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인생은 끝났다 >
* * *
연회에 초청된 각국의 손님과 제국 귀족들은 점심 무렵에 이미 공식적인 행사를 마쳤다고 한다.
그때 인사와 선물 목록을 건네는 일은 모두 끝나고, 남은 것은 먹고 춤을 즐기는 유희뿐인 것 같다.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이야기를 주워들은 결과로 추론한 것이다.
허긴, 비빈들이 모두 불려 나와 있는 시점에서 이미 공식 행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야기 끝에는 이상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좋지 않은, 약간 비정상적인 열기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이야기의 끝에 반드시라고 할 만큼 ‘이번에도 역시 그걸 할까요’ 라든가 ‘매년 가장 기대되는 거죠. 작년이 최고였어요’ 같은 말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평범한 연회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걱정해도 소용없다.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해도 노예인 그가 멈추거나 간섭할 수는 없다. 벌어지면 벌어지는 대로 그냥 따를 뿐이다.
루디는 전투노예한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술잔을 들고 이동하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웃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도 있지만 소수였다.
어디에도 전투노예가 필요한 장면이 숨어있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속삭이던 일은 전투 노예와 관련이 있는 걸까.’
어쩌면 노예로 하여금 싸우게 하고 구경하는 건지도 모른다.
‘피는 나디아 마마한테 좋지 않은데.’
루디가 속으로 한숨을 쉬는데,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멎었다.
갑자기 음악이 바뀌면서, 모두의 시선이 황제에게로 향했다.
루디는 재빨리 자세를 바로 하고 정면을 보았다.
눈만 옆으로 돌려서 바라보자, 황제와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뚱뚱한 몸을 흔들면서 황제가 단상 밑으로 내려갔다. 황후에게 다가가더니 달걀을 쥔 것처럼 가볍게 주먹을 쥐어 내민다.
황후가 그 위에 살며시 손가락을 얹었다.
황제는 미소를 짓더니, 황후의 손가락을 살짝 쥐고 홀 쪽으로 걸어갔다.
황후는 황제보다 두 살이 위라고 하던데 매우 젊어 보였다.
턱은 살짝 이중이지만 그만큼 가슴이 풍만하다. 딱딱한 드레스 위로 불룩 튀어나온 살덩이가 걸을 때마다 출렁출렁 움직였다.
우와, 루디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다.
걸을 때 출렁이는 가슴이라니, 만화에서나 봤지 현실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진기한 것을 보았다.
가슴이 풍만하기 때문인지 그에 대비해 허리는 매우 가늘어 보였다.
코르셋으로 꽉 조였기 때문에 호흡이 어려운 모양이다. 황후가 숨 쉴 때마다 가슴이 크게 위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젊었을 때는 상당한 미인이었겠다.’
지금도 상당히 아름답다.
오십이 넘었다는데 피부는 매끈매끈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하고, 황제와 달리 손가락을 움직이거나 걷는 동작 하나하나가 모두 우아했다.
젊은 여자와 다른 원숙미 같은 게 물씬 풍기는 여성이었다.
하지만 무섭다.
쭉 찢어진 눈으로 나디아 마마를 쳐다볼 때마다 가슴이 섬뜩해진다. 황후의 눈동자에는 수백 개의 독바늘이 달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황제와 황후가 홀로 나가자, 사람들이 가장자리로 몸을 피해 중앙을 비웠다. 그리고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쌍을 이룬 남녀가 나와 황제와 황후의 뒤에 선다.
악사들의 음악이 홀 안을 가득 메우고, 사람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중세의 춤은 왈츠처럼 둘이 서로 마주 보고 빙글빙글 도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추는 춤은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줄을 서서 앞으로 가다 다시 서로를 마주 보고 위치를 바꾼다. 흥겨운 음악에 맞춰 어깨를 비틀어 상대방에게 보이고 몇 번 다른 동작을 한 뒤에는 파트너를 바꾸었다.
중간중간 뛰는 것처럼 보이는 동작도 있다.
마치 아이들이 운동회에서 추는 댄스를 보는 것 같았다.
한동안 춤을 추던 황제와 황후가 빠지고 그 자리를 다른 커플이 메웠다.
단상에 남아 있던 황태자와 황태자비도 춤에 합류했다.
