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색의 노예 보리스 >
* * *
“저도 처음 가보는데요, 금색과 은색 목걸이를 가진 노예만 따로 사용하는 연무장이 있다고 해요.”
레빈이 생각났다는 듯이 말할 무렵에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진작에 말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역시 얼빵한 소년이다.
마부가 조용히 말을 몰아 거대한 건물 앞으로 마차를 가까이 댔다. 타박타박 말발굽 소리가 캄캄한 새벽의 허공에 울렸다.
루디는 검은 하늘 위로 치솟아 오른 건물의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상당히 높다.
둥글게 마무리된 지붕 밑으로 긴 창이 여러 개 나 있었다.
이전에 새해 연회가 열렸던 건물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규모 면에서는 더 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만 드나드는 것이 아닌지, 건물의 오른쪽에는 상당히 높고 큰 문이 만들어져 있다. 대포를 쏘아도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크고 두꺼워 보였다.
‘저런 문을 사람이 움직일 수 있나?’
만일 저런 걸 밀고 당길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 한 명으로 완벽하게 적을 쓸어버릴 수 있을 것 같다.
마차가 멈추기도 전에 시종 레빈이 훌쩍 바닥으로 내렸다. 반대편으로 달려오더니 루디에게 두 팔을 내밀었다.
“···.”
안아서 내려주려는 것 같다.
루디는 마차가 완전히 서자, 레빈에게 고개를 저어 거절하고 스스로 바닥에 내렸다.
레빈이 추욱 어깨를 떨구었다.
“싫었나요?”
“혼자 할 수 있어여.”
“하지만 나는 시종인데.”
“레빈님.”
“님이라니! 레빈이라고 불러주세요. 님이라니! 말도 안 되잖아요.”
“···.”
시종이 노예한테 님자 붙이는 게 오히려 더 말도 안 되는 것 같은데.
과장되게 슬퍼하는 레빈의 모습 뒤로, 건물의 문이 열렸다.
키가 큰 남자가 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네가 루디구나.”
남자가 나지막이 말했다.
안쪽에서 불빛이 새어 나와 문 앞에 선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이가 많은 사람이다.
머리 윗부분의 머리카락이 불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였다.
“너는 시종 레빈일 테고.”
남자가 고개를 약간 기울여 레빈을 보더니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루디의 시선이 남자의 다리를 향했다.
무엇을 신었는지는 몰라도 발소리가 전혀 나지 않는다.
새벽, 날이 밝기 전이 가장 어둡다. 마차의 마 전등이 있기는 하지만 남자의 발은 보이지 않았다.
루디와 레빈 앞까지 걸어온 남자가 히죽 웃었다.
“내가 앞으로 너희들을 맡을 보리스다.”
남자의 목에 금색의 목걸이가 붙어 있었다.
‘이 사람이 금색 노예인가?’
마 전등의 불빛 아래에서 보이는 남자의 나이는 꽤 많다.
키가 크고 몸은 건장해 보였지만,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있고 머리는 새하얗다. 아무리 못해도 60은 충분히 넘겼을 것 같다.
황제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것 같은데, 언제부터 금색 노예가 된 걸까.
루디의 생각을 알았던 것처럼 보리스가 히죽 웃었다.
“나는 너희가 말하는 금색 노예는 아니다. 전대 황제 폐하의 소유였지. 어쨌든 들어가자꾸나. 너희들과는 아무래도 긴 인연이 될 것 같으니 제대로 인사를 하는 게 좋겠다.”
한데 어째서 레빈까지 함께일까. 이 남자는 루디에게 전투를 가르치는 게 아니었나?
루디가 힐끔 레빈의 표정을 훔쳐보았지만, 그 역시 어리둥절한 것 같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이내 생글생글 웃었다. 생각을 포기한 모양이다.
‘저래서 용케 시종 노릇을 하러 들어왔네.’
시종이나 하인은 눈치가 없으면 못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저 녀석은 그른 것 같다.
보리스는 루디와 레빈을 데리고 거대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이른 새벽인데도 몇 사람이 무기를 흔들고 있었다.
혼자 칼을 휘두르는 사람, 둘이 짝을 지어 겨루는 사람도 있다.
보리스가 들어가자 혼자 무기를 휘두르던 사람이 가만히 루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남자는 은색의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보리스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다시는 쳐다보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치 두려워하는 것 같아 약간 이상했다.
