도로 빠르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아니,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때는 우스개였기 때문에 누군가가 거짓말 한 건지, 실제로 듣기나 한 건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바로 옆에 떨어지는 채찍 소리를 들어보면 음속이 아니라 광속인 것 같다.

촥! 촥! 아슬아슬하게 피부를 피해 떨어지던 채찍이 바닥에 깔려 있던 가죽을 여러 번 두드렸는데, 맙소사, 지금 구르면서 보니 채찍에 닿았던 부분이 너덜너덜하다.

저 채찍에 맞으면 정말로 죽는다.

목 뒤로 오싹 오싹 소름이 돋아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순식간에 내려갔다.

“···.”

갑자기 채찍질이 멈췄다.

숨이 끊어져라 가슴을 헐떡거리며 고개를 들자, 보리스가 가까이 와서 쭈그려 앉았다.

“어떠니, 둘 다 모두 채찍의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봤느냐?”

“···.”

“···.”

레빈도 루디도 대답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

숨이 가쁘기도 하지만, 사실 채찍이 움직이는 건 보지도 못했다.

루디가 알고 있는 건 바로 옆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때리는 채찍 소리와 여기저기 허공에서 날아다니던 가죽뱀 뿐이었다.

레빈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뭐,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았겠지. 하지만 금세 보이게 될 거다.”

보리스가 인자한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소름이 끼쳤다.

사람은 겉으로 보고는 모른다더니, 정말 그렇다.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것처럼 보이던 노인이 그렇게 인정사정없이 굴릴 줄이야.

어쨌든 이제 채찍질은 끝난 것 같다.

루디는 천정을 보고 벌렁 누웠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하얗게 숨이 올랐다.

아주 오랫동안 바닥을 구른 것 같은데 실제로 지난 시간은 수십 여 분? 어쩌면 십 분도 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천정과 가까운 곳, 나무살이 부채처럼 퍼져 있는 작은 틈이 있다. 유리 없이 뻥 뚫린 나무살 너무로 이제 겨우 새벽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보리스가 관람석으로 가더니 뭔가를 들고 왔다. 작은 항아리와 뭔가가 들어 있는 천 주머니였다.

툭, 바닥에 내려놓자 항아리에서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과일물이다. 어른이라면 술이지만 너희에게는 아직 이르니까.”

천 주머니에서는 말린 과일과 빵, 구운 고기가 나왔다.

보리스가 솜씨 있게 칼로 고기를 얇게 잘랐다.

힘들게 움직인 뒤라 식욕은 없었지만, 고기 냄새를 맡으니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주섬주섬 일어나, 손에 얇게 자른 고기를 한 조각 들고 씹는다.

고기는 겉면을 불에 바싹 구워서 조금 딱딱했지만 속은 의외로 부드럽고 맛있었다. 단순히 소금만 뿌린 게 아니라 허브 같은 걸 함께 넣고 구운 것 같다.

일단 뱃속에 뭔가를 넣자 더욱 허기가 졌다.

루디는 다시 고기 한 조각과 말린 과일을 들었다.

“한꺼번에 많이 먹어서는 안 돼. 몸이 둔해진다. 항상 조금씩 여러 번에 걸쳐 나눠 먹어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보리스는 루디와 레빈이 허겁지겁 고기를 먹는 걸 보고도 막지 않았다. 앞으로 그렇게 하라는 뜻인 모양이다.

음식을 먹은 뒤에는 힘들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도 없었다.

축 늘어지자, 보리스가 옆에 앉았다.

“너희를 보니 황제 폐하 어릴 때가 생각나는구나.”

“폐하 어릴 때를 보셨나요? 저는 얘기만 들었는데···.”

레빈이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보리스가 씨익 웃었다.

“굉장히 난폭한 분이었다고?”

“···.”

“그건 비밀도 뭣도 아니니 이야기해도 상관없다. 그런 소문이 난 것도 따지고 보면 나 때문이지.”

지금의 황제가 황태자였을 때, 보리스가 잠시 훈련을 맡았다고 한다.

“귀족이나 황족이 배우는 무술은 뭔가에 많이 얽매여 있지. 예쁘거나 우아한 동작, 혹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나 배려 같은 거 말이다.”

하지만 전 황제는 황태자가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기를 바랐다. 그 방법을 가르치라는 말과 함께 보리스는 황태자가 향하는 전쟁에 보내졌다.

“그때 전쟁터에서 황태자의 시중을 든 게 한참 어리던 시종장이었다. 지금 보면 듬직하지만 그때는 아직 어리고 마음 약한 소년이었지.”

보리스가 히죽 웃었다.

“전쟁에서는 내가 죽느냐, 네가 죽느냐 밖에 없지. 내가 그때 가르친 것은 간단해. 나는 내 주인께서 원하는 대로 황태자에게 적진에 혼자 떨어져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다.”

