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40화 (40/201)

< 검투 >

* * *

“나의 시동은 이리 오라.”

황제가 그를 부른다.

루디는 몇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나디아그라의 허리를 끌어 안은 채 황제가 그에게 몸을 숙였다.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도록 황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야, 네가 나의 것이라면 가치를 보여라. 가치 없는 것에 그 색의 목걸이는 과할 터이니···.”

귓가를 건드리는 남자의 입김에 전신이 오싹해졌다. 목소리는 작은데 뇌를 파고드는 듯하다. 마치 날카로운 화살이 뇌 속에 박히는 느낌이었다.

황제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조선시대에 사용했다는 은장도보다 약간 크려나.  남자가 쓰는 거라고 보기에는 다소 작은 단검이었다.

금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칼집까지 포함하여 칼 전체가 금빛이다.

손잡이는 길게 늘어진 호리병 입구처럼 가운데가 홀쭉했는데, 일정한 간격으로 네 개의 마디가 장식처럼 도드라져 있었다. 장식을 겸하는 거겠지만, 주된 목적은 손이 미끄러지는 걸 방지하기 위한 것 같다.

칼이 작기 때문에, 손잡이와 칼날이 거의 1대1의 비율이었다.

손잡이 끝과 제일 앞에는 반짝이는 보석이 여러 개 박혀 있었다.

노예가 손을 댈 만한 것은 아니다.

황제는 단검을 루디의 손에 쥐어주며 다시 한 번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끝을 맺지 못한다면 그 벌은 나의 비가 받을 것이다.”

“···.”

이 썩어 문드러질 개새X!

머릿속에 확 피가 올랐다.

루디는 입을 꽉 다물고 단검을 움켜쥐었다.

작은 손에 들어가자, 황제가 쥐고 있을 때보다 단검이 훨씬 커 보였다.

불새가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그가 지시한 대로 천정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루디는 간절함을 담아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대로는 비마마가 견디지 못해. 그녀가 더 이상 긴장을 견뎌내지 못하기 전에 도와줘···. 내가 싸우기 전에 그녀의 정신을 끊어. 부탁이야.’

이 말이 지금 당장 불새에 닿을지 확신할 수는 없다.

매일 훈련했지만 불새가 그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여전히 시간이 걸렸다.

어떤 때는 십 분, 어떤 때는 한 시간···.

왜 그런 식으로 시간 차이가 생기는지는 잘 모른다.

집중력 때문일 수도, 간절함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불새가 그에게 공감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루디가 어설픈 동작으로 칼집을 밀어내 칼날이 드러나는 순간, 황제가 홱 몸을 돌렸다.

어느새 시종들이 황태자 뒤에 서 있던 노예 한 명을 앞으로 끌어내 잡고 있었다.

황제가 크게 검을 휘두른다.

둥근 원을 그리며 날아간 칼이 황태자 노예의 어깨에 떨어졌다. 거친 소리 하나 없이 뼈가 스슥 작은 음향을 남긴다. 칼이 지나가면서 어깻죽지와 함께 팔이 잘렸다.

끔찍한 비명이 노예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순간, 어딘가에서 파직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사람들의 소란 속에서, 자칫하면 놓칠 것 같은 작은 소리였다.

그걸 알아차린 것은 아마 루디가 계속 불새의 기색을 찾기 위해 신경 쓰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불새다!’

루디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루디의 분노에 불새가 답을 하듯 공명한 것 같다.

은폐 주문으로 모습을 보이지 않는 불새는 아마 전등의 불빛 아래에 몸을 감추며 이동해온 듯 했다.

파직, 파직, 작은 소리가 드문드문 울리더니 루디의 발을 유령 같은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나디아그라의 치마 끄트머리에 달린 보석에 한 순간 노란 스파크가 비치고, 불빛이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종 모양의 커다란 드레스 아래로 스며 들었다.

그 사이, 황제의 칼은 멈추지 않고 곧바로 노예의 반대편 다리를 향하고 있었다.

수평에 가까운 사선으로 칼이 허공을 가른다.

버둥거리는 노예의 넓적다리에 황제의 칼이 닿고 피가 튀었다.

황제의 얼굴 가득한 수염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노예가 쓰러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나디아그라의 몸이 움찔하더니 축 늘어졌다.

황제는 상체를 뒤로 젖힌 나디아 마마를 바짝 끌어안은 채 피 묻은 칼을 바닥에 툭 버렸다.

시종들이 노예를 놓자, 황제는 균형을 잃고 쓰러지려는 남자를 발로 차 검투장에 밀어 넣었다.

노예가 피를 흩뿌리며 바닥을 뒹굴었다.

황제가 루디를 쳐다보려는 듯 고개를 움직였을 때, 루디는 이미 검투장 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

비록 팔 다리를 잃었다고는 해도 저 노예는 루디보다 강하다.

상대가 전투 노예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남자는 몸이 건장하고 좋았다. 혹여 전투 노예가 아니더라도 무예를 배웠을 것이다.

