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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32화 (32/201)

< 연회 준비는 보안에서부터... >

* * *

마음이 아무리 급해도 시간은 제 속도대로 지나간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손발은 두 개씩 밖에 없는데 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았다.

우선은 절실하게 세탁기와 청소기가 필요하다. 그 두 가지만 있어도 일상의 상당 부분이 해결될 것이다.

청소는 조금 미뤘다 해도 되지만 세탁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갈아입을 옷이 없으면 벌거벗고 있어야 하는 거다.

네 살 짜리 루디 뿐 아니라, 아기 공주도, 유모나 비마마도 마찬가지였다. 나이가 많다고 어딘가에서 옷이 뚝 떨어지지는 않으니까.

가축과 뒹굴기 시작한 공주 때문에라도 세탁기가 더욱 절실했다.

리리샤 공주의 옷에 닭똥이 묻어 있는 걸 보고 기겁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아기를 꽁꽁 묶어 놓았던 이 시대 어머니들의 심정이 이해되었다고 하면 그 괴로움을 알 수 있으려나.

지금까지는 혹시 마도구를 고장 내면 곤란하다 싶어서 손을 대지 못했지만, 연회 문제까지 덮쳐서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다.

루디는 가장 시급하고 또 나름 안전해 보이는 물 마도구부터 시작했다.

마음으로는 고장 내도 상관없는 노예 목걸이로 테스트 해보고 싶었지만, 이미 발동한 상태의 마도구에는 마잉크를 적을 수 없었다.

불새를 테스트할 때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지만 노예 목걸이로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결국 노예상한테 받은 와토린구 공작가의 노예 목걸이는 부라도프가 꾸려준 작은 짐꾸러미 안에 그대로 남았다.

모처럼 소지할 수 있게 허락되었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훗날 마도구를 수정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낼지 모른다. 버리지 않고 그대로 지니고 있기로 했다.

루디는 한숨을 쉬고 [수도] 마도구를 책상에 올려놓았다.

[수도]라고 적힌 앞부분에 [세탁기]라고 적은 뒤 쉼표로 구분한다.

명령어 부분에는 [세탁기 온] [세탁기 오프]라고 적어 넣었다.

지금까지 테스트 해 본 결과, 한국어가 아닌 이 세계의 언어로 명령하면 마도구에 규정되지 않은 동작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어로 말하는 경우에는 마도구에 적혀있지 않은 명령이라도 상태를 조정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더 강하게, 약하게, 더 많이, 한 방울씩, 최대 출력으로, 그런 식의 말은 명령어로 지정되어 있지 않아도 한국어로 말하기만 하면 제대로 작동된다.

‘한국어 만능이랄까, 이세계인데 어째서 지구를 더 우대하는지 모르겠지만.’

슈퍼맨 같은 건지도 모른다. 자신의 모성에서는 평범한데 다른 행성으로 오면 엄청난 힘을 갖게 되는, 그런 거.

루디는 작은 손으로 깃털펜을 요령껏 움직였다.

처음에는 사용하기 힘들던 깃털펜도 자주 쓰다 보니 제법 손에 익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

마도구가 크지 않기 때문에 공간에 여유가 별로 없다.

나중에 수정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루디는 글자를 매우 작게 했다.

루디는 마잉크로 모두 적어 넣은 뒤 꼼꼼하게 읽어 잘못된 부분이 없는지 확인했다.

빠진 것 없이 잘 적은 것 같다.

루디는 의자에서 톡 뛰어내려 저택 밖으로 나갔다.

빨랫감을 넣어두는 나무통 가장자리에 마도구를 대고 나지막이 주문을 외웠다.

[세탁기 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냉수!]

[온수!]

큰일 났다.

세탁기는 물론 이전에 사용했던 명령어도 먹히지 않는다.

루디의 당황을 느낀 건지, 저택 안에서 공주와 함께 있던 불새가 날아왔다.

그의 어깨에 앉아 진정하라는 듯이 부리로 머리를 살짝 건드린다.

루디는 불새의 얼굴을 보고 아차 싶었다.

제일 앞에 적는 명칭은 그 주문의 성격을 규정하는 말이다.

쉼표로 구분되는 단어는 동격이기는 하지만 그 주문의 근간을 규정하는 건 아니었다. 뒤에 오는 단어들은 보조적인 성격을 띤다.

한데 [봉황]이라는 명칭에 [타조]라고 덧붙이면 어떻게 될까?

봉황과 타조는 같은 새라도 전혀 다른 존재다. 그 주문의 성격은 뒤죽박죽되어 봉황도, 타조도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쉼표가 아니라 세미콜론으로 성격을 규정해보면···.’

루디는 세탁기라고 적은 부분에 줄을 긋고, 뒤쪽에 세미콜론을 사용해 주문을 추가했다.

