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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36화 (36/201)

< 연회가 시작되었다 >

* * *

해가 높을 때부터 준비를 시작했는데 어느새 밖이 캄캄해졌다. 여자들의 치장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루디는 쪼그리고 앉아 멍하니 비마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만 옷을 입으면 이제 출발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비마마는 어디 하나 고칠 데가 없는 것 같은데도 여전히 마무리가 한창이다.

옷을 입고 화장을 모두 한 뒤에도 뭐 그리 세세하게 해야 할 것들이 많은지, 유모와 마리는 치마의 밑단을 확인하고 허리의 장식을 옮겨 다시 달면서 여전히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마마가 음식을 잘 먹지 않는 건 알고 있지만, 오늘은 물이나 음료수도 거의 입에 대지 않은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얼굴도 유난히 창백한 것처럼 보였다.

루디는 자신의 무릎에 앉아 넋을 잃고 어머니를 쳐다보는 공주를 살짝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쁘게 돌아다니는 유모의 곁으로 다가가 살짝 묻는다.

“유모님! 나디아 마마는 괜찮으세요? 오늘은 물도 거의 안 드신 거 가튼데.”

유모가 보석이 달린 꽃 장식을 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힘드시긴 하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단다. 오늘 같은 날 물을 많이 먹으면 화장실에 가야 하지 않니. 우리 마마께는 시녀가 없으니 그런 일도 가급적 적은 게 좋아.”

길게 한숨을 쉬면서 꽃장식을 치마에 꿰매며 유모가 중얼거렸다.

“게다가 화장실에 가셨다 다른 비빈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난리니까 말이다. 전에는 물을 뒤집어썼어요.”

“···.”

“나쁜 것들이지. 황제 폐하의 사랑을 받는다고 질투하는 게야. 한 번은 치마 밑단을 밟아서 넘어지신 적도 있단다.”

“그래서 지금 치마를 손보는 건가요?”

“그렇지. 이 길이라는 게 참으로 묘한 거라서 모래 한 올 만큼만 길어도 다른 사람한테 쉽게 밟혀요.”

그렇게 말하면서 마지막 장식을 다시 달고, 유모가 흡족한 듯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제야 진짜로 다 끝난 모양이다.

유모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내를 위해 기다리던 시종이 저택의 문을 열었다.

인형처럼 가만히 있던 비마마가 몸을 움직인다.

루디는 그녀의 조금 뒤에서 따라 걸었다.

문으로 향하는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리리샤 공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그를 불렀다.

“루!”

걷게 된 뒤로, 리리샤 공주는 웬만큼 마음이 급하지 않으면 기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이 급했던지, 거미처럼 손발을 움직이며 빠르게 기기 시작했다.

유모가 깜짝 놀라 뒤쫓아왔다.

“공주님! 리리샤 공주님!”

하지만 유모보다 공주가 더 빠르다.

리리샤 공주는 순식간에 기어와 루디의 등에 머리를 박았다.

“루! 루!”

어디론가 멀리 가버린다고 생각했던 걸까.

리리샤 공주가 입을 삐죽거리기 시작했다. 입술이 일그러지면서 눈물과 콧물이 금세 얼굴 전체로 번진다.

“공주님! 잠깐 다녀오는 거예요. 금방 오니까 유모님하고 잠시 있어주세요."

공주와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던 건 오산이었던 모양이다.

공주는 금방 돌아온다던가 이렇게 잡으면 옷이 구겨져서 안 된다던가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리리샤 공주가 작은 손으로 루디의 옷을 꽉 움켜쥐고 드디어 악을 쓰며 울기 했다.

“···으에엥···루···아앙···으아아앙···.”

손을 펴보려고 했지만 절대로 놓지 않는다. 작은 아기인데도 힘이 장사였다. 차력쇼를 해도 잘 할 것 같아.

나디아 마마의 치장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 최소한 황제가 회장에 들어서기 전에는 도착해야 하는데, 이러다 늦을 것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아이고, 공주님! 안 돼요. 모처럼 예쁘게 차려 입었는데 루디 옷이!”

유모가 달라붙어 공주를 붙잡고, 루디가 작은 손가락을 하나씩 풀어서 간신히 떨어진다.

그 동안 공주는 이 세상이 멸망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악을 쓰며 울었다.

아, 마음 아파라.

금방 다시 돌아온다는 걸 공주에게 이해시키고 싶다. 그러니까 안심하라고, 없어지는 게 아니라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디아그라가 문득 중얼거렸다.

“리코···.”

