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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35화 (35/201)

< 신데렐라 >

* * *

마잉크를 사용해서 정신을 조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거기까지 만능은 아니었다.

다만 [신경 안정제]라는 단어로 마법주문을 사용했을 때 어느 정도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신기하게 불안한 마음이 싹 가시는 거다.

어떤 원리로 그렇게 되는지 정확하게는 모른다. 우리 몸의 신경 세포가 전기 신호를 이용하는 것과 관계있는 것 같다.

마법 주문의 기능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할 수 있다면 뛰어난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건 나중에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다.’

사방은 조용하다.

리리샤 공주는 아직 엄지손가락 문 채 꿈속이고, 유모도 아래로 내려오려면 한참 멀었다.

“···.”

루디는 비마마가 잠들어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살짝 이불을 걷었지만 비마마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유모가 먹이는 약이 상당히 강한 것 같다.

아무도 보는 사람은 없지만, 약간 가슴이 떨렸다.

한밤중 마음대로 비빈의 맨살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누군가가 본다면, 아무리 어린아이라 해도 곱게 끝나지는 않을 거다.

루디는 주문을 적을 때 마잉크가 묻지 않도록 이불을 완전히 젖히고, 나디아 마마의 몸을 두손으로 밀었다.

똑바로 누워있던 나디아그라의 몸이 힘없이 출렁거렸다.

“···으응···.”

반쯤 옆으로 몸이 돌아간 나디아 마마가 문득 작은 소리를 냈다.

“···.”

심장이 벌렁벌렁, 팝콘 튀듯 뛴다.

잠시 동안 쥐 죽은 듯이 숨죽이고 있자, 나디아그라는 다시 잠에 빠진 듯 조용해졌다.

하아, 정말로 이번 일은 심장에 나쁘다.

루디는 나디아 마마를 힘껏 밀어 완전히 엎드리게 만들었다. 춥지 않도록 다시 이불을 덮어준 뒤 발치로 기어갔다.

[은폐] 주문을 사용해도 글자가 있는 부분은 희미하게 빛이 난다.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세심한 사람이면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른다.

아무데나 마법식을 적을 수는 없었다.

하물며 나디아그라는 황제의 비빈이다. 혹시 동침하는 날 시녀들이 몸을 확인하기라도 하면 단박에 들키고 만다.

머리카락 속에 감출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머리의 피부에는 글자를 쓸 수 없고, 뒷목은 너무 눈에 띄었다.

루디 자신처럼 허벅지 안쪽에 쓰는 건 그야말로 자살행위다. 황제와 동침하게 되면 가장 먼저 들킬 것이다.

결국 루디가 생각한 가운데서 가장 안전한 곳은 발바닥이었다.

“우와.”

나디아그라의 발바닥을 보고 루디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히 다 자란 성인일 텐데, 발바닥이 아기의 것처럼 말랑말랑 하얗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굳은살 하나 없이 이렇게 예쁘게 될까.

‘황제의 비빈은 모두 이렇게 말랑말랑 아기처럼 예쁜가?’

아주 조금 황제가 부러워졌다.

불새가 침대 끝에 서서 은은하게 빛을 비춘다. 그 빛에 의지해, 루디는 잉크를 손가락에 찍어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간지러웠는지 비마마가 몸을 뒤척이는 바람에 다시 한 번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모두 끝난 뒤, 루디는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조금 불안한 점은 마력이 다할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가 하는 것이다. 당연히 [절전] 기능도 넣었지만 역시 불안하다.

불새와 같은 마생물은 직접 몸에 닿기만 하면 마력을 줄 수 있지만, 마법식은 그 글자에 손이든 발이든 루디의 몸이 직접 닿아야 한다.

하지만 연회 도중에 루디가 비마마의 발바닥에 접근할 방법은 없다.

‘오늘부터 며칠 정도 가는지 보면 알 수 있겠지. 아무리 못해도 하루 이상은 가야 할텐데.’

만일 중간에 마력이 다해서 정신이 불안정해지면?

당연히 아수라장이다.