[ ; 세탁기 ] 라고 적었을 때는 수도로 기능은 했지만 세탁기의 기능은 되지 않았다.

[ ; 세탁기 기능 ]이라고 고치자 겨우 물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좋았어.’

이제 세탁기가 생겼다.

루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물 폭탄 기능]이라는 설명과 함께 [물 폭탄] [물 폭탄 소멸]등의 주문을 몇 가지 추가했다.

루디는 지금까지 마력을 소비하거나 특별히 제한한다는 느낌 없이 마도구를 사용해 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물폭탄이라고 적은 뒤 별 생각 없이 주문을 외웠다.

[물 폭탄!]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뭔가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동그란 물방울 모양의 물이다. 아무것도 없는데 마치 투명한 풍선에 싸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방울의 크기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루디의 손바닥보다 약간 큰 정도일까.

하지만 그런 물방울이 한 개가 아닌 수백 개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에 닿는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폭탄처럼 터졌다.

저걸 맞으면 분명히 즉사한다.

“맙소사. [물폭탄 소멸!]”

깜짝 놀란 루디가 외치자마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떨어지던 물방울이 사라졌다.

불새가 재미있다는 듯 소리 없이 공기를 진동시키며 웃고, 잠시 뒤 안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유모도, 비마마도 모두 깨어났다.

그대로 잠자고 있는 건 리리샤 공주뿐이었다. 매일 낮마다 오리, 염소와 씨름을 하다 보니 피곤했던 모양이다.

유모와 비마마에게는 천둥이 쳤던 것 같다고 속였다.

두 사람은 긴가민가했지만 루디의 말 외에 그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유모는 황궁에 신의 천벌이 내렸다거나, 악마의 저주가 들이닥친 건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이 세계에는 그런 류의 소문이 많은 것 같다.

결국 비마마까지 그 말에 벌벌 떨었기 때문에 아침이 밝을 때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뒤부터 루디는 주문을 만들 때 범위를 설정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다음 날에는 불 마도구에 건조 기능을 넣었다. 세탁을 한 뒤 힘들게 빨래를 짜거나 옮길 필요가 없어졌다.

불 마도구에도 이것저것 기능을 넣었다.

몇 가지는 잘 작동되는 걸 확인했지만 나머지는 실현해보지 못한 채 넘어갔다.

잘못하면 저택이 폭파되거나 전소할 수도 있다 생각하니 도저히 실험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쨌든 불 마도구 역시 무기로 사용할 수 있었다.

특히 화염방사기는 큰 불은 물론이고 매우 작은 불로도 구현이 가능했다.

특히 작은 불은, 루디가 의식하기만 하면 총처럼 빠른 속도로 날릴 수 있었다.

그 불이 목표물을 명중시켜 구멍을 내는 모습은, 마치 불로 만든 총알이 발사된 것처럼 보였다.

루디는 두 마도구의 자동번역 부분을 지우고, 유모가 사용하는 주문을 깨알처럼 적어 넣었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이 세계의 사람들은 정해진 주문을 사용한다.

아마 마도구 성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인 모양이다.

조금만 잘못 말해도 마도구가 발동하지 않으니, 오랫동안 사람들이 가장 적합한 설명을 추출해 그대로 사용하게 된 게 아닌가 싶다.

유모는 이 마도구의 주문이 적힌 종이를 가지고 있어서, 그대로 외운 뒤 사용하고 있었다.

///

다음 날, 부라도프가 요구 목록에 적혀 있던 짚단 매트리스를 가져다주었다.

매트리스까지 혼자 나르라고 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하인들이 운반했다.

그리고 비마마가 쓸 수 있는 돈이 마련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일 때문에 방문을 할 테니 비마마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루디가 여러 번 저택 안과 밖을 왔다 갔다 하면서 말을 전했다.

본래는 나디아 마마가 정해야 하지만, 그녀는 모든 일을 유모가 하는 대로 맡기고 있다.

결국 부라도프와 유모 사이에서 방문 날짜와 시간이 정해졌다.

필요한 게 있다면 방문할 때 요청하면 된다는 말을 끝으로, 부라도프는 저택을 떠났다.

루디는 사용하던 매트리스를 뜯어 짚을 가축의 먹이로 사용하고 싶었지만, 헌 매트리스는 부라도프가 가져갔다.

귀족이나 황족이 사용하던 질 좋은 매트리스는 달리 용도가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약간 수선만 해서 되파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디는 멀어져가는 부라도프의 모습을 보고 히죽 웃었다.

‘돈이 들어온다니 정말 다행이네.’

유모의 말을 들어보니 드레스는 한두 달 이내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디자인은 다른 것과 비슷하게 해서 시간을 줄인다 해도, 만드는 동안 가봉만 수십 번을 해야 한다.

자수나 장식을 다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데다 비빈의 옷이라면 당연히 작업하는 사람의 수준도 높아야 했다.

