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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29화 (29/201)

< 치트 떴다 >

* * *

아이의 몸은 어른과는 여러모로 다르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것 같은데 어느새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잠들기 전 기억은 책상에서 마잉크를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끝나 있다.

하지만 깨어났을 때 그는 바닥에 동그랗게 몸을 구부린 채로 누워 있었다.

맨바닥인데도 잠을 자면서 추웠던 기억은 없다.

루디는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은은한 달빛 같은 막이 눈앞을 가리고 있었다.

공기가 반짝이는 듯한 느낌이다.

‘뭘까. 굉장히 예쁘다. 왠지 따뜻한 느낌도 들고.’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조금씩 머릿속이 현실에 적응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몸을 감싸는 것처럼 공작새가 날개를 펼치고 앉아 있었다.

밤새도록 그러고 있었던 것 같다.

왠지 그 모습이 공주를 돌보는 자신의 행동처럼 느껴졌다.

“설마, 계속 나를 지켜준 거야? 날개를 덮어줬어?”

“···.”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데 공기가 파르르 흔들렸다.

“고마워.”

루디의 말에, 공작새의 동그란 눈이 가늘어졌다.

원래 새는 저렇게 눈을 뜨는 거였던가?

아닌 것 같다.

‘역시 실제와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닌가 보다.’

상상의 동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용이나 현무 같은 것도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몰라.’

그것들이 무얼 할 수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모습만 똑같을 뿐 가진 힘은 별 것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불이나 전기 성질을 가지고 있는 마석의 힘을 그들에게 부여할 수 있다면, 이 마법식이라는 건 정말로 대단한 것이 아닐까.

왠지 허리 밑에 있는 꼬리뼈 쪽이 오싹해졌다. 그것이 전율인지, 아니면 두려움인지는 알 수 없었다.

“···.”

한글을 마법식으로 구현한 사람은 무엇을 어디까지, 어떻게 사용했던 걸까. 그리고 어떻게 되었을까.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이면이 있다. 빛이 있으면 그 밑에는 그림자가, 성공이 있으면 그 주위에는 수많은 적이 존재할 것이다.

알고 싶다. 그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 사람의 행적을 더듬어보면,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코레아 왕조라고 그랬지.’

그쪽을 더듬어가면 알 수 있으려나.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벽난로 쪽에서 리리샤 공주의 재채기 소리가 들렸다.

“에췽!”

“아!”

루디는 벌떡 일어나 공주에게 달려갔다.

벽난로 앞이라고는 해도 바닥은 차갑다.

이전에는 둘이 부둥켜 안고 잤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혼자서라면 상당히 추웠을 것이다.

루디가 가까이가자 공주가 와락 그에게 달려들었다.

“···후엥···.”

무서운 꿈이라도 꾸었는지, 눈이 반쯤 울고 있었다.

“괜찮아요.”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자, 얼굴을 그의 가슴에 대고 코를 훌쩍였다. 콧물이 옷에 묻는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이게 마지막 옷인데.’

용이나 현무 같은 상상의 동물보다는 세탁기가 더 시급하다.

수도라고 적었을 때 물이 나온다면, 세탁기라고 적으면 물이 회오리쳐서 빨래를 해주지 않을까.

‘마석이 한 개만 더 있으면 좋겠는데.’

아니, 어쩌면 마도구도 수정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문득 그렇게 생각하니, 또 그럴싸한 것 같다. 볼펜으로 쓸 때처럼 쓱쓱 긋고 그 위에 쓰면 기능도 바뀔지 모른다.

‘아니면 추가로 적어 넣던가.’

밤마다 조금씩 테스트를 해보자.

리리샤 공주가 고개를 들자, 콧물이 길게 늘어져 투명한 실을 만들며 옷으로 떨어졌다.

아, 더러워.

진실로 세탁기가 시급합니다.

그날 오후에는 비마마가 모처럼 깨어있었다.

며칠 동안 계속 잠만 자던 비마마의 상태가 조금 안정되어 약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점심 무렵이 되어 비마마가 눈을 떴을 때, 루디는 우연히 근처에 있었다.

리리샤 공주가 잠시 낮잠을 자고 있을 때였다.

그 틈을 타, 루디는 자신의 옷을 물에 담그고 발로 꼭꼭 밟아 빨았다.

젖은 옷을 말리려고 벽난로 근처로 가져가는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비마마가 그를 보았다.

처음 본 날처럼 되는 건가 싶어 몸이 굳었다.

하지만 나디아 마마는 그를 처음 보는 것처럼 반응했다.

“너는 누구?”

커다란 눈이 그를 보고 이상하다는 듯이 깜박였다.

그녀가 공주를 어떻게 대하는지 알기 때문에 그다지 좋은 감정은 없다. 그래도 이것 하나는 인정해야 했다.

그녀는 아름답다.

황후가 비마마를 미워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황제의 사랑이 지금은 멀어졌어도 그녀가 조금만 노력하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지금은 아이의 몸이지만, 이전에는 성인 남자였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아마 제정신인 그녀의 유혹을 거절할 수 있는 남자는 몇 명 되지 않을 거다.