새해 연회에는 제국의 귀족 뿐 아니라 속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도 온다고 들었다.

거기에서 황제의 비빈이 정신 나간 꼴을 보여 봐라. 황제의 위신을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뎅강 목이 날아갈 것이다.

‘부디 아무 일 없기를···.’

하지만 왜 이리 불안할까.

황제가 자신을 불렀다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 * *

노예상의 접견은 호위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이번 호위도 지난번 부라도프가 올 때 동행했던 사람이었다.

명목상은 나디아그라의 노예 구입이지만, 비마마가 직접 노예상과 만나는 것은 아니다.

나디아그라는 최근 [신경 안정제] 마법 덕분인지 많이 안정되어 있지만, 대신 잠이 많아졌다. 깨어 있을 때도 어딘지 모르게 약간 멍하다.

테스트를 위해서 상시발동으로 해놓았는데, 정신에 무리가 가거나 뭔가 부작용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현재도 나디아 마마는 침대 옆 의자에 앉은 채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깨어있다고 해도 그녀가 노예상을 만날 일은 없었겠지만.

유모와 루디가 힘을 합쳐 그쪽에 파티션을 옮겨 놓아, 이쪽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접견에 빼꼼이 얼굴을 내민 건 리리샤 공주였다.

노예상을 만나기 위해 입구 쪽 접대 공간으로 향하는 루디의 뒤를 노란 병아리처럼 졸졸 따라온다.

“···루···루···!”

루디라는 발음이 어려운지 ‘우이’라고 그를 부르던 공주는 요즘 들어 아예 ‘루’라고 호칭을 바꿨다.

루디는 공주가 가까이 올 때까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뒤뚱뒤뚱하면서도 리리샤 공주는 꽤나 빠르다.

조금만 속도가 느려지면 고꾸라질 것처럼 다다다다 달려오더니 루디의 배에 머리를 박았다.

“공주님 아파요.”

루디의 말에 공주가 까르르 웃었다.

어머니가 곁에 없으면 리리샤 공주는 곧잘 웃는다.

아프다고 하니 오히려 더 머리를 밀어 문지르는 공주의 손을 잡고, 루디는 노예상의 앞으로 걸어갔다.

노예상에서 구매 상담을 하러 온 사람은 부라도프에게 그를 넘긴 콧수염이 아니라, 디코콰리아의 경매장에서 루디를 산 뚱뚱한 남자였다.

노예상의 주인이다.

여전히 뚱뚱한 몸에 더욱 뚱뚱해 보이는 호박 바지를 입고 있었다.

여기에 온 뒤 알게 된 건데, 디코콰리아에서는 타이즈처럼 생긴 바지를 많이 입는 반면 제국은 호박 바지가 유행인 것 같다.

너도 나도, 부라도프도 호위도, 남자들은 모두 호박 바지였다.

물론 루디도 마찬가지다.

어른이 입는 것과 똑같은 형태의 작고 초라한 호박 바지가 그의 복장이었다.

노예상 주인은 자신의 이름을 파벨이라고 밝혔다. 상대가 노예 아이인데도 정중하게 인사하며 얼굴 가득 미소를 띠었다.

“이런 세상에! 그대는 몰라보게 아름다워졌군요. 역시 내 눈은 틀림이 없어요.”

“칭찬 감사합니다.”

“다시 들어봐도 정말 완벽하고 아름다운 제국어군요. 완벽한 발음입니다.”

“···.”

상당히 호들갑스러운 남자다.

이전에 보았을 때와 인상이 약간 다르게 느껴지는 건 노예가 아니라 고객으로 만나고 있기 때문이려나.

“노예를 원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오늘의 상담은 그대가?”

파벨이 힐끔 안쪽을 보면서 말했다.

유모가 비마마를 위해 얇은 모포를 안쪽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루디는 자신의 손을 잡아당기며 주의를 끌려는 공주에게 살짝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건에 대해서는 비마마에게 위임을 받고 있어여.”

