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의 가슴에는 피눈물이 흐른다 >
* * *
루디는 거한의 모습을 보았다.
키가 작은 그로서는 한참이나 고개를 쳐들어야 겨우 머리 꼭대기가 보인다.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올려 거한을 본 뒤 루디는 결론을 내렸다.
‘무리구나.’
이 거한과 싸우면 즉사다.
본래 귀족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전투 노예라는 것 자체부터 루디가 싸워 이기는 것은 무리다.
일전에 와토린구 공작가의 전투 노예가 처형된 장면을 보았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전투 노예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가장 싸고 저렴한 것은 전쟁에서 고기방패로 쓰이는 자들이다.
그들은 젊든 나이 먹었든 상관없이 무작정 창 하나 들려서 전쟁터에 끌려간 사람들이다.
자신의 능력에 따라 조금 오래 살아남을 수도 있고 끌려가자마자 죽을 수도 있다.
어쩌다 재능과 능력이 있어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면, 창 든 고기에서 조금 괜찮은 음식을 받아먹는 고기 방패가 될 뿐이다.
어쨌든 그들은 전쟁터에서 귀족을 위해 몸을 내던지는 고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 결국엔 전쟁터에서 죽을 것이다.
그보다 조금 처지가 나은 전투 노예라고 해봤자 큰 차이는 없다.
전쟁터 대신 검투장에 끌려가 주인의 판돈을 위해 싸우거나, 용병으로 끌려가는 경우가 그런 것인데, 대부분은 그저 고기로 된 소모품에 불과했다.
죽을 때까지 혹사당하다 결국에는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죽는다. 그게 내기 때문이든 아까워진 음식값이나 약값 때문이든, 어쨌든 돈이 죽음의 원인이 될 것이다.
반면에 귀족이 소유하고 있는 고급 전투 노예는 사정이 전혀 달라진다.
그들 역시 노예인 것은 확실하지만 우선 가격에서부터 차이가 많이 났다.
능력 있는 전투 노예는 외모가 아름다워 성노예로 팔리는 고급 노예보다도 비싸다.
대부분은 귀족 가문에서 소유하기 때문에 매물로 나오는 경우도 드물었다.
전쟁에서 적에게 잡히는 경우에는 대부분 그 자리에서 죽임 당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귀족 소유의 전투 노예는 어릴 때부터 특별히 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일반 농가 아이들이 서너 살부터 부모의 심부름을 하며 집안일을 돕는 것처럼, 전투 노예로 길러질 아이들은 그 나이 대부터 훈련에 들어간다.
부모가 전투 노예인 경우에는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검을 잡게 하는 일도 있다고 들었다.
전투노예가 될 아이들은 골격과 근육을 제대로 기르기 위해 어릴 때부터 먹이는 음식부터 다르다.
그리고 나이 들어 더 이상 현역에서 싸우지 않는 전투 노예가 교육을 맡았다.
훈련은 곧바로 실전과 연결 되어 아이들은 서로 생명을 걸고 싸우며 숫자를 줄여나가, 결국 마지막까지 남는 소수만이 진짜 전투 노예가 된다.
이 시대 기준으로 보면 엄청나게 돈이 들어가는 일이다. 일개 노예라고 치부할 수 없을 만큼 제대로 된 전투 노예를 기르는 데에는 돈이 든다.
하지만 전투노예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충성심이다.
귀족의 옆에서 호위의 역할도 겸하게 되는 그들은 24시간 무기를 착용하는 게 허락되는 존재다.
충성심 없는 자에게 그런 위험한 일을 허락할 수는 없으므로, 귀족은 그들을 위해 파격적인 배려를 보였다.
약간의 돈을 주어 쾌락을 알게 하고 아내와 집도 주어진다.
자식을 이룰 수도 있고, 귀족의 신임이 두터워지면 휴식 시간에 혼자 외부 출입을 할 자유도 주어졌다.
아내를 여럿 가진 전투 노예도 있다고 들었다.
주인의 신임이 깊은 전투 노예는 목걸이만 착용했을 뿐 일반적인 측근과 크게 다를 바 없어지는 거다.
그러한 일들은 다시 소유자에 대한 충성심으로 돌아가, 결국 자식의 대에도 이어지게 된다.
그런 전투 노예 중에서도 한 번도 검투장에서 진 적이 없는 실력자라고 한다면, 그래, 그건 정말로 루디처럼 싸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런 건 황제도 알고 있다.
루디가 듣기로, 황제는 불과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직접 칼을 들고 전쟁터에서 싸웠다고 한다.
그는 황제이면서 동시에 전사다.
저 뚱뚱한 뱃살도 벗겨보면 근육일지 모른다.
루디는 조용히 고개를 내렸다.
‘참아, 조금만 더···. 겁을 먹어서 생각 없이 행동을 일으켜서는 안 돼. 섣불리 불새를 불러오면 저 남자에게 들킬지도 모른다.’