루디는 축축하게 젖은 옷을 두 손으로 잡고 눈을 내렸다.

“앞으로 마마를 모시게 된 루디에여.”

나디아의 시선이 그의 목을 향했다.

시선이 움직이지 않는다.

계속 그의 목에 박혀 있었다.

‘설마 또 정신이 이상해졌나?’

불안한 마음에 살짝 시선을 들자, 나디아그라는 목걸이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폐하의···.”

문득 나디아 마마가 중얼거렸다.

꽃이 피는 것 같은 미소가 얼굴 전체로 번졌다.

“그래, 폐하가 보냈구나.”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몇 번이나 그 말을 되풀이한다.

아주 조금, 마음이 아파졌다.

사랑이 고파서 이리 되었나.

어쩌면 그녀의 나이는 이 나라에 처음 온 12살에 멈춰버렸는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사회를 경험하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버린 그녀의 세계는 어쩌면 왜곡되어 있는 게 아닐까.

나디아 마마는 황제와 자신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황량한 사막에 혼자 버려져 있는 건지도 모른다.

12살 이 후궁에 들어온 그날부터, 아마 계속.

그날부터 한동안 나디아 마마의 상태가 좋았다.

루디는 비마마의 머리를 빗기거나 옷을 입을 때 돕는 일을 했다.

식사 시간에 옆에 앉아 있는 것도 루디의 업무였다.

정신이 온전할 때의 나디아그라는  조용하고 소극적인 편이었다.

새처럼 작은 소리로 말하고 가끔 웃는다. 웃을 때마다 주변에 꽃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솔직히 사랑스러운 여자라고 생각했다.

공주가 벌벌 기어다니면서 가끔 모습을 보였지만,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이상하다는 듯이 공주를 보고 물어보았을 뿐이다.

“저 아이는 누구지?”

비마마는 공주가 누구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루디를 하루종일 옆에 두고 싶어했다.

그리고 종종 말을 걸었다.

폐하께서는 무얼 하고 계시더냐?

폐하는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계시는지.

폐하는 언제쯤 오신다고 하셨느냐.

폐하는···폐하는···.

차마 황제의 얼굴을 모른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루디는 애매하게 웃으며 개성없는 대답을 했다.

폐하는 매일 정무를 보고 계세요.

당연히 마마를 기억하세요. 가끔 마마에 대해 물어보십니다.

지금은 바빠서 못 오지만, 곧 오실 거예요.

폐하는···폐하는···.

버려진 저택에 황제의 발길이 닿을리 없는데,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저녁이 되어 비마마가 잠이 들면, 루디는 공주에게 포박 당하듯 안겼다.

낮 동안의 외로움을 보충하려는 듯, 리리샤 공주는 잠이 들어도 루디를 놓지 않는다.

루디의 옷을 꼭 잡고 잠이 든 채, 조금만 손가락을 풀면 깨어났다.

어쩔 수 없이 루디는 깊이 잠든 리리샤를 안고 마잉크 테스트를 계속했다.

한밤중 모두가 잠이 들면, 그때부터 진짜 루디의 시간이 시작된다.

조용한 건물 안으로 사각사각 펜 소리가 울려 퍼지고, 가끔 리리샤 공주가 이상한 목소리로 잠꼬대를 했다.

나이보다 작다고는 해도 돌쟁이를 안고 글자를 쓰는 건 쉽지 않다.

공주가 완전히 잠에 곯아떨어지면 루디의 어깨에 놓였던 머리는 점점 팔 중앙으로 흘러내린다.

아기 머리는 왜 그리 무거운 건지, 잠시 그렇게 팔로 머리를 지탱하노라면 나중에는 팔이 저절로 후둘거릴만큼 힘들었다.

빛의 공작새는 그의 지시에 따라 낮에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공주를 지켜보며 육아를 도왔다.

때로는 천정에서, 때로는 커튼 뒤에서, 공작새는 빛에 자신의 몸을 교묘하게 숨길 줄 알았다.

공작새의 보조가 없었다면 루디의 하루는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체가 없기 때문에, 공작새는 물리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공주가 이상한 벌레를 집어먹으려 하거나 못을 가지고 놀 때, 거기에 달려가는 건 루디의 몫이었다.

‘힘들기는 하지만 왠지 재밌었어.’

루디는 문득 작게 웃었다.

공주가 처음 벌레를 잡았을 때가 생각났다.

공작새는 그게 나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뭐, 당연한 일이겠지만.

3D 애니메이션을 생각하고 만들어낸 공작새가 모든 걸 안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공작새는 공주가 벌레를 쥐고 벌벌 기어가는 걸 그대로 보고만 있었다.

벌레를 쥔 공주의 목적지가 루디였다는 것이 다행이었으려나.

가까이 기어와서 불쑥 벌레를 내밀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처음에는 그저 공주의 손에서 벌레를 빼앗아 버리는 데에만 급급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것은 선물이었다.

