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43화 (43/201)

< 반드시 왕자님이 될게, 루! >

* * *

없다.

없다.

아무 데도 없다.

“루···루···!”

아무리 울어도 대답하지 않는다.

언제나 부르면 대답해주고 달려오던 루가 없어졌다.

“우에에에에에엥···에에엥···루···루···에에에엥···.”

더 크게, 목이 아파도 더 크게.

커다란 문 밖까지 들리도록 더 크게 울었다.

여전히 돌아오지 않지만, 그래도 운다.

심술궂은 소리를 내는 유모가 잔뜩 선이 그어진 얼굴로 들여다보며 “그만하세요, 그만 울어요”라고 말해도, 문에서 잡아당기며 안쪽으로 데려가도 다시 되돌아와 계속 문만을 바라보았다.

리리샤가 울면 루가 돌아온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목이 아파 소리가 나오지 않아도 계속 울다 보니 결국엔 리리샤의 울음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문이 열리고 루의 모습이 보였다.

커다란 남자가 안고 있었다.

여전히 울면서 루를 본다. 뿌연 눈물 사이로 루의 얼굴이 보이고 익숙한 루의 냄새가 났다. 이상한 풀 냄새도 났지만, 분명 루의 냄새였다.

그리고 왠지 모르지만, 루의 몸에는 하얀 드레스가 여기저기에 빙글빙글 감겨 있었다.

매일 밤 그가 이야기해주던 공주님이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루가 공주님이 됐어!

어쩌면 그래서 계속 돌아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공주님은 커다란 성에 가서 사는 사람이다.

염소보다 커다랗다는 말이 데려가 버리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저택에 남는 것은 심술궂은 두 언니와 난쟁이 7마리, 호박과 쥐, 그리고···에, 뭐였더라. 그렇지, 깨진 마법 거울뿐이다.

루가 이야기해주는 공주님의 저택에는 항상 뭔가가 남는다.

리리샤도 남겨질지 몰라. 아니, 반드시 남겨진다. 공주님이 성으로 가버리고 나면 리리샤는 이 저택에 남아 영원히 깨진 마법거울이 되어 살아가게 될 것이다.

루는 항상 공주님이라고 부르지만, 리리샤는 공주가 아니었다.

가만히 누워 있는 깨진 마법 거울이다.

루가 오기 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루가 없어지면 다시 깨진 거울이 된다.

이전에는 리리샤가 뭔지 몰랐지만, 지금은 자신이 깨진 거울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2시까지 돌아오세요, 안 그러면 마법이 풀어진답니다.]

루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며 울렸다.

루가 이곳에서 없어지면 리리샤는 다시 깨진 거울이 되어 버려요.

마법사도, 왕자님도 이곳에는 오지 않으니까, 리리샤는 절대로 공주가 될 수 없다.

루는 언제 마법사를 만난 걸까. 아니, 루가 마법사인가. 하지만 마법사는 공주가 아닌데.

어쨌든 이제 루는 커다란 성에 가버리고 다시는 오지 않을 거다.

하얀 드레스를 몸에 감고 있는 공주님이니까.

공주님은 항상 저택에 뭔가를 남기고 가버려,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성에서 혼자 행복해질 거야.

‘안 돼. 안 돼. 가면 안 돼.’

루를 꽉 잡고 울자, 왜인지 공주님이 된 루도 울었다. 엉엉 우는 루를 보면서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루는 공주님이 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지켜야지.’

리리샤가 왕자님이 되어 루를 지키면 된다.

그래, 그렇게 하자.

리리샤는 공주가 아니라 왕자가 될 거예요. 그래서 루를 지켜 줄게.

반드시 왕자님이 될게, 루.

그래서 꼭 지켜줄게. 그때까지 공주가 되지 말아요. 이곳에 리리샤를 버리고 가지 마.

* * *

루디가 새해 연회에서 돌아온 뒤, 리리샤 공주님은 더욱 전투력 넘치는 벌레 전사가 되었다.

하루 종일 벌레를 찾아 저택 안을 헤집고 다닌다.