황태자라고 하면 십대 청소년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는 이십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아버지와는 달리 황태자는 몸이 얇은 남자였다. 약간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인상에, 높은 콧대만이 황제와 똑같았다.
한창 춤을 추던 남녀 몇 명이 춤의 고리에서 빠지고, 어디에선가 교태 어린 웃음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황제와 황후 근처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함께였던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 다른 무리에 들어가 따로 떨어지고, 연한 갈색 머리의 비빈 한 명이 황제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사람들의 눈길도 서슴치않고 서로의 입술로 술을 나눠 마시더니, 황제의 팔이 가녀린 비빈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비명 같은 웃음소리가 홀 안으로 울려 퍼진다.
황제의 팔 안에 갇힌 비빈을 부러워하는 여성들의 시선이 화살처럼 꽂히는데도, 그녀는 움찔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겨 있는 비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이래서야 새해를 축하하는 연회라기보다는 요정에서 벌이는 술판 같은 분위기다.
루디는 그쪽에서 시선을 돌렸지만, 다른 곳은 오히려 더했다.
여기저기 길게 드리워진 커튼 너머로 남녀가 어우러져 부둥켜 안고 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유난히 벽과 공간 사이에 커튼이 많다 싶더니, 이런 용도로도 쓰이는 모양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에는 정중하던 사람들의 태도도 조금씩 허물어지고, 남자들의 시선은 점차 음탕하게 바뀌어갔다.
아무래도 새해 연회라는 것은 어린이 입장 금지의 19금 버전인 것 같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대강 짐작이 갈 정도로 홀 안의 분위기는 점점 문란해져갔다.
이미 시간은 깊은 밤인데, 사람들은 지치는 기색이 없다.
몇 시간을 그렇게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꼼짝도 않고 서 있다 보니 몸이 조금씩 휘청휘청 앞뒤로 흔들렸다.
아무도 노예인 그에게 쉬라고 하거나 앉으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루디는 잔뜩 굳어진 다리를 조금씩 움직였다.
‘배도 약간 고프지만 어쩔 수 없지.’
나디아그라는 본래 주변에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지만, 지금은 다른 비빈의 시선에 잔뜩 위축되어 더욱 루디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는 데만도 한껏이었다.
루디는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허리를 약간 구부려 몸을 풀었다. 몸 전체에서 삐그덕 소리가 나는 것 같다.
문득 시선을 앞으로 주자, 나디아그라가 식탁 밑에서 두 손을 꼭 맞잡고 있는 게 보였다.
얼굴은 무표정하지만, 긴장하고 있는지 손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있다. 손가락이 하얗게 되어 있었다.
황후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다.
몰래 주위를 둘러보자 구석에 있는 남자들이 힐끔힐끔 나디아 마마를 보고 있었다.
가끔은 일부러인 듯 혀로 입술을 핥으며 쳐다보는 남자도 있다.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남자인 자신마저 징그럽게 느껴진다. 어쩌면 나디아그라는 이런 시선이 비빈의 질투 못지 않게 싫은 건지도 모르겠다.
‘황제의 비빈에게 무슨···. 아, 어쩌면 그래서인가.’
언젠가 유모가 황제가 신하에게 비빈을 하사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 비마마에게는 그런 일이 벌어지게 하지 않는다며 유모가 씩씩거리고 있었다.
황제가 찾지 않은지 오래된 나디아그라도 신하에게 주어질지 모른다고 기대하는 남자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보니, 유난히 비마마의 안색이 하얗다.
이곳에 올 때는 몰랐어도, 도착하고 난 뒤에는 자신이 신하에게 하사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을 수도 있다.
루디는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괜찮아요, 비마마.”
주문은 곧바로 그녀의 귀에 닿았을 테지만, 나디아그라가 너무 긴장했는지 신경 안정제 효과가 더디다.
루디는 다시 여러 번 주문을 되풀이했다.
나디아그라가 한참 동안 손을 움켜쥐고 있다가 간신히 조금 풀었을 때였다.
춤을 더 추느라 숨이 차오른 황후가 유난히 활발한 목소리로 황제에게 말을 걸었다.
“폐하, 이제 슬슬 시간이 아니온지요.”
“아아, 그렇군.”
황제가 씨익 웃으며 사람들을 둘러보자, 홀 안의 분위기가 단박에 변했다.