너무 이른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저 남자는 수십 년 동안 이 제국을 다스려온 사람이다.
그 동안 침략해 속국으로 만든 나라도 많지만 반란을 꾀해 성공하거나 다시 독립한 곳은 없다고 들었다.
겉보기에 어떨지 몰라도 황제는 유능하고 능수능란한 사람이다.
스스로 전쟁터에서 싸웠다고 하면 눈도 예리할 것이다.
루디가 불새를 이용해서 뭔가 하면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게다가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지만, 황제는 이미 불새 같은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
황궁의 보고에 뭐가 들었을지, 황족에게 은밀히 내려오는 이야기에 어떤 것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
루디는 긴장으로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주먹을 꽉 쥐었다.
*
그의 옆에서 서 있던 나디아그라가 부들부들 떨면서 기도하듯이 두 손을 맞잡았다.
“···폐하···제 생명을 바쳐 사랑하옵는 나의 황제시여···부디 자비를···. 이 아이는 너무 어리옵니다···X···X···는···.”
떨리는 비마마의 입술 사이로 바람 같은 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아무도 모를 만큼 작지만, 익숙한 루디의 귀에는 똑똑히 ‘리코’라고 들렸다.
조금씩 나디아그라의 정신에 혼란이 생기기 시작한 모양이다.
루디는 고개를 조금 기울여 비마마의 얼굴을 보았다.
커다란 눈동자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손가락 위에서 부서진다. 눈물이 손목을 타고 내려가 작은 길을 만들었다.
“괜찮아요, 비마마.”
작은 소리로 말했지만 들리지 않는 것 같다. 나디아그라의 눈동자는 오로지 황제에게 못박혀있었다.
“나디아!”
황제가 입을 비틀어 미소 지으며 나디아그라를 보았다.
황제의 수염 일부가 삐뚜름하게 올라가더니 두툼한 혓바닥이 입속에서 뻐끔 모습을 보였다. 혀가 수염에 파묻힌 입술을 살짝 건드리고 다시 들어간다.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디아그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오라, 내 귀여운 비여.”
“···폐하!”
나디아그라는 몸이 떨려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 같다.
가느다란 몸을 앞으로 내밀자, 드레스가 바닥에 닿으며 둥근 모양을 약간 무너뜨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인다.
루디는 재빨리 두 팔을 내밀어 나디아그라의 손을 받쳐 들었다.
작은 루디의 몸에 아주 조금 비마마의 무게가 실린 것 같다.
작은 손, 작은 힘이지만 그게 도움이 되었던지 나디아그라가 간신히 한 발 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종처럼 퍼진 드레스가 바닥을 흘러가듯이 굼실굼실 움직여 황제를 향했다.
몇 발자국 앞으로 나가자, 황제가 이어받는 것처럼 루디에게서 나디아그라의 손을 받았다.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아 끌어당기며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아름답구나, 나디아.”
“···폐하···!”
눈물을 그렁그렁 담은 채 황제를 올려다보는 나디아그라의 모습은 루디의 눈에도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황제의 옆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여자 한 명 있었던 것 같다. 감상은 똑같아도 생각은 완전히 정반대였던 것 같지만.
황후가 쭉 찢어진 눈으로 나디아그라를 노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아한 나비 같던 황후의 움직임이 석상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이를 악무는 것처럼, 황후가 미소를 지었다.
“호호호. 폐하. 대사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그렇지. 대사의 전투노예와 저 아이를 붙이자는 이야기였지.”
황제는 나디아드라의 허리를 깊숙이 당겨 이마에 한 번 입술을 댄 뒤 빙그레 웃었다.
“우리 황후는 항상 재미있는 생각을 해내지. 하지만 저 거한과 이 작은 아이를 붙이면 너무 쉽게 끝날 것이다. 그래서야 무슨 재미가 있을까.”
황제가 방안에 몰려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한 번 둘러보고 말을 이었다.
“검투라는 것은 모름지기 양쪽의 전력이 비슷하고 아슬아슬해야 재미가 있는 법이다. 이 아이의 능력을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저 거한의 능력을 내리는 수밖에 없지.”
황제의 시선이 거한의 소유자인 대사를 향했다.
“어떤가, 대사! 자네 노예의 팔 하나 다리 하나를 잘라내는 것이. 그러면 얼추 맞지 않을까 싶은데.”
“!”
사람들의 입에서 “호오!”하는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나오는 것과 달리, 대사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어쩌면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는 저 전투 노예는 자신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귀족의 것이거나 왕의 소유물일 수도 있다. 단지 나라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빌려온 걸지도···.
“그것은···저···.”
대사가 대답을 못하고 쩔쩔매자, 황제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허긴 아무리 여라 하여도 남의 노예 팔다리를 마음대로 잘라내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렇다면···그렇지, 황태자의 소유는 어떨까.”
황제의 시선이 천천히 이동해 황태자를 향했다.