방심하고 있는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을지 모른다.

루디는 검투장 안으로 달려가 남자의 머리 쪽에 섰다.

검을 거꾸로 잡고 그대로 밑으로 내리려는데, 남자가 몸을 움직였다.

아마 잘린 팔로 루디를 잡으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없어진 쪽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노예는 재빨리 남은 손으로 루디의 다리를 움켜쥐었다.

루디의 작은 몸이 옆으로 구르면서 칼날이 뺨을 스쳤다.

얼굴이 화끈해졌다.

사방에서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일어나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여자들의 비명도 끼어 있지만, 분명 흥분에 가득 찬 것이었다.

루디는 곧바로 다시 일어나 칼을 두 손으로 쥐고 앞으로 밀었다.

남자의 허리 중앙을 노렸지만, 칼은 피부를 훑으며 미끄러졌다.

하지만 잘 드는 칼이다.

루디의 작은 힘이 가해졌을 뿐인데도 칼은 남자의 피부를 성큼 베어냈다.

남자는 깊은 상처를 입었어도 싸움에 매우 능숙했다.

남자가 몸을 반쯤 옆으로 굴려 루디의 머리카락을 잡았다.

피부까지 한꺼번에 뽑힐 것처럼, 루디는 강하게 남자에게 끌려갔다.

사람들의 환호가 더욱 커졌다. 방 전체가 들썩거리는 것 같다.

남자는 머리카락을 놓고 하나밖에 남지 않은 다리로 루디의 몸을 덮었다.

그리고 루디의 칼에 손을 댄다.

‘칼을 빼앗기면 죽는다!’

루디는 온몸을 버둥거리며 칼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 여러 번 피부가 칼에 찢긴다. 온 몸이 화끈해졌다.

이제 그만 불새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지 않을까.

뒷일이 어찌되든 지금 이 자리를 피해야 할지도 모른다. 정체를 들키고 황제를 살해했다는 죄명으로 쫓기며 살게 되더라도, 목숨을 잃게 되면 그 뒤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그저 이 자리에서 개죽음을 당할 뿐이다.

그 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어딘가에서 파직거리는 소리가 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지금 당장 자신에게 명령을 내려 달라고 말하는 것 같다.

칼을 움켜 쥔 손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갔다. 아직 작은 몸은 체력도 약하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마음이 약해져 불새를 부르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커다란 칼이 날아와 남자의 허벅지와 가랑이 사이에 박혔다.

황제의 칼이었다.

남자의 구속이 느슨해진 틈을 타 몸을 빼내고, 루디는 단검을 치켜들었다.

남자가 목젖이 보일 만큼 크게 비명을 지른다.

팔 다리를 잃고 피로 뒤범벅이 된 남자는 사람이 아니라 기괴한 고깃덩이처럼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주춤하는데 황제의 목소리가 울렸다.

“끝을 내라.”

주변 열기에 어울리지 않는 냉혹한 목소리였다. 황제가 자신의 귓가에 속삭이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끝을 맺지 못한다면 그 벌은 나의 비가 받을 것이다.]

루디는 칼을 거꾸로 잡고 비명을 지르는 남자의 목을 향해 내리쳤다.

팍! 소리와 함께 칼이 빗나가 바닥을 쳤다.

다시 한 번.

칼을 들어 올려 힘차게 내린다.

피부를 뚫는 약한 저항이 칼을 통해 전해지고, 곧이어 칼끝이 뼈에 닿았다.

남자가 눈을 크게 부릅뜨더니 잠시 몸을 떨었다. 그리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와아아아아아!”

루디가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주저 앉자, 방안을 메운 사람들이 떠나갈 듯 함성을 질렀다.

나디아그라를 시종에게 맡기고, 황제가 가까이 다가왔다.

“승리자에게 보상을 주자. 자유 이외에는 네가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루어 주마.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루디는 축 늘어진 나디아 마마에게 시선을 준 뒤 고개를 숙였다.

“나디아 마마에게 평화로운 바믈···.”

“아쉽구나. 오늘은 그녀와 함께 하려 했건만.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지. 네가 원하는 대로 하자.”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아이에게 보상을!”

“보상을!”

“폐하!”

황제가 한쪽 팔을 올려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큰 소리로 말했다.

“훌륭한 기상을 보인 시동에게 황금 목걸이를 내리자. 이 아이는 지금 이 순간부터 여의 맹수이니···!”

황금 목걸이라는 말을 듣자,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황제가 루디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말을 이었다.

“드문 영예를 안은 어린 검투사야, 여를 실망시키지 마라.”

황제는 그것만 말하고 몸을 돌렸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사람들 사이로 시종과 하인들이 들어와 검투장 안에 널브러진 시체를 치우기 시작했다.

“다음은 누가 하겠는가?”

황제의 말에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자신의 노예를 선전한다.

어느새 부라도프가 루디의 옆에 와 있었다.