보리스가 루디와 레빈을 보고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적지에서 식량을 훔치는 법,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소리 없이 상대를 죽이거나 긴장을 누그러뜨리는 방법 같은 거야.”

보리스가 소리를 약간 죽인다.

“전장에서는 익숙한 사람도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그게 계속 되면 언젠가 큰 실수를 하고 엉뚱한 곳에서 죽임 당하지. 그래서 전장에서 병사가 아이를 죽이고 여자를 유린하는 걸 살짝 눈감아 주는 거다. 황태자와 시종장에게도 나는 그런 걸 가르쳤다.”

레빈의 눈이 동그래졌다. 입이 살짝 벌어져 고기가 반쯤 흘러나왔다.

루디는 입을 다물고 씹던 걸 꿀꺽 삼켰다.

디코콰리아에서 겪었던 장면들이 영화처럼 머릿속에서 흘러갔다.

길거리에서 병사에게 질질 끌려가던 여자와 소녀들, 거리에 흩어진 피. 부랑아에게 죽어간 자신의 유모, 노예로 잡혀 거죽만 남아 있던 철장 속의 사람들···.

조금 전까지 맛있던 고기가 모래처럼 느껴졌다.

감정의 혼란을 속이려고 눈을 내리 깔자, 보리스가 웃었다.

“괜찮아. 평상시에 그런 걸 하라고 너희를 다그치지는 않는다.”

“···.”

“···.”

루디가 살짝 레빈을 보자, 그 역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레빈은 눈을 깜박거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보리스가 항아리와 천주머니를 챙겨 잠시 자리를 비웠다.

둘 만 남자, 레빈이 조금 주저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루디님! 죄송해요.”

“머가여?”

혀 짧은 소리로 대답하자, 레빈이 난처하다는 듯이 한 번 웃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처음에 루디님을 만났을 때 너무 기뻤어요. 굉장히 예쁜 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

그게 왜 미안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

레빈의 고개가 더욱 숙여지고 목소리가 작아졌다.

“나는 외모가 이러다 보니, 남자나 여자한테 자주 놀림을 당한다고 할까, 희롱을 받는다고 할까···사실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 굉장히···저기···굉장히 많이 심했죠···루디님은 어려서 모르겠지만···굉장히 많이 괴롭힘 당하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안다.

십대 중반의 웬만한 여자보다 예쁜 소년이다.

신분이 높은 상대라면 성적으로 강요하는 일도 있을 거고, 동료라 해도 아마 비슷할 거다.

이런 시대에서라면 남자도, 여자도 레빈을 상대로 뭔가 강요하지 않았을까.

레빈은 그만큼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그래서 루디님을 보고 생각했어요. 아, 나보다 훨씬 예쁜 아이니까 이 아이 옆에 있으면 나는 안전하겠구나, 라고.”

글쎄, 그것도 그렇겠다.

지구에서라면 이제 겨우 중학생인 소년이 반항하지 못할 성인과 높은 신분의 사람들에게 시달리다 보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걸 가지고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내 몸이 가장 예쁜 법이니까.

하지만 레빈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레빈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참 잘도 우는 아이구나.

“나는 내 외모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루디님하고 조금 있어보니까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나보다 예쁘고 어린데···루디님에게는 아마···아무도 성적으로 뭔가 하지 않을 거예요.”

“···.”

레빈이 그렁그렁 눈물을 담은 눈으로 루디를 보았다.

“왜인지 생각해봤어요. 아마 루디님 눈이나 표정 때문일 거예요. 예쁘지만 조금 무섭거든요. 나, 앞으로는 노력할게요. 나도 그런 표정 지을 수 있도록.”

“···.”

아니, 그건 너의 착각이다. 단순히 아직 그런 일을 당할 나이가 아니기 때문이야.

그리고 레빈의 눈에 루디가 그렇게 보였다면, 단순히 생각과 각오의 차이일 것이다.

만일 루디가 그런 일을 당한다면 자신이 죽더라도 결코 상대를 살려두지 않는다. 상대가 황제라 해도, 그 자리에서 맞아 죽는다 해도, 개처럼 불알을 물어뜯어서라도 반드시 죽이고 만다.

그런 생각이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이 소년은 방향을 완전히 잘못 잡은 것 같다.

‘확실히 머리가 모자라는구나.’

루디는 이 어리숙한 소년이 왠지 불쌍해서 작은 손을 올려 레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레빈님! 앞으로 그런 놈이 나타나면 반항해야 대여. 가만있으면 당하는 거예여.”

“어···.”

레빈이 눈물 가득한 눈을 껌벅거리더니 해죽 웃었다.

“고마워요. 위로해주는 건가요?”

아니, 위로가 아니라 충고다.