이래저래 시간 잡아먹는 일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 남은 시간 동안 드레스를 만든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물론 돈도 없고.

그래서 루디는 마잉크를 사용해 눈속임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드레스가 새롭게 보이면 황후의 의심을 산다.

뻔히 사정을 아는데 무슨 수를 썼는가 싶어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갈수도 없는 일이라 고민이었는데 돈이 나온다니 잘됐다.

잘하면 그 돈을 다른 데에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루디는 부라도프가 완전히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자, 몸을 돌렸다.

저택 입구에 뿌리다 말았던 모래를 마저 뿌리고, 곡괭이로 근처의 풀을 살살 긁었다.

곡괭이가 몸에 비해서 크다 보니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안간힘을 쓰다 보니 땀이 뚝뚝 흘렀다.

‘이제 몸에다 마잉크 쓰는 걸 생각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소설이나 만화에 자주 나오는 신체 강화.

그 기능이 매우 시급합니다.

나중을 생각하면 성장 촉진이나 성장 호르몬 같은 명령어도 사용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두뇌 촉진도.

하지만 이 시대의 잉크에는 뭐가 들어있는지 알 수 없다.

중세에는 수은을 약으로 사용했다는 말도 어디에선가 보았고, 도저히 이 시대의 상식을 믿을 수 없었다.

만일 잉크에 중금속 같은 성분이라도 있으면 나중에 어떻게 될지 끔찍해서 몸에 사용하는 일은 아무래도 꺼려졌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미루는 건 무리일지 모른다.

이렇게 몸을 마구 쓰다가는 다 크기 전에 골병이 들어 죽을 것 같다.

루디는 긁어모은 잡풀을 저택 입구에 솔솔 뿌렸다.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다시 모래를 조금 뿌리고 발로 밟으며 돌아다닌다.

루디의 눈앞에서 투명한 홀로그램처럼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보안 카메라 입구 오프]

루디가 작게 중얼거리자 모래를 밟으며 돌아다니던 자신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보안 카메라가 작동을 중지한 것은 아니다.

보안 카메라를 완전히 켜고 끄는 명령은 [보안 카메라 전원 온 /오프]다.

보안 카메라 온/오프 명령은 단지 루디의 눈앞에 보내지는 영상만 켜고 끄게 되어 있었다.

영상은 루디의 눈앞에서만 사라졌을 뿐 여전히 카메라는 작동하고 있다.

히죽 웃음이 나왔다.

이제 루디가 어디에 가 있어도 저택의 안과 밖을 환하게 볼 수 있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영상이 혹시 부라도프에게도 보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당연히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완벽해.’

저택 내부는 물론이요, 외부에서 들어올 수 있는 몇 곳에는 마잉크로 주문을 적어 두었다.

지구의 보안 카메라를 흉내 내고, 거기에 몇 가지 기능을 추가한 것이다.

처음에는 약간의 시행착오도 겪었다.

흙에다 주문을 적으면 누군가가 밟거나 바람에 날려 글자가 흩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그 주문은 무용지물. 작동하지 않았다.

종이나 돌에다 적어서 두면 발동하더라도 그 자리에 고정되지 않는다.

결국 그 자리에 쓰는 수밖에 없었다.

한데 여기에도 문제가···.

주문이 일단 발동하는 경우에 글자가 지워질 염려는 없지만 은은하게 빛이 어린다. 누가 봐도 마법이 발동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은폐를 비롯한 몇 가지 기능을 첨가했는데, 불새만큼 완벽하게 감춰지지는 않았다.

얼핏 보면 모르고 지나치지만 아주 예민한 사람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는 정도려나.

아무래도 카메라 기능이 달려있기 때문인 것 같다.

루디는 그걸 숨기기 위해서 실내에는 작은 카페트나 물건을, 외부에는 모래를 가져다 뿌려두었다.

부라도프는 염소가 풀을 먹은 자리는 알아보면서도, 입구가 이상하다는 점은 눈치 채지 못했다.

이곳에 제일 자주 오는 그가 몰라본다면 괜찮을 것이다.

‘남은 건 첩비 마마의 정신을 어떻게 안정시키는가 하는 문제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

나디아그라가 처벌을 받아 이곳에서 쫓겨나거나 죽으면, 루디 역시 가장 안전한 장소를 빼앗기게 된다.

그것만큼은 피해야 하는데, 마잉크로 정신을 안정시킬 방법이 있는지는 루디에게도 알 길이 없었다.

‘역시 내 몸으로 확인해봐야 할까.’

하아,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 연회 준비는 보안에서부터... > 끝

작가의 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24시를 연재시간으로 정하려고 노력중입니다만, 이제는 그냥 새벽으로 정하는게 낫지 않을까 생각되기 시작했어요. 한번 시간이 이쪽으로 오니까 다시 되돌아가기가 어렵네요.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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