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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37화 (37/201)

< 나는 싫어라… >

* * *

그녀의 고국은 가난한 나라다.

바싹 마른 대지에, 비도 자주 오지 않는다. 땅이 딱딱해서 삽을 밀어 넣어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마석이 많이 매장된 나라지만 돈과 기술이 없어서 채굴할 수가 없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몇 번이나 그렇게 말하며 한숨 쉬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마석 때문에 주변국에서 이런 저런 참견을 걸어오는 일도 많다.

나디아그라가 아는 한, 덴버 왕국은 한 번도 속국의 처지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녀의 고국은 항상 이 나라의 속국이었다 저 나라의 속국이었다 하며 처지가 바뀌었다.

백성도 가난하고, 왕가도 가난했다. 귀족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가 가난했지만, 고국에 있는 동안 나디아그라는 행복하게 살았다.

부모님은 엄격했지만 다정하게 그녀를 대했고, 한 유모에게서 보살핌 받은 언니와 오라버니들은 항상 나디아그라의 편이었다.

다시 돌아갈 수도, 돌아가서도 안 되는 그 시절은 나디아그라의 보물이다.

어릴 때부터 아름답다고 타국에 소문이 난 탓에, 나디아그라는 열다섯 살이 되면 고국을 속박하는 나라의 첩비로 출가하는 것이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푸테그린 제국이 그 나라를 침략해 속국으로 만들면서 덴버도 자연스럽게 제국의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자연히 나디아그라의 시집도 바뀌었다.

머나먼 제국, 그곳까지 가는 여비와 공물을 마련하는 것조차 고국에게는 힘에 겨웠던 것 같다.

아버지는 마석 채굴에 대한 여러 가지의 계약을 제국과 채결하면서 나디아그라 한 명을 보내는 것으로 매년 연회에 참석하고 공물을 보내는 일을 면제 받았다.

잘은 모르지만 그녀의 고국은 다양한 권리를 포기했던 것 같다.

어린 나디아그라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앞으로 그녀를 만나러 올 고국의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고국에서 제국의 후궁에 들어간 그녀에게 주는 후원도 없다.

나디아그라를 위해서는 시집갈 때를 위해 미리 마련해둔 혼수와 어릴 때부터 함께 있었던 유모 한 명만이 주어졌다.

버림받다시피 했다는 사실을, 어린 나디아그라조차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나라를 위해서는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상보다 이른 나이에 나디아그라를 제국으로 보내면서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너 하나로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면 이 아비는 너를 버린다. 왕가의 일원으로 태어났다면 당연한 일이다. 명심하거라, 내 딸아. 나라를 위해, 우리나라의 국민을 위해, 제국의 황제께 사랑 받아야 한다. 너 하나의 몸에 우리나라의 운명이 걸려있다.]

사랑 받아라, 사랑 받아야 한다.

아버지의 말씀이 머릿속에 깊숙이 박혔다.

어머니도 그녀를 앞에 두고 말씀하셨다.

[왕가의 여성으로 태어나 가장 중요한 일은 남편의 핏줄을 이어갈 아들을 낳는 일이다. 그것이 고국의 영화로 이루어진다. 반드시 황자를 낳아야 한다.]

나디아그라는 거구의 몸을 흔들며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는 황제의 모습에 눈이 박힌 듯 시선을 주었다.

사랑하려고 노력해서 사랑했다.

사랑 받으려 노력해서 사랑 받았다.

황자를 낳으려고 노력해서 아들을 낳았다.

한데 무엇이 부족했을까.

어째서 그녀는 지금 이 자리에 서서 사람들의 비웃음을 한 몸에 받는 처지가 되었을까.

왜 황제의 사랑은 이 몸에 머물지 않지?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언니 오빠들을 위해, 그리고 국민을 위해, 나디아그라는 노력했어요. 이제 뭘 더 노력하면 좋을까요, 아버지.’

사람들이 황제를 향해 몸을 굽힌다. 최상급의 절을 하면서 모두 고개를 숙였다.

나디아그라도 천천히 몸을 숙였다.

머리가 지금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무겁다.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보석이 몸 전체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오랫동안 마음에 숨겨두었던 말들이 춤추는 듯이 머릿속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두고 싶다.

노력하고 싶지 않아.

더 이상 힘든 건 싫다.

사랑도, 노력도, 이 나라도 싫어졌다.