조금 느슨하고 음란하던 사람들의 시선에 종류가 다른 흥분의 열이 담겼다.
“이제 새해의 축제를 시작하는가.”
황제가 시선을 홀의 가장자리로 옮겨 고개를 끄덕이자, 곳곳에 부동 자세로 서 있던 시종들이 미끄러지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홀의 한편에 닫혀있던 문이 활짝 열리고, 전투 노예들이 줄줄이 그 안으로 들어간다.
홀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귀족들도 소란스럽게 떠들며 그 방으로 향했다.
이미 그 방이 뭔지 아는 비빈도 있는 것 같다. 몇 사람이 눈을 반짝이며 전투 노예를 가리키고 뭔가를 속삭였다.
단상 쪽에 서 있던 시종들이 비빈과 시녀들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폐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비마마들께서도 모두 이쪽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거절은 안 통할 것 같은 분위기다.
나디아그라는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녀도 거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는 듯 얼굴이 파리하게 변했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휘청휘청 천천히 걷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건너편에 있는 방은 투견장을 연상케 하는 곳이었다.
방의 가운데에는 타원형의 작은 경기장이 설치되어 있다.
아름답게 조각된 금속 막대기가 원의 가장자리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고, 붉은 색의 줄이 막대를 서로 잇고 있었다.
타원형의 경기장 가장자리에는 기사 차림의 남자들이 몇 명 서 있었다.
그들의 손에 들려있는 커다란 칼은 분명 예식용이 아니라 실전에서 사용되는 검이다.
문의 정면에는 조금 높게 설치된 단상이 있고 의자가 두 개 놓여 있었다.
황제와 황후가 그쪽으로 가서 앉자, 다른 사람들이 경기장을 빙 둘러 자리를 잡았다.
“누가 먼저 시작하겠는가.”
황제가 말하자, 두터운 망토를 어깨에 두른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지난 해의 설욕을 하고자 뛰어난 자를 데려왔습니다. 폐하, 저에게 작년의 치욕을 씻을 기회를 주십시오.”
남자가 손을 올리자, 벽 한쪽에 일렬로 서 있던 전투 노예 중에서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키가 2미터에 가까울 정도로 큰 사람이다. 한 쪽 귀가 잘렸는지 없었다. 남자는 그렇게 하라고 미리 말을 듣고 있었는지, 이를 드러내며 흉악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귀부인 속에서 가느다랗게 비명 소리가 올랐다. 정말로 두렵다기 보다는 약간의 기대가 섞인 비명이었다.
황제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거한을 보더니 씨익 웃었다.
“하하. 대사! 그대가 작년에 큰 돈을 잃었다고 아는데, 올해는 그걸 만회할 수 있겠는가?”
“저 남자는 제 나라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검투사지요. 이번에는 승리를 장담하고 있습니다.”
대사가 가슴을 펴고 말하자, 황후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폐하, 저 검투사의 모습을 보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사옵니다.”
“그대는 매번 내게 즐거움을 주는 제안을 해왔지. 이번에는 우리 황후에게 무슨 생각이 있는가 한 번 들어보자.”
황후는 붉은 입술을 반달처럼 끌어올려 미소 지으며 황제에게 고개를 내렸다.
“제가 알기로, 폐하의 노예 중에서 가장 어린 이가 열세 살이었사온데, 올해 더 어린 아이가 은색 목걸이를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황후의 눈동자가 천천히 루디를 향한다.
사람들의 시선도 그걸 따르는 것처럼 루디를 향해 이동했다.
“얼마나 뛰어나길래 은색의 표식을 받았는지, 소첩 매우 궁금히 여겼사온데, 오늘 보니 확실히 그럴만하더이다. 어떻습니까, 폐하. 그 아이로 하여금 저 거인과 겨루게 하심이···.”
황후가 후후 웃으며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좋은 구경거리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는지요.”
황후의 시선이 뱀처럼 루디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저 독사같은 아줌마가 아무래도 나디아그라의 정신을 끝장내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다.
나디아그라의 몸이 고장 난 기관차처럼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히죽 웃었다.
“아아, 그것도 좋은 생각이로군. 나의 황후는 항상 나를 즐겁게 하는구나.”
아아, 내 인생은 끝났다.
< 내 인생은 끝났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