루디는 섬뜩한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아니 아니, 지금 여기에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 다른 때는 몰라도 지금은 곤란해. 정말 곤란하다. 오늘 만은 정말 안 된다.

하지만 나디아 마마는 리리샤 공주가 우는 모습에서 뭔가를 연상한 것 같다. 어쩌면 엔리코 왕자도 저렇게 운 적이 있는지 모른다.

나디아 마마가 멍하니 루디를 보다가 다시 한 번 작은 입술을 달싹였다.

“리코. 이리로.”

비마마가 루디를 향해 손을 내민다. 천천히 고개를 갸웃하더니 꽃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악을 쓰며 우는 리리샤 공주의 모습은 나디아그라에게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리코, 폐하께서 부르셨다. 아버지를 보러 가야지.”

“···.”

이대로 괜찮은 걸까.

천정 가까이에는 불새가 모습을 숨기고 루디와 비마마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불새는 오늘 루디가 연회에 참가하는 내내 그의 곁을 지킬 예정이었다.

그가 함께라고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

루디는 공주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뒤 나디아 마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밖으로 나가자 작은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종이 재빨리 마차 문 앞에 발판을 내려놓고, 비마마가 올라갈 수 있게 돕는다.

마차에 오른 비마마가 루디를 곁에 앉히고 기대는 것처럼 몸을 기울였다.

“비마마, 제 이름은 루디에요. 잊지 마세요.”

“···.”

나디아 마마가 가만히 있다가 느릿하게 그의 말을 따라했다.

“루디.”

“그래요, 루디. 잊어버리시면 안 돼요.”

정신이 약간 몽롱한지, 나디아그라가 눈을 느슨하게 떴다. 루디, 루디, 그렇게 중얼거리다 허공을 바라보며 물었다.

“루디···. 리코는 어디에?”

“좋은 곳에 계세요. 아주 아름답고 따뜻한 곳이요. 이곳보다 훨씬 따뜻하고 좋은 곳에. 그러니까 리코님을 부르시면 안 돼요. 그러면 추운 곳으로 끌려오게 되니까 불쌍하자나요.”

“···그렇지.”

나디아그라의 눈동자에 옅은 습기가 어렸다.

“여기는 불쌍해. 불행해진다.”

“···.”

어쩌면 그녀도 이곳에서 불행한 걸까.

아니, 분명히 그렇겠구나.

그녀의 곁에는 사랑하는 남편도, 아들도 없다. 이곳에 머무는 것은 늙은 유모와 자신이 낳은 줄도 모르는 어린 딸 뿐, 그녀가 바라는 행복의 길은 이곳에 없다.

위로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누르면서, 루디는 다시 한 번 속삭였다.

“그래요. 여기에 리코님이 오면 불행해져요. 그러니까 리코님을 불러서는 안 돼요.”

“···그래.”

“···.”

그 말을 끝으로 나디아그라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동안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하던 나디아그라의 눈동자에 눈꺼풀이 덮였다.

도도도도, 마차의 바퀴 소리가 어두운 밤공기를 흔든다. 아무것도 없는 암흑 속에 바퀴 소리만이 외롭게 남았다 사라져갔다.

* * *

잘 다듬어진 잔디 옆에는 널찍한 길이 나 있었다. 그 길을 따라, 마차는 후궁을 나온 뒤에도 상당한 거리를 달렸다.

커다란 건물이 여러 개 모여 있는 곳을 지나고 다시 한참을 달린다. 양 옆으로 높고 큰 건물이 있는 거리에 도착한 뒤에야 겨우 마차의 속도가 줄어 들었다.

마부가 마차를 서서히 몰아 건물과 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마차는 아파트처럼 옆으로 길게 늘어진 커다란 건물을 끼고 천천히 움직였다.

루디가 타고 있는 마차 외에도 여러 대의 마차가 앞과 뒤에서 움직였다.

어떤 마차는 조금 떨어진 뒤쪽 입구에 서고, 어떤 마차는 조금 앞에 섰다. 아마 신분에 따라서 내리는 곳이 다른 모양이다.

나디아 마마의 마차는 중앙에 있는 문 근처에서 멈췄다.

시종이 재빨리 내려 문을 열고 나디아 마마가 내리는 걸 돕는다.

나디아그라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몽롱한 분위기였지만, 연회장의 건물이 볼 무렵부터는 어느 정도 또렷한 눈을 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강제로 차가운 물을 뒤집어 씌운 것 같다. 어딘지 모르게 겁먹은 듯 보였다.

‘괜찮은 걸까.’