왜 그러는지, 루디는 전혀 몰라.

하지만 공주는 작은 몸으로도 뭔가 뜻하는 바가 있는 건지, 정말 열심이었다.

결국 공주를 막는 건 포기하고 그녀의 몸에 [해독]주문을 적어 넣기로 했다.

사실 마잉크가 위험하지만 않다면 가장 먼저 해독이 필요한 건 리리샤 공주일 것이다. 뭐든 손에 닿는 대로 주워 먹고, 염소 똥이든 닭똥이든 상관없이 밟고 다니니까.

‘문제는 어디에 적어 넣느냐, 하는 것인데···.’

비마마와 똑같이 발바닥에 새길 수는 없다.

리리샤 공주처럼 하루 종일 바닥을 기어 다니는 경우에 가장 타인에게 많이 보여지는 곳은 발이다.

물론 보통의 경우라면 양말을 신고 있겠지만, 이 초라한 저택에는 그것도 매우 귀중한 비품이었다.

노예 마리가 한편에서 열심히 바느질은 하지만 워낙 이거도 저거도 매우 부족하다. 급한 것부터 만들다보면 공주의 양말은 항상 뒤로 밀렸다.

그 때문에 공주는 거의 항상 맨발이거나 유모가 예전에 만든 헐렁한 발토시 같은 걸 끼고 있었다.

말이 발토시지, 그냥 살짝 바느질해 놓은 기다란 천이다. 1미터 기어가면 그대로 벗겨져 버렸다.

무릎에는 루디가 고안해낸 가죽 보호대를 대고 있는데, 그것도 한참 돌아다니다 보면 어디엔가 떨어뜨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발바닥은 곤란하다.

‘음···. 어쩌지.’

가장 만만한 곳은 자신처럼 허벅지 안쪽에 적는 것인데, 아무리 어려도 여자아이다 보니 조금 꺼려졌다.

‘아니,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기는 한데.’

어차피 자신도 다섯 살짜리 아이의 몸이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전혀 문제는 없다.

게다가 지금도 공주님을 목욕시키는 건 루디였다. 이상하게 생각할 구석은 전혀 없다. 이상할 곳은 전혀 없기는 없는데···.

‘하아.’

루디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쿡 쿡.

리리샤 공주가 손가락으로 루디의 몸을 쿡쿡 찔렀다. 아직 풀지 않은 부위의 붕대가 이상한 모양이다.

루디는 공주의 작은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찌르는 걸 멈추게 했다.

“공주님, 건드리면 아파요.”

“···데···드에쓰···.”

뭔가 말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 것 같다.

“네, 그래요. 드에쓰죠.”

대충 맞장구치면서 통 안에 손을 넣어 물 온도를 확인했다.

벽난로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는 대야보다 약간 큰 정도의 작은 통이 놓여 있다.

본래는 다른 용도로 쓰이는 거지만, 현재는 공주가 목욕하는 욕조로 사용하고 있었다.

높이가 약간 낮은 편이라 루디 혼자서도 공주를 통 안에 넣기가 쉽다.

통이 놓인 곳 주위에는 외풍을 막기 위해서 파티션을 둥글게 둘러놓았다. 본래 공주의 침대를 둘러싸고 있던 파티션이다.

본래 자고 있던 아기 침대는 매트리스가 들어오던 날 위층으로 옮겼다.

공주님은 파티션 옆에 놓인 커다란 매트리스에서 루디와 함께 자고 있다.

아무리 보는 눈이 없다고 해도, 공주가 노예와 함께 자는 게 괜찮을지 잘 모르겠다. 뭐, 잠들 때까지 공주가 붙어서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물 마도구로 따뜻한 물을 조금 더 넣은 뒤, 다시 온도를 맞춘다.

적당한 것 같다.

루디는 리리샤 공주의 옷을 모두 벗긴 뒤 온 몸을 사용해 안아 올렸다.

공주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힘을 주자 상처 부위가 아프다. 며칠 새 붙었던 상처가 벌어진 곳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목욕통 안에 들어간 공주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처음에는 물에 들어가면 죽는 줄 알던 공주도 이제는 스스로 기어 들어가려고 할 만큼 목욕을 좋아하게 되었다.