루디가 노예상에게 고개를 돌리자, 리리샤 공주가 루, 루, 하고 부르며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루디가 노예상과 말하는 게 싫은 모양이다. 자신과 놀아줬으면 하는 것 같았다.

“호오···.”

파벨이 그 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완벽하게 제공하는 것이 저희 집의 자랑이지요. 그대가 원하는 게 무엇이든 뜻하는 대로 구해드리리다.”

귀부인의 드레스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있으면서 바느질 솜씨도 뛰어난 노예를 원한다고 말하자, 파벨은 어떤 작업에 필요한 사람인지를 물었다.

“똑같이 드레스를 바느질하는 여자라 해도 수선에 뛰어난 사람이 있고 새 드레스를 만드는 데 유능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속도가 특기인 사람, 디테일 장식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모두 다르지요. 요즈음은 꼬뜨(소매 좁은 드레스)만 전문으로 다루는 장인도 있고, 장식은 장식대로 모두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파벨은 뚱뚱한 배 윗부분에 손을 대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귀하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닐 테지요. 어떤 작업을 원하는지에 따라 제가 제공할 수 있는 노예에 차이가 있습니다.”

단순히, 여기저기 드레스에서 보석과 장식을 떼어내 하나에 붙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예상한 것보다 힘든 일인 모양이다.

대강 모양만 갖춘 뒤에 마잉크로 특수효과를 붙이려고 했기 때문에 생각이 어설펐다.

루디가 대강의 작업에 대해 설명하자, 파벨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드레스 수선에 천재적인 솜씨를 보이는 여자가 있다고 한다.

“그녀를 찾아낸 것은 저로서도 굉장히 우연이었습니다만, 거의 모든 장식에 능숙하니 딱 맞는 제품이라고 생각됩니다.”

대신 금액이 높았다.

파벨이 원한 가격은 금화 10장. 웬만한 고급 노예 가격이다.

보통이라면 이런 가격까지는 올라가지 않을 텐데, 이쪽 사정이 급한 걸 알고 몇 배의 가격을 불렀다.

대신이랄까, 파벨은 그 노예의 지시대로 바느질할 수 있는 노예를 두 명 빌려주기로 했다.

단기 대여다.

물론 빌리는 동안의 값은 철저하게 계산해서 받아갔다.

노예상이 손해를 보는 날은 아마 이 세계가 멸망하는 최후의 순간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철저하게 돈을 받고 팔아넘기려나.

하지만 루디가 정말 사려고 했던 것은 노예가 아니다.

마석이 포함되어 있는 노예 목걸이였다.

노예상에서 판매하는 목걸이 중에서 가장 저렴한 건 금화 1장 부터였다. 가장 싼 제품에 사용되는 마석은 온전한 하나가 아니라 쓰레기 마석을 모아 뭉친 거라고 한다.

루디는 설명을 들은 뒤, 그 제품을 열 개 주문했다.

“그런 싸구려 마목걸이보다는 조금 더 비싼 제품이 좋습니다.”

파벨은 몇 번이나 다른 고급 제품을 사도록 권했지만, 루디는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남들에게는 쓰레기처럼 가치 없는 거지만, 루디의 입장에서 볼 때는 가장 뛰어난 제품이다. 한 마석에 여러 가지의 기능이 담겨있는 거니까.

펄처럼 고운 입자의 마석으로도 불새처럼 뛰어난 마생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 입자가 크게 뭉친 마석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돈이 허락하는 한도까지 최대한 구입하고 싶지만, 의심을 살 우려가 있어 그렇게는 하지 못했다.

파벨은 안타까워했지만 손님이 그렇게 하겠다는 데야 어쩌겠는가.

그가 돌아가고 다음 날, 약속했던 세 명의 노예가 비마마의 처소로 왔다.

마리라는 이름의 수수한 30대 여자와 일시적으로 대여한 노예 두 명이다.

특이한 것은 대여로 온 여자 두 명이 매우 아름다웠던 점이었다. 아마 누군가의 눈에 띄면 좋은 값에 팔 수 있겠다 싶어서 일부러 외모가 뛰어난 여성을 골라 보낸 게 아닐까 싶다.