보리스의 교육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이 소년에게는 그 정도는 해야 달라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리스가 다시 돌아오고, 그 뒤에는 관람석에 앉아 다른 사람들이 겨루는 걸 지켜보았다.

해가 하늘 높이 떠오르자, 아직 약속한 시간이 아닌데도 보리스는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 오늘은 피곤할 테니 조금씩 익숙해지면 된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 보리스가 두 사람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매일 다니는 길, 매일 보는 건물, 매일 보는 사람, 그런 것들을 그림 그리듯이 머릿속에 기억해둬야 한다. 그리고 매번 생각해. 내가 나를 죽이기 위해서 숨어 있다면 저기 중 어디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을까,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물을 보면 평상시와 달라졌을 때 금방 눈치 챌 수 있게 된다.”

보리스의 말을 끝으로 레빈과 루디는 마차에 올랐다. 두 사람은 마차에 오르자 쓰러지듯이 좌석에 몸을 뉘였다.

그 뒤에는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기절하듯이 잤다. 루디를 모시는 시종이라더니, 저택에 도착해서도 레빈은 깨어나지 못했다.

저택 가까이에 가자 예상했던 대로 공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급해져 짧은 다리를 바쁘게 놀렸지만, 지나친 운동 때문에 피로한 몸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어그적어그적 뒤뚱뒤뚱 달려가 문을 연다.

문이 열리자마자 뭔가가 튀어나와 품속에 달려들었다.

공주다.

루디는 공주를 안은 채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넘어졌다.

“루! 루! ···에에에에에에에엥···.”

“미안해요, 공주님. 많이 울었나요?”

저택 안에는 유모 대신 노예 마리가 서 있었다. 피곤한 표정을 보아하니 또 눈뜨자마자 울기 시작해서 여지껏 이러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픈 엉덩이를 문지르며 일어나 공주와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마리는 옷 수선 뿐 아니라 요리도 할 줄 알았다. 스프를 끓이고 고기를 굽고 찌는 건 물론이요, 햄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녀가 온 것으로 식생활이 상당히 나아졌다. 올겨울은 간신히 넘기는 수준이지만, 이대로만 간다면 내년은 상당히 호화롭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유모가 요리를 거의 못하는 걸 생각하면 마리는 정말 능력자였다.

공주는 여전히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 작은 몸에서 어쩌면 그렇게 많은 눈물이 나오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어쩔 수 없이, 루디는 공주를 데리고 아무도 없는 음식 창고 쪽으로 향했다.

“···루···루···우엥···.”

훌쩍 훌쩍 우는 공주를 앞에 두고, 루디는 허리를 약간 굽혔다.

“공주님, 마법을 걸어줄게요.”

“마업···.”

“내가 어디에 가도 반드시 돌아오는 마법 주문이에요.”

“···흐에···흐에엥···.”

울음이 조금 약해졌다.

지저분하게 섞여서 흐르는 눈물과 콧물을 보고 루디는 근처에 있는 천을 들어 살살 닦았다.

마른 천 정도로는 잘 닦이지도 않는다. 아무래도 물을 적셔서 닦아주거나 아예 세수를 씻기는 게 나을 것 같다.

얼굴을 닦아가며 리리샤 공주와 눈을 마주쳤다.

“···흐끅···끅···마업···.”

“네, 마법이에요. 이 마법주문이 있으면 나는 어디에 가도 반드시 공주님한테 돌아올 거예요.”

리리샤 공주가 코딱지만한 작은 손을 내밀었다. 주문을 달라는 모양이다.

“이건 물건이 아니라 줄 수는 없어요.”

“···우에에에에엥···.”

다시 울음이 커진다.

“아니, 주지 않는 게 아니에요.”

황급히 말한 뒤 공주의 눈을 보고 말했다.

“하지만 이건 공주님하고 나만의 비밀이에요.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요.”

“···흐엥···.”

루디는 리리샤 공주 이마에 입술을 살짝 갖다 댔다.

리리샤 공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업···.”

“이게 주문이에요. 오늘 이렇게 마법 주문을 해놓으면 내일 내가 어디에 가도 반드시 돌아와요. 알았죠? 내가 내일 없어도 울면 안 돼요.”

“···,”

리리샤 공주는 작은 손으로 이마를 만지더니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갑자기 활짝 웃는다.

“마업···.”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덕분에 울음도 그쳤다.

‘다행이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애를 낳고 산후우울증에 걸린다는 여자들의 말이 이제 이해가 갔다.

루디는 울음을 그친 리리샤의 손을 잡고 유모와 비마마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이제 간단하게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면 다시 가축우리로 가야 한다.

그리고 밤이 되면 생각해야 할 일도 많았다.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은 언젠가 착용하게 될 금색 마목걸이다.

마 목걸이는 한 번 작동하면 풀리지 않는다.

영원히 황제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거다.

그걸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지금부터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 공주에게 주는 비밀의 마법 주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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