이 몸을 파고 드는 남자의 뜨거운 땀방울도, 더러운 숨결도 나는 싫어라···.

약간 둔해진 머리가 느릿하게 생각했다.

‘···그만 두는···건···간단···해.’

살아가는 건 힘들게 노력해야 하지만, 그것을 끊는 것은 매우 쉽다.

아직 황제의 말이 내려오지 않았다.

지금 머리를 들면 분명히 황후의 질책을 받을 것이다.

단 한 번, 그래, 딱 한 번만 실수하면 황후는 웃으면서 그녀의 몸을 질질 끌어내려 반드시 죽여줄 것이다.

나디아그라는 느리게 생각하는 머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어지럽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채 조금 얼굴을 올렸을 때였다.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살짝 건드렸다.

막 올라가려던 머리가 그 자리에서 멈췄다.

나디아그라는 눈동자만 움직여서 손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작은 아이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리코···아니, 루디···였나.’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 아이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환상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기억에 남아있는 건 얼마 되지 않는다.

때때로 엔리코가 함께 있었던 기억도 다소 남아있었다. 그게 이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단순히 그녀 머리가 만들어낸 환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은 이 나라에 온 이후 드물게 기억하는 온화한 시간이었다.

엔리코가 곁에 있을 때조차 나디아그라는 황후의 걱정을 하느라 항상 불안했다. 그러고 보니.

‘리코···리코는 어디에 있지···.’

엔리코가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엔리코가 안전한 곳에서 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엔리코는 지금 따뜻하고 좋은 곳에 있다.

멍하니 아이를 쳐다보자, 작은 입술이 조금 달싹이더니 루디의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괜찮아요, 비마마. 내가 곁에 있으니까요.”

그 순간 뭔가가 발바닥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몸 전체가 따뜻한  공기 속에 들어간 것 같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포근함에 싸여 머릿속이 푹신푹신해졌다.

발바닥에서 전해져오는 온기가 조금씩 뜨거워지고, 어느새 생각이 느려졌다.

[괜찮아. 괜찮아요. 모든 게 다 잘 될 거예요.]

아이의 목소리가 서서히 머릿속을 기어 다녔다.

전에도 여러 번 들었던 것 같다.

그래, 그런 것 같아.

여러 번, 아이가 그렇게 말하며 작은 손으로 그녀의 등을 쓸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왜 잊고 있었을까. 지금까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발바닥이 따뜻하다.

괜찮다는 아이의 목소리가 점점 머릿속 전체를 메워갔다.

이 아이가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견뎌내보자.

어제와 같은 시간이 하루 이틀 늘어난다 해도 괜찮다. 끝내는 건 한순간이니까.

나디아그라는 상승하려던 얼굴과 몸을 그대로 가라앉혔다.

잠시 뒤 고개를 올려도 좋다는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고 사람들이 몸을 올렸다.

나디아그라도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황제가 사람으로 가득 찬 연회장을 휘 한 번 둘러보았다.

나디아그라는 황제가 이쪽을 보기 전, 마음 속으로 항상 되뇌이는 주문을 외웠다.

‘나는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내 몸과 마음을 모두 바쳐,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한다.’

마음속에 조금씩 그런 감정이 차올랐다.

그래, 괜찮아, 나디아그라는 아직 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아무도 그녀가 저 남자와의 행위를 혐오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나디아그라의 얼굴에 꽃이 피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을 때 황제와 시선이 마주쳤다.

‘폐하, 사모하고 있사옵니다.’

언제나 황제에게 하는 사랑의 말을 소리 없이 입술 만으로 말하자, 황제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황제의 입가가 살짝 올라가는 것을 보고 나디아그라도 미소 지었다.

* * *

황제를 만나면 이상해지지 않을까 싶어, 루디는 계속 나디아그라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황제가 나오자마자 나디아 마마의 행동이 주춤하더니 잠시 뒤에는 모든 사람이 몸을 낮춘 상태에서 혼자만 고개를 들려고 했다.

황후의 시선이 계속 나디아그라에게 부어져 있었기 때문에 정말 식겁했다.

다행히 “괜찮아요, 비마마”라는 신경안정제 주문이 평상시처럼 잘 먹혔다.