‘정말 넘어져도 그냥은 안 넘어질 사람이군.’

루디는 씁쓸히 웃었지만 세 명 모두 성실하게 일을 잘했다.

세 명은 빨래와 청소, 음식 등의 일을  조금씩 도우면서 하루 종일 이층에 머물며 바느질을 했다.

비마마의 드레스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노예들에게 맡기고, 루디는 다시 평상시의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가축에게 먹이를 주고, 이제 조금 익숙해진 염소 젖 짜는 일을 한다.

젖을 짜면 그 뒤에는 살짝 끓였다.

우유를 리리샤 공주에게 먹이고 자신도 약간 마신다.

비마마는 우유를 싫어해서 냄새도 맡지 않으려 했지만 스프에 조금씩 타서 끓이면 곧잘 먹었다.

가끔은 노예로 온 마리에게 도움을 받아 가축우리의 지붕에 짚을 얹거나, 헛간 벽에 망치질을 했다.

밤에는 항상 마도구를 연구한다.

새로 구입한 마목걸이에 여러 가지 주문을 넣고 다시 뺀다.

기존의 마도구와 달리 마목걸이는 물, 불, 전기 등 거의 모든 걸 하나로 해낼 수 있었다.

어느새 첫눈이 내리고 낮에도 여러 겹 껴입지 않으면 추울 정도로 겨울이 깊어져갔다.

12월 중순이 되면서 드레스 작업은 얼추 마무리가 되고 대여했던 노예는 본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루디는 마리의 목걸이에 적혀 있던 [전기 충격기]라는 단어 대신 [거짓말 탐지기]로 중심 주문을 바꾸었다.

참과 거짓을 구별해내는 거짓말 탐지기의 작동 원리를 이용해서 주인을 해치려는 마음을 가지면 고통을 주게끔 주문을 설계했다.

그제서야 비밀 유지 문제 때문에 사용하지 못하던 마목걸이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깊어진 겨울, 마도구 한 개로는 추위를 막을 수 없었던 저택 안에 따뜻한 온기가 돌았다.

밤마다 불새에게 안기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하던 리리샤 공주도 이제는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배를 드러내 놓는다.

그리고 온 세상이 새하얗게 변한 겨울의 어느 날, 드디어 연회가 열린다는 통지가 비마마에게 도착했다.

그날은 아침 일찍부터 유모와 노예 마리가 부산하게 움직였다.

며칠 전부터 따뜻한 물로 전신을 헹구고 향유로 긴 머리와 피부를 손질하던 나디아 마마는 허리를 옥죄는 고래뼈 코르셋에 몸을 넣고 머리는 솜사탕처럼 부풀렸다.

소매와 치마, 조끼처럼 생긴 갑옷 드레스가 차례차례 입혀지면서 보이지 않는 곳이 끈으로 묶였다.

옷을 다 입고 나면 그 뒤에는 화장이다.

유모가 깃털처럼 생긴 것으로 분을 묻혀 톡톡 건드리며 비마마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하얀 백분이 얼굴과 목, 가슴에 뽀얗게 내려앉는다.

미리 [해독]주문을 넣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백분 때문에 중금속으로 백 번은 죽었을 거다. 중세 여성들 중에 그런 경우가 많았다고 본 적이 있다.

유모와 마리의 손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입술에 붉은 색을 입히고 뺨에도 문지른다.

목과 귀에는 굵은 보석이 늘어졌다.

멀찌감치 숨듯이 서서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리리샤 공주가 입을 헤 벌리고 있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힌데엘라···.”

어머니의 모습이 동화 속의 신데렐라 같았던 모양이다.

그 말이 의외로 핵심을 찌른다고 생각하면서, 루디는 쓰게 웃었다.

12시가 되면 돌아가야 하는 신데렐라처럼, 비마마도 마법 주문이 끊기기 전에 연회장을 나서야 한다.

루디는 자신의 옷을 입으러 구석으로 향했다.

< 신데렐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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