성큼 그를 안아 올린다.

“상처를 많이 입었구나.”

부라도프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혀를 찼다.

힘들게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나디아그라의 모습이 보였다.

“걱정 마라. 나디아 마마는 시종장께서 모시고 올 것이다. 황제께서는 비마마의 몸에 다른 남자가 닿는 걸 싫어하시지. 시종장 외에 다른 남자는 시종이라 해도 가까이 하지 않으신다.”

“···.”

싸울 때는 화끈하기만 하던 피부가 이제 욱신욱신 쑤신다. 어디가 더 아프다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몸 전체가 욱신거렸다.

시종장이 먼저 나디아그라를 안은 채 걷고, 부라도프가 그 뒤를 따랐다.

몸이 조금씩 흔들릴 때마다 아프다.

“그래도···용케 폐하의 마음에 들었구나. 곧바로 남자를 죽이려고 뛰어든 것이 주효했던 것 같다. 안 그랬으면 아마 네 목숨은 없었을 거야.”

부라도프가 중얼거리듯 말하며 검투장 방에서 나와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군데군데 등이 켜져 있는 복도의 통로를 따라 차가운 바람이 숭숭 지나갔다.

몸이 무리를 해서 그런지 자꾸만 눈이 감겼다.

부라도프가 초조한 듯 말을 걸었다.

“자서는 안 된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그래, 황금 목걸이가 뭔지 말해주마. 이 제국에는 황제 폐하의 노예가 여러 명 있지. 은색 목걸이를 한 노예가 수십 명 정도 있단다. 그들도 매우 드문 존재기는 하지만 황금 목걸이를 받은 노예는 더 적지. 세 명 밖에 되지 않는 단다.”

부라도프의 말이 귀로 들어와 머릿속에 눈처럼 쌓인다. 왠지 모든 게 다 귀찮아졌다. 피곤해. 그냥 잠들고 싶다.

그런 루디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라도프가 계속 말을 이었다.

“너까지 합하면 네 명이다. 이 넓은 제국 안에 딱 네 명밖에 없는 거야. 그들은 모두 노예 중에서 가장 영화롭다는 황제의 개인 검투사다. 이제는 너도 그렇지.”

“···.”

“얘야, 자서는 안 된다니까. 너도 이제 모처럼 황제 폐하의 검투사가 되었는데 뭔가 좋은 꼴도 좀 봐야지. 앞으로 너는 고귀한 분의 전투 노예가 되는 거야.”

웃기지 마.

피를 흘린 탓인지 조금 느리게 머릿속이 반응했다.

이 세계에서 태어나 계속 살아왔다면 그런 일이 영예롭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정해져 평민은 결코 귀족이 될 수 없는 이곳에서 태어났다면, 황제의 몇 안 되는 소유물이 된 일에 지상의 기쁨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이곳 이외의 세계를 안다.

인간이 누구나 평등하다고 가르치는 현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저쪽 세계에도 똥 같은 사람은 많고 어울리지 않는 천민 사상을 가진 자들도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인간이 평등하다고 믿고 그렇게 행동한다.

루디 역시 그렇게 자라왔다.

영예로워? 고귀한 황제?

똥이나 먹으라고 해.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보고 열광하는  귀족들?

제발 똥 퍼먹고 똥독 올라서 죽어버려라.

그건 그냥 사이코패스들일 뿐이다.

그게 어디가 고귀하고 어디에 영예로움이 있는지, 제대로 눈알이 박혀 있으면 한 번 쳐보고 말해.

그 방에 있던 인간들 모두가 미쳤다.

부라도프가 루디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래, 조금 기운이 났구나. 며칠 동안 부상을 치료한 뒤에는 전투 노예의 교육을 받게 될 거다. 시종장님께 나중에 지시를 받아봐야 알겠지만, 아마 너는 비마마의 처소에 있으면서 교육을 받을 거야.”

“···.”

문득 딱딱한 것이 가슴에 놓여 있다는 걸 깨닫고 시선을 밑으로 내리자, 부라도프가 작게 웃었다.

“아까 폐하께서 내린 칼이다. 마석이 박혀 있는 귀중한 물건이지. 그건 네 소유물이 되었으니 잘 간직해야 한다.”

“···.”

부라도프는 계속해서 뭔가를 주절주절 말하며 끝없는 복도를 걸어갔다.

< 검투 > 끝

작가의 말

연재 시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빨랑 고정시켜야 하는데 죄송해요.

본래는 24시에 고정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낮 12시 정도에 고정이 될 것 같아 보입니다.

연재 시간이 바뀌면 잠자는 시간도 바뀌기 때문에 그게 다시 연재 시간 바뀌는 걸로 이동하다보니 아주 나쁜 연쇄반응이....

고정적인 수면시간 없이 연재 올리면 몇 시간 있다 자고 일어나면 다시 조금 글쓰다 자고...그런 식으로 시간이 흘러가다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이해주시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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