루디는 약간 걱정스러웠지만, 사람들의 이목이 있는 곳에서는 말을 걸기도 어렵다.

루디는 조용히 나디아그라의 뒤를 따랐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세계가 완전히 바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루디는 높은 천정과 벽을 두리번거리며 보았다.

지금까지 그는 연회장이 베르사이유 궁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화려한 장식과 번쩍번쩍 빛나는 높은 천정, 길게 늘어진 샹들리에, 그런 것들로 가득할 거라 여겼는데, 예상과는 많이 다르다.

연회장 건물이 크고 화려한 것은 맞았지만, 분위기는 조금 어둡고 묵직했다.

마리 앙뜨와네뜨가 살았던 베르사이유보다는 헨리8세와 앤 불린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에 나온 건물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오랜 세월이 묻은 듯 보이는 투박한 건물의 벽이 곳곳에 드러나 있고, 그걸 감추려는 것처럼 두꺼운 천으로 만든 벽화가 여러 군데에 걸려 있었다.

천정에서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여러 개 내려오고, 벽의 여기저기에는 전등 마도구가 예쁜 등 속에 놓인 채 사방을 밝혔다.

어딘지 모르게 동양의 영향을 받은 듯 보이는 장식이 많다.

호박 바지에 흰 셔츠와 겉옷을 입은 시종들이 음식 담은 은쟁반을 들고 다니고, 신분 높은 남자들의 어깨에는 안쪽에 자수를 넣은 두꺼운 벨벳 망토가 걸려 있었다.

여자들은 가슴의 반을 드러내고 화려한 보석으로 온몸을 치장했다. 머리에 딱딱한 모자를 쓴 여자도 있지만, 아무것도 없는 여자도 있었다.

그들이 몸에 걸치고 있는 걸 일부만 팔아도  성을 하나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화려해 보였다.

남자도, 여자도 모두 공작새처럼 반짝거린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나디아그라 마마의 미모는 독보적일 만큼 뛰어났다.

보석을 달지 않았다 해도 아마 그녀의 아름다움을 이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게 루디만의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시종을 따라 나디아그라가 연회장 안에 발을 디디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를 향했다.

루디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지구와 달리 이 세계의 사람들은 매우 직접적인 것 같다.

나디아그라 마마를 향한 남자들의 시선에서 숨길 수 없는 욕정이 넘쳐 났다. 그리고 여자들의 눈동자에서는 바늘처럼 날카로운 질투가···.

나디아그라의 등장으로 잠시 멈칫했던 분위기가 조금씩 다시 시끄러워졌다.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디아그라 비가 왔어요.”

“어머, 제정신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멀쩡해졌을까.”

“한데 저 옆에 있는 아이는···.”

“엔리코 황자?”

“설마, 그 황자는 죽었다고 들었는데.”

“시신이 처참했다지요?”

“많이 닮았는데, 설마 두 번째 황자를 낳았을까?”

“황제의 사랑을 잃었다고 하더니 소문과는 다른지도.”

누군가가 키득거리고 웃더니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말했다.

“그것은 아니겠지요. 얼마 전까지 그녀의 처소에는 하루 한 끼 스프와 빵만 들어갔다고 들었어요.”

“확실히···이전보다 많이 말랐네.”

“황제의 비가 배고픔을 견뎌내는 치욕을 겪다니, 본국에서 지원도 하지 못할 만큼 가난한 걸까요.”

“어머, 불쌍해라.”

사람들의 속삭임 속에서 나디아그라가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갔다.

나디아그라는 항상 저런 수군거림과 악의에 노출되어 있었던 걸까. 아군 한 명 없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부터 저런 비아냥 소리를 들어왔다면···.

문득 나디아그라의 손이 루디의 눈에 들어왔다. 나디아그라의 손가락 끝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은 마법의 효과가 있어서 저들의 속삭임이 평상시보다 훨씬 적게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도 이토록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면 어릴 때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괴로웠을 것이다.

스위치가 바뀐 것처럼 연회장을 보자마자 그녀의 눈이 또렷해진 것은 오랫동안 그녀가 혼자서 싸워온 결과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강제로 마음에 갑옷을 두르며 나름대로 싸워왔던 흔적일 거다.

루디는 사람들의 시선을 살피며 살짝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디아그라가 똑바로 앞을 바라본 채 살며시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잠시 뒤 나디아그라는 루디의 손을 놓았다.

그 행동이 마치 이제 괜찮아,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을 헤치고 안쪽으로 들어가서 걸음을 멈췄을 때, 연회장 안으로 시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와 황후가 납신다는 말이었다.

< 연회가 시작되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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