찰박찰박, 물을 손바닥으로 치며 장난을 한다.

팔뚝에 감아둔 붕대에 물이 스몄다.

‘이제 붕대는 모두 풀어버릴까.’

자잘하게 베인 상처도, 제법 깊은 것도 있지만, 염증이 생기거나 문제가 생긴 부위는 없다.

처음에는 의사가 붙여준 약초 덕분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해독]주문의 작용인 것 같다.

[해독]에 상처 자체를 치유하는 힘은 없지만 세균을 없애주는 모양이었다.

부라도프가 깜짝 놀라는 걸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뜻밖에 좋은 걸 발견했다.

역시, 조금 꺼려지기는 해도 리리샤 공주의 몸에 [해독]주문은 적어 넣는 것이 좋겠다.

비마마에게는 이미 [신경 안정제]를 적을 때 써넣었다. 아, 어쩌면 그 덕분에 밤에 먹는 약의 중독성이 조금 덜해지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공주는 신이 났다.

파티션 안은 공주가 튀기는 물로 온통 난리였다. 통 주변에 깔아 놓았던 빨랫감들은 모두 흠뻑 젖었고, 공주의 머리도 물에 젖어 찰싹 가라앉아 있었다.

“정말···이건 다 어쩌나요.”

루디는 물바다가 된 바닥을 보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루디 역시 어느새 홀딱 젖어 있었다.

약간 축축하지만, 그래도 감기에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파티션 안쪽에는 노예상에게서 산 마 목걸이가 놓여 있다.

루디는 마 목걸이 몇 개를 [난방]로 사용하고 있었다.

유모에게는 비밀이다.

그녀는 그저 본래 있던 [난방] 마도구가 루디의 마력 덕분에 더 따뜻해진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것도 맞긴 하지만, 외풍이 심한 건물이다 보니 난방기 하나 가지고는 아무래도 춥다. 그래서···.

찰박 찰박.

공주가 까르르 웃으며 루디의 얼굴을 향해 물을 뿌렸다.

“···.”

아이 상대는 어렵다.

남자가 여자아이 상대하기는 더 어려워.

루디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고 손을 뻗었다.

“이제 그만 나가야지요. 잘못하면 손가락이 쭈글쭈글 할머니가 되어버려요.”

그로부터 십 분은 족히 넘도록 루디는 미꾸라지처럼 몸을 피하는 리리샤 공주와 씨름을 했다.

전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악을 쓰더니, 이제는 나오지 않는다고 난리다.

‘육아는 정말 어렵구나.’

그날 밤 늦게, 모두가 잠든 저택 1층에서 루디는 리리샤 공주의 옷을 모두 올리고 허벅지 깊은 안쪽에 마법주문을 새겼다.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묘한 죄책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다음 날에는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은 거라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놓았다.

공주는 왜인지 모르지만 싸움의 대상을 벌레에서 쥐로 한 단계 올린 것 같다.

루디가 잠깐 염소와 닭, 토끼를 살피는 동안 공주가 멀찍이 서 있던 쥐한테 달려들었다. 쥐가 닭에게 주었던 곡식 알갱이를 훔쳐 먹는 걸 노린 모양이다.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게다가 엄청 빠르다. 이게 공주인지, 인간 거미인지 알 수가 없어요.

해독뿐 아니라 나중에는 주문으로 구속이 가능한 뭔가를 개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놔두면 큰일 날 것 같아.

공주가 야생 원숭이처럼 활발해지는 것과 반대로, 나디아 비마마는 상태가 나빠진 탓에 요즘에는 낮에도 곧잘 잠들어 있다.

처음 새해 연회에서 돌아온 날은 상당히 심했다고 한다.

루디가 상처를 치료하고 돌아왔을 때, 저택 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공주는 목이 쉬어라 울고, 비마마는 소리 지르다 약에 취해 잠이 들었다 하고, 물건은 여기 저기 쓰러져 있고···.