여자한테 받은 선물이 벌레라는 사실에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조금 당황스러웠다.

더 솔직히 말하면 심쿵했다.

‘하지만 이대로 크면 조금 곤란하겠지.’

앞으로 어찌될지는 모르지만 황제의 딸이다. 미래에는 다른 나라나 고위 귀족에게 시집가게 될 것이다.

그런 공주가 아무렇지도 않게 벌레를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다.

벌레를 보고 기절하는 게 아마 이 세계의 올바른 공주님이 아닐까.

그런 공주님으로 길러내야 나중에 소박 맞지 않고 잘 살 수 있을 거다.

어느새 입을 헤 벌리고 있는 공주의 머리를 다시 가슴으로 되돌린 뒤, 루디는 공작새에 시선을 주었다.

공작새는 책상 위에 가만히 서서 물끄러미 공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공주를 지켜보라는 명령을 아직도 수행하고 있는 것 같다.

“고마워. 하지만 이제 됐어.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

“지금부터 주문을 다시 고쳐서 쓸 거야. 만약 새로운 몸이 된 뒤에도 내 일을 기억하고 있으면 고개를 세 번 끄덕여줄래?”

“···.”

공작새가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머리를 작게 세 번 내렸다 올렸다.

“다시 보면 좋겠다. 그때도 나를 기억하고 있으면 이름을 지어줄게.”

“···.”

공작새는 가만히 있었지만, 왠지 조금 기뻐 보였다.

주문이 발동되고 있기 때문에, 양피지의 글자에는 은은하게 빛이 어려 있었다.

루디는 깃털펜에 마잉크를 충분히 묻혔다. 처음 양피지에 썼던 [공작새]라는 단어에 줄을 긋는다.

‘안되는구나.’

마치 매끄러운 유리 위에 글자를 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잉크는 양피지에 닿은 것 같았지만 전혀 글자를 쓰지 못했다.

[공작새 소멸]

루디가 한국어로 말하자, 공작새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졌다. 양피지의 은은한 빛도 동시에 가라앉는다.

루디는 다시 마잉크로 [공작새]의 글자에 줄을 그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줄이 그어졌다.

줄을 그은 글자 위에는 [봉황]이라고 적었다.

나머지 주문에도 차례차례 줄이 그어졌다.

루디는 작은 손에는 너무 큰 깃털펜을 꼭 쥐고 새로운 주문을 그 위에 적어 넣었다.

[봉황 ; 마력인증 ; 인증자만 사용가능 ; 3D 이미지 ; 명령어 “봉황 구현” “봉황 소멸” “봉황 은폐”]

모두 수정한 뒤 다시 마력을 흘린다.

정말로 수정이 가능할까. 공작새는 다시 태어났을 때 그를 기억할까.

조금 두근거렸다.

루디는 심호흡을 하고 주문을 외웠다.

[봉황 구현]

양피지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공작새 때보다 강한 것 같다.

잠시 기다리자, 공작보다 화려하고 약간 큰 새가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루디의 눈이 커졌다.

공작새도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모습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날개의 깃털 하나하나가 모두 오렌지 색의 불씨가 되어 허공으로 뿌려졌다.

봉황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잔상처럼 은은한 불이 그 자리에 남아 공기중으로 흩어진다.

아름답다는 말 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봉황은 아름다운 날개를 접어 몸을 약간 낮추더니, 머리를 세 번 위아래로 정중하게 움직였다.

“나를 기억하는구나.”

“···.”

봉황의 부리가 조금 벌어지고, 소리없이 공기가 진동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뒤, 팅커벨의 요정가루처럼 공기가 반짝거리더니 작은 불씨가 사방에서 화르륵 타올랐다.

소리 대신 공기를 태우다니, 불로 만든 새 같다.

“불새···.”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갑자기 봉황이 웃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황은 가느다란 목을 내밀어 루디의 이마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댔다. 마치 고마워요,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어, 방금 그게 이름이 되어버렸어?”

“···.”

그래, 라고 대답하듯이 봉황이 머리를 약간 들어 부리로 루디의 이마를 콕 쫀다.

실체 없는 공기의 흐름이 부드럽게 루디의 이마를 건드렸다.

“···.”

봉황이 날개를 크게 펼쳤다.

부드러운 불씨가 사방으로 퍼지고 , 봉황은 이내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올려다보자, 화려한 불꽃 같던 새의 몸은 조금씩 흐려져 점점 투명해졌다.

“···은폐. 저건 은폐구나.”

몸을 숨기고 공주를 지켜봐 달라고 했던 명령을 실행하는 것 같다.

스스로 알아서 판단하고 움직이는 새라니···.

루디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뭐든지 할 수 있다.

불가능은 없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손에 넣었다.

< 치트 떴다 > 끝

작가의 말

중간이 조금 이상해져서 약간 수정했습니다.

진행이 느리다고 생각되셔도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최대한 지루한 부분 없으시도록 바삭바삭 넘어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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