나디아그라는 잠시 멍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내 진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황후의 눈이 옆으로 길게 찢어지는 것을 몰래 훔쳐 보며, 루디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황후의 눈짓 한 번에 십 년은 목숨이 줄어든 것 같다.

그래서 심적으로는 지금 그의 나이는 마이너스다.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 같지 않달까. 좀비 상태인 느낌이었다.

루디는 나디아 마마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사람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등에 살짝 손을 댔다.

“괜찮아요, 비마마.”

여러 번 주문을 되풀이하자, 나디아그라는 점점 마음이 안정되는 듯 굳어있던 어깨의 힘을 조금 풀었다.

다른 사람이 똑같은 말을 해도 작동하지 않도록, 주문은 루디 자신의 목소리에 한정되어 반응하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처소에서도 여러 번 되풀이해 실험한 거라 효과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황제를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 불안했었다.

만일 이 주문이 효과 없었다면 불새를 이용해 기절 시킬 예정이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루디는 나디아그라의 뒤에 숨듯이 서서 황제와 황후를 훔쳐보았다.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이 세계에서는 새해가 되면 귀족, 평민 할 것 없이 모두 한 살 더 먹는다.

어제 태어났어도 오늘은 2살이 되는 거다.

새해 첫 날 태어난 루디는 태어난 날 한 살이 되고 오늘 드디어 5살이 되었다.

황제는 오늘 51살이 되는 거라고 들었다.

25살이 된 비마마보다 나이가 배나 많다.

하지만 나디아 마마가 그토록 사랑한다길래 상당한 미남일 거라고 생각했다.

젊어서 미남이었던 남자가 나이 들면 더 멋있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런 케이스가 아닐까 싶었던 거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어디를 보고 사랑에 빠진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거구인 황제는 얼굴도, 손도, 키도 컸다. 속까지 파보지는 않았지만 뼈도 굵을 것 같다.

눈썹은 갈매기가 날아가는 것처럼 굵게 위로 치켜 올라갔다가 떨어져 고집이 세 보였고, 콧대는 그림자가 질만큼 높았다.

뺨에서부터 하얀 수염이 풍성하게 나 있고, 전체적으로 뚱뚱하다. 서 있으면 발이 보이지 않을 것처럼 배가 튀어나와 있었다.

몸에 두른 망토에는 두툼한 털이 달려 있어서 몸 전체가 거기에 파묻힌 것처럼 보인다.

수염과 화려한 망토 사이에 목이 없다. 그냥 몸통에 머리가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손가락에는 커다란 반지가 덕지덕지 끼여져 있고, 손목에는 금으로 된 굵은 팔찌가 있다.

목과 머리, 옷에도 온통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이 장식 되어 있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권력 있고 고귀한 혈통이라는데, 모습은 갑자기 돈벼락을 맞은 벼락부자 수준이다.

전체적으로, 그래, 비유하자면 황제는 악마에 혼을 팔아 치운, 천박한 산타클로스처럼 보였다.

심지어 입가가 비틀릴 때마다 야비해 보이기까지 하다.

저런 남자의 어디를 보면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걸까.

사람마다 취향은 가지각색이라고 하지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종이 나디아그라를 안내해 다시 안쪽으로 들어갔다.

비빈들이 앉아 있는 곳은 황제 황후가 있는  좌석의 좌우다. 나디아그라는 가장 말석에 안내 되어 자리에 앉았다.

루디는 그 의자에서 약간 비껴난 뒤쪽에 섰다.

황제의 시동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별도의 지시가 내려오지 않았다. 자신이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약간 불안해졌다.

키가 작아서 식탁 바로 위에 눈이 위치했다. 조금만 고개를 낮추면 시선이 식탁에 가려 볼 수 없다.

루디는 살짝 발뒤꿈치를 올려 사방을 둘러보았다.

홀 안에는 신분 높은 사람들과 시중드는 하인들만 있었다.

하지만 방의 벽쪽에는 다소 다른 사람들이 부동 자세로 서 있었다.

목에 목걸이를 하고 있는 걸 보면 노예들이다.

모두 건장한 남자들이었다.

이 추운 날에도 상체를 거의 벗고 있다시피 한 노예가 많다.

두꺼워 보이는 근육에는 자잘하거나 큰 상흔이 남아 있었다.

‘전투 노예인가?’

어째서 연회장에 전투 노예가 있는 걸까.

점점 더 불안해졌다.

< 나는 싫어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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