건물 안, 횃불 아래에서의 보리스는 그저 늙고 온화한 노인처럼 보인다. 어두운 건물 밖에서는 60 이상이라고 생각했지만 안에서 보니 확실히 더 늙었다.
“어디를 가도 먼저 출입구를 확인해야 한다. 도망갈 곳을 확인하지 않은 상태로 멍하니 있어서는 안 돼.”
보리스가 등을 보인 채 말하더니, 갑자기 몸을 홱 돌렸다.
너무 빨라서 눈이 따라잡지 못했다.
깜짝 놀라는 순간, 이미 보리스는 두 사람의 앞에 무릎을 접고 앉아 있었다.
양손을 쭉 뻗더니 루디와 레빈의 머리를 각각 한 손으로 잡았다. 살짝 손을 댄 것 같은데 움직일 수 없다.
보리스가 레빈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우리가 들어온 곳 말고 문이 어디에 있는지 봤느냐?”
“오른쪽에 큰 문이 있었어요.”
레빈이 곧바로 대답하자, 보리스가 이번에는 루디에게 시선을 주었다.
루디 역시 건물 밖에서 출입구가 두 개 있는 것을 보았다. 레빈은 보지 못했던 것 같지만 옆면에도 문이 하나 있었다.
“아가는?”
보리스가 루디에게 물었다.
루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그런 걸 세세히 보고 기억한다면 아무래도 이상할 것이다.
“미안해여. 못 봤어여.”
“···.”
보리스가 가만히 그를 들여다보았다. 마치 거짓말을 꿰뚫어 보는 것 같다.
루디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리스를 올려다보았다. 무릎을 접고 있어도, 보리스는 그보다 약간 컸다.
잠시 뒤, 보리스가 싱긋 웃었다.
“가르치는 보람이 있겠구나.”
보리스의 손이 가볍게 루디와 레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너희들에게 가르치는 건 생존이다. 이 황궁에서, 그리고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가르칠 거야.”
레빈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어, 저는 시종이죠? 한데 왜 그런 걸 배우나요?”
보리스가 싱긋 웃는다.
“시종이 들어가면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있다고 들었다. 그게 뭐냐?”
“귀머거리 삼 년, 장님 삼 년, 평생 벙어리···요.”
“그래. 왜 그 말을 가장 먼저 듣는 줄 아느냐?”
“어, 그래야 하니까요···?”
레빈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보리스가 하얀 눈썹을 부드럽게 눕히며 웃었다.
“그 말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시종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이기 때문이다. 너는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더구나. 떠벌떠벌 시끄러워도 중요한 일은 무엇 하나 누설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
“하지만 이제 곧 쫓겨날 지경이라고 하더군. 그래서 시종장이 널 부탁했다. 황궁 살림과 시중드는 것만이 시종이 아니야. 몸에 무술을 익히고 있으면 그런 계통으로도 일할 수 있다. 네가 모르고 있을 뿐, 시종에도 여러 가지 역할이 있어.”
“···나, 계속 여기에 있을 수 있나요?”
“네가 내 말을 잘 듣고 따라온다면 그렇게 될 거다.”
레빈은 잠시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간신히 말을 뱉은 레빈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뭔지는 잘 몰라도 그저 일을 잘 못해서 잘린다던가, 왕따를 당했다는 수준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추측이기는 하지만 뭔가 상당한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 뭔가를 입 다물었던 보상으로 보리스에게 맡겨진 걸 수도 있다.
“감사는 나중에 시종장한테 해라.”
보리스는 싱긋 웃고 루디와 레빈을 건물 한편에 있는 관람석으로 데려갔다.
이곳은 그냥 연습장이 아니라 검투 시합장이기도 한 듯하다.
건물의 한쪽은 여러 층의 관람석으로 되어있었다.
다른 벽 쪽으로는 특별관람석인지 허공에 툭 튀어나온 공간도 만들어져 있다. 오페라 같은 걸 구경할 때 보이는 특별 좌석 같은 느낌이었다.
관람석에 앉아서, 보리스는 두 사람에게 금색 노예가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레빈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황제 폐하의 개인 노예에요.”
“은색 노예와의 차이점이 뭔지는 알고 있니?”
“금색 목걸이를 한 노예의 수가 더 적어요. 어, 그리고 은색 노예와 달리 항상 황제 폐하의 곁에 머뭅니다. 호위 기사 처럼요.”
“그건 정확한 설명이 아니구나.”