나중에 나디아 마마가 깨어났을 때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정신은 새해 연회의 검투 직전에 멈춰 있었던 것 같다. 갑자기 그에게 달려들어 통곡하며 이 자리에 없는 황제에게 애원하는 바람에 조금 힘들었다.

그래도 황제가 눈앞에 보이지 않고 루디가 곁에서 자신을 엔리코라고 말하면, 비마마는 안심하는 것 같다.

유모가 약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루디는 그날 이후 [신경 안정제]주문을 계속 상시발동으로 해놓고 있다.

새해 연회의 검투 이후로 여러 날이 지나고 상처가 꾸득꾸득하게 마를 무렵, 부라도프가 전투 노예의 훈련을 시작한다고 알려왔다.

공주를 떼어 놓고 갔다 올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동 트기 전 이른 새벽에 훈련을 시작한다고 하니 조금 다행이려나. 최소한 갈 때는 우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돌아온 뒤가 문제기는 하지만.

전투 훈련을 시작하는 날, 루디를 마중 나온 것은 처음 보는 소년이었다.

열 네댓 살 정도 되었으려나.

상당히 어리다.

약간 구불구불한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고, 수수한 옷을 입고 있었다.

어쩌면 정식 시종이 아니라 견습 정도 될지도 모르겠다.

“오늘부터 루디님을 후궁에서 수련장까지 모실 례빈이라고 합니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씀해주세요.”

“···.”

뭔가 이상하다.

어째서 노예에게 존댓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루디가 멈칫하고 가만히 서서 레빈이라는 소년을 올려다보자, 싱긋 웃는다.

귀엽다.

남자인데 귀여워.

웬만한 여자보다 예쁘장하게 생겼다.

황궁이라는 곳은 무슨 미남 미녀에 미소년만 모아 놓는 곳인가.

“루디님 귀엽다!”

아니, 네가 귀엽다.

“꼭 여자애 같아.”

아니, 그건 네 얘긴 것 같은데···.

레빈은 눈을 반짝반짝 뜨더니 갑자기 마차에 가서 좌석 뒤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작은 주머니를 들고 왔다.

“이거 드실래요?”

거기에는 말린 과일이 여러 조각 들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리리샤 공주 생각이 나서 주섬주섬 받아 들고 살짝 시선을 올리자, 레빈이 얼굴에서 빛이 날 만큼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 황궁에 들어온 뒤로 계속 실수만 하고 동료들한테는 괴롭힘 당하고, 일은 맡지 못한 채 계속 나이만 먹어서 정말 괴로웠거든요. 다른 동료는 모두 보조로 일을 하고 있는데 나만 여지껏 아무것도 맡지 못했어요. 그래서 루디님 시중 드는 게 처음 일이에요. 나, 정말 열심히 할게요.”

“···.”

아무래도 잘리기 직전의 떨거지라서 노예인 자신에게까지 밀려온 모양이다.

조금 불쌍해졌다.

뭔가 굉장히 기뻐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전투 노예 따위를 시중 든다는 시점에서 이미 쫓겨나는 게 결정된 게 아닐까.

본인만 모르고 있을 뿐, 이미 버린 취급일지도 모르겠다.

루디는 레빈에게서 받아 든 과일 조각을 한 개  내밀었다.

“우와, 나 주는 거예요? 고마워요.”

자신이 주었던 걸 다시 한 조각 받아먹으면서도 엄청 기뻐한다.

어딘가 좀 모자라는 놈이 아닐까.

“···.”

조금 덜 떨어진 소년 시종과 함께 마차에 오르자, 마부가 말고삐를 들었다.

작은 마 전등을 한 개 달고 있는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여전히 기분이 좋은 소년 시종은 두서없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루디는 멍하니 소년의 말을 들으면서 황제의 일을 생각했다.

황제는 대체 무슨 생각일까.

어째서 자신에게 금색 목걸이의 노예가 되라고 한 걸까.

알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

< 반드시 왕자님이 될게, 루! > 끝

작가의 말

죄송합니다. 새로 산 노예를 완전히 까먹고 있었어요. 급히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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