“여의 즐거움을 위해 너의 것을 하나 내놓을 수 있겠느냐, 아들아.”
황제가 나디아를 안지 않은 팔을 내밀자,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시종 한 명이 공손히 두 팔을 내밀었다. 시종의 손에는 커다란 칼이 놓여 있었다.
황제가 검의 손잡이를 잡고 당기자, 스르릉 소리를 내며 검집에서 칼이 빠졌다.
마도구 등의 불빛을 받아, 검이 하얗게 빛난다.
필시 엄청나게 좋은 보검일 것이다.
이번에는 황후와 황태자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 * *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아버지라고 대답할 것이다.
황태자 로베르토는 아버지 황제가 두렵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어릴 적에는 아버지를 동경했다.
모두가 위대한 황제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커다란 등을 보면서, 언젠가는 아버지가 믿고 의지하는 아들이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었다.
장하구나, 내 아들이라는 소리를 듣는 게 소원이었다.
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아버지의 마음에 들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다정한가 싶으면 금세 냉혹하게 내치고, 두려워 벌벌 떨면 아비한테 너무 냉정하다 말하며 쓸쓸하게 웃는다.
처음에는 그저 동경이었던 감정이 두려움으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인자했다 금세 냉혹해지는 아버지의 변덕 아래 로베르토는 조금씩 위축되어, 지금은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해도 그게 언제 바뀔지 걱정하느라 벌벌 떠는 멍청이가 되어 버렸다.
그에게 아버지는 불 뿜는 용이 사는 거대한 산이요, 폭풍이 휘몰아치는 바다 같은 존재였다. 그 안에 들어가면 언제 불에 태워지고 바닷속에 가라앉을지 모른다.
모두가 위대하다고 말하는 황제지만, 로베르토의 눈에는 자식 잡아먹는 괴물로만 보였다.
이번에는 그 두려움이 극에 달해 있었다.
디코콰리아의 유아를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고 아버지가 엄명을 내리셨는데 그걸 지키지 못했다.
그가 와토린구 공작의 성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가장 중요한 성이 파괴되어 있었다.
공작의 후계자였던 에디에루는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집무실로 들어갔다는 목격자는 있었지만 그 이후, 누구도 그 아이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상금을 걸고, 공작령은 물론이요 국경까지 사람을 보내 탐문했지만 검은 머리의 아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단서를 얻고자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동안 귀국 일자를 놓쳤다.
그게 아버지의 진노를 샀던 모양이다.
나중에 측근이 알려준 바에 의하면 황제가 말은 하지 않았어도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때부터는 정신이 없었다.
허둥지둥 일을 마무리한 뒤 측근을 이끌고 제국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이미 황태자가 무능하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력소유를 황실의 피 안에 넣는 일은 중요하다.
황가가 보유하고 있는 보물 중에는 강한 마력이 없으면 발동하지 않는 마도구가 많다.
그것은 다른 귀족 가문도 마찬가지여서, 마력 소유자를 확보하는 건 가문이 존속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이미 몇 가지를 제외하면 황실에서도 사용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는 마도구가 대부분이었다.
어떤 건 너무 오래 되어 사용 방법조차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니 실패해서는 안 되었다.
코레아 왕조라고 해서 모두 마법식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장이 없으면 제아무리 코레아 왕조라 해도 쓸모없다. 그런 이들은 단지 후세대가 문장을 타고날 가능성이 있으니 유용할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 존재가 에디에루다.
유래 없을 만큼 강한 마력 소유자이면서 동시에 코레아 왕조의 문장이 있는 아이 에디에루.
그런 존재를 확보할 기회를 놓쳤으니 아버지의 분노가 얼마나 크고 강한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황태자의 입장이 바뀔 거라고는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 로베르토는 알고 있다.
아버지에게 이웃 대국의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핏줄이나, 정실 황후의 정통 황자라는 건 하등의 가치도 없다.
아버지에게 중요한 것은 유능한가 아닌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가 안 되는가 하는 점이다.
로베르토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 끝은 간단할 것이다.
로베르토는 이번에야말로 폐태자가 될지 모른다는 각오를 하고 제국에 들어왔다. 오히려 그렇게 되면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시간만 흘러갔다.
바로 이 순간까지.
아버지는 그를 질책하는 대신 그가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내온 노예를 내밀라고 말씀하신다.
마음이 괴롭고 슬퍼질 때마다, 나만은 당신의 편이라고 계속 그에게 힘을 부어준 유일한 존재.
아들이 여럿 있는 어머니보다도 그를 더 걱정하고, 피가 이어진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처럼 그를 챙겨왔던 노예의 목숨을 바라신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온전히 자신의 것이었던 노예가 오늘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가 그에게 주는 형벌이었다.
마음을 부수고 한없이 외로운 혼자가 되는 것.
로베르토는 덜덜 떨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면서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은 뜻대로, 뜻대로 이루소서.”
눈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지만, 가슴 속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 황태자의 가슴에는 피눈물이 흐른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