보리스는 목을 약간 내밀고 자신의 목걸이를 보였다. 황금색의 딱딱한 표면에 제국 황가의 문장이 작게 새겨져 있었다.
“이 황가의 문장은 금색에도 은색에도 찍혀 있다. 모두 황제의 것이라는 뜻이지. 하지만 여기를 봐라.”
보리스가 목걸이를 약간 돌리자 개와 도깨비를 합쳐 놓은 듯한 그림이 새겨진 것이 보였다.
그 그림 옆에는 마석이 박혀 있었다.
이것도 마도구였던 모양이다.
“금색의 목걸이에는 이런 식의 문장이 들어 있다. 이 문장은 황제 개인을 뜻하는 거야. 나의 표식은 전 황제 폐하를 뜻하지.”
루디는 자신의 은색 목걸이에 그런 표시가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것은 마도구도 아니었다. 그저 은색의 목걸이였을 뿐이다.
혹시 은색 노예는 마도구가 아닌 일반적인 목걸이를 하는 걸까.
루디의 의문을 알았는지 보리스가 말했다.
“루디는 아직 어려서 정식으로 목걸이를 받지 않은 것뿐이다. 정식 목걸이는 몸의 성장이 다 끝난 뒤에 받게 되지. 마 목걸이는 주인이 세상에 없으면 다시 풀지 못하니까 어릴 때는 걸지 않아.”
루디의 눈이 동그래졌다.
조금 의외다. 노예의 목숨 따위는 하찮은 거라, 아이가 자라다 목이 졸려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보리스는 루디의 목을 보고 히죽 웃었다.
“아직 은색을 하고 있구나. 금색 목걸이에는 황제 폐하의 개인 문장이 들어가기 때문에 제작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지. 그것 대신 폐하께서 뭔가 주지 않았느냐?”
“칼을 받아써여.”
“그래, 그건 소중히 하렴. 금색 목걸이 대신 주신 걸 게다. 아마 귀한 물건이었을 거야.”
보리스는 은색 노예가 열 명, 백 명, 혹은 천 명이라도 늘어날 수 있는 것과 달리, 금색 노예는 법으로 수가 정해져 있다고 말했다.
한 황제가 가질 수 있는 금색 노예의 수는 평생을 통해 최대 다섯 명 뿐이다. 보리스의 주인인 전대 황제는 죽기 전까지 단 두 명의 금색 노예만을 소유했다고 한다.
은색 노예는 황제가 죽은 뒤 다음 황제에게 소유권이 넘어가지만, 금색 노예는 다르다.
금색 노예의 목걸이에는 황제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표식이 새겨지고 평생 한 사람 만을 모셨다.
모시던 황제가 죽으면 금색 노예는 자신의 뜻대로 궁에서 나갈 수 있다. 목에 황제의 표식이 있는 목걸이를 그대로 남긴 채.
“목걸이를 한 그대로면···.”
레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보리스가 웃었다.
“그래, 그 노예는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지. 황궁을 나가면 나름대로의 감시를 받지만 큰 부자유 없이 살게 된다.”
“보리스 님 말고 다른 금색 노예는 어떻게 됐어요?”
레빈이 묻자, 보리스가 약간 부러워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 황제께서 돌아가실 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보리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검투장을 향해 턱짓을 했다.
“저기를 보렴. 너희 둘은 오늘부터 매일 새벽 여기에 와서 저 사람들이 싸우는 걸 보게 될 거다. 특히 루디, 너는 너무 어리니 몸이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는 몸보다 눈을 더 단련하자꾸나.”
루디가 무기를 다루는 노예들에게 시선을 주자 보리스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인간의 질투란 무서운 거지. 저들은 어린 나이에 금색 노예가 된 너를 죽을 만큼 미워할 거다. 자신이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더라도 살해 충동을 참을 수 없을 만큼.”
보리스가 몸을 낮추고 루디와 레빈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죽을 것 같으면 죽여라! 너희 두 사람에게는 그 허가가 떨어져 있으니. 오늘부터 너희들이 내게 배우는 것은 그런 것들이다.”
보리스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것 같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왠지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으슬으슬 거머리가 피부를 기어가는 것 같다.
레빈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갑자기 부르르 몸을 떨더니 살며시 보리스의 얼굴을 살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을 때, 보리스가 몸을 일으켰다.
아주 잠깐 동안 느껴졌던 으스스한 느낌이 사라졌다. 보리스가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미소를 띠운 채 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금색의 노예 보리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