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잉크 테스트 >
* * *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배와 다리에 작은 천이 걸려 있었다. 유모가 덮어준 것 같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사방이 조용해서 그런지 소리가 크게 들렸다.
‘하아.’
전생에서는 소설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는 글귀를 보면 그저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방편이라고만 생각했다.
설마 진짜로 배고프면 그런 소리가 난다고는 생각도 못했어. 현대 지구에서는 웬만해서는 배고플 일이 없으니까.
배가 고프더라도, 꼬르륵 소리가 날 때까지 배가 빌만한 상황이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배가 완전히 비면, 하루 내내, 그리고 다음 날까지 먹은 게 별로 없으면, 배에서는 정말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조금 신기해.
그때였다.
“꾸르르륵!”
공주 배에서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
공주가 깜짝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배를 내려보았다.
그리고 작은 손으로 배를 건드려본다.
꽁꽁 싸매여 누워 있을 때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자기 배에서 나는 소리라고 몰랐던 건지, 굉장히 놀란 것 같다.
그리고 재미있는 모양이다.
한 번 더 꼬르륵 소리가 나자, 공주가 까르르 웃었다.
“와, 처음 봤어요. 공주님 웃는 거.”
너무 말라 눈만 커다란 얼굴이 못난이 같다고 생각했는데, 웃으니 인상이 달라진다.
지금은 피부도 약간 꺼칠하고, 어딘지 모르게 못생김이 느껴지지만, 통통하게 살이 오르면 느낌이 달라질 것 같다.
“크면 어머니 닮아 미인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못난이 인형이라고 하면 안 되겠는데요? 공주님. 멍가 먹으러 갑시다.”
안 돼. 이놈의 혀가 너무 짧아서 말이 길어지면 아기 말투가 들어가 버린다.
뜻대로 제어 안 되는 혓바닥에, 루디의 어깨가 약간 처졌다.
그러고 보니, 공주가 말을 이해하고 있다면 이름을 불러주는 게 좋겠다.
유모가 가르쳐준 이름은 조금 길었다.
리리샤 마리나 붸레후킨 뭐시기라든가.
왜 귀족 이름은 이렇게 다들 긴지 모르겠다. 루디 자신의 이름도 쓸데없이 길더니, 공주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작위 있는 사람은 작위 명 부르고, 아니면 제일 앞 이름만 사용하는 거 아닌가?’
혼자 구시렁거리며 공주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었다.
며칠 사이 리리샤 공주는 루디에게 안겨 다니는 게 상당히 익숙해진 모양이다.
덥석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작은 몸이 코알라처럼 그의 몸에 달라붙더니 다리가 허리에 엉겨붙었다.
“리리샤님, 며칠 사이에 정말 많이 달라졌네요.”
리리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기 이름이 낯선 것 같다.
어쩌면 한 번도 불린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나디아 마마도, 유모도, 공주에게는 거의 말을 걸지 않았던 것 같다.
“앞으로는 내가 많이 불러줄게요.”
다양한 말을 많이 걸어줄수록 아이의 언어도 풍부해질거다.
루디가 말하자, 리리샤 공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선을 맞추었다.
약간 얼빵해 보이는 표정이 귀엽다.
“책이 들어오면 매일 읽어줄게요.”
부라도프에게 요구한 목록 중에는 신화와 역사책도 있었다.
루디 자신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두 개는 공주를 위한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단어는 아무래도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신화와 역사는 나중에 커도 꼭 필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에···헤···.”
옹알이 하는 것처럼, 공주가 혓바닥을 약간 내밀며 말했다.
뭔가 알고 말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린다.
몸에 비해 큰 머리가 꺼떡거리는 게 영 불안했다. 잘못하면 머리가 홱까닥 뒤로 넘어가 버릴 것 같다.
“조심하세요, 리리샤님. 목이 꺾어지면 사람은 죽거든요.”
생각보다 쉽게 사람은 죽어버린다.
그렇게 말하려다가 루디는 입을 다물었다.
우스개로도 아기한테 할 말이 아니었다.
무심코 그런 말을 해버린 자신은, 이 세상에 와서 감각이 조금 마비된 것 같다.
루디는 쓰게 웃었다.
“미안해요.”
음식 창고 안으로 들어가자, 입구쪽에 놓인 둥근 나무 의자에 천이 불룩하게 덮여 있는 것이 보였다.
천을 벗기자, 오목한 그릇이 두 개 놓여 있었다.
루디와 공주 몫으로 남긴 음식인 것 같다.
하나는 스프, 다른 하나는 고기를 넣어 끓인 죽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차갑다.
전생의 지구에 미련을 갖지 말자고 결심했지만, 이럴 때는 어쩔 수 없이 그리워진다. 전자레인지가.
전자레인지, 정말 위대한 발명품!
냉장고도, 에어컨도 세기의 발명품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하지만, 뭐든 요리해내고 덥혀주는 전자레인지는 바쁜 현대인에게 있어 발명품 이상의 존재다.
전자레인지는 음식을 데우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찹쌀가루와 물만 있으면 찹쌀떡을 만들고, 봉지 라면을 끓여주며, 영화관에 가지 않아도 집에서 팝콘을 튀겨주는 인생의 친구다.
심지어 행주를 삶아주고, 바쁠 때는 양말은 물론이요, 속옷까지 삶아주는 거야.
곁에 있으면 고마운 줄 모르지만, 없으면 생활이 불가능해진다.
‘하아.’
루디는 한숨을 쉬고 리리샤 공주를 안은 채 다시 음식창고 밖으로 나갔다.
공주를 내려 놓고, 다시 음식창고의 죽 그릇을 두 손으로 든다.
쏟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벽난로까지 가져갔다.
리리샤 공주가 벌벌 기어서 그를 뒤쫓아왔다.
기는 게 얼마나 능숙해졌는지, 루디가 걷는 것보다 빠르다.
새끼거미처럼 팔과 다리를 움직여 그를 앞지르더니 벽난로 근처까지 기어갔다.
“리리샤 공주님! 거기 서요. 벽난로 가까이 가면 위험해.”
다급해져서 약간 큰소리로 말하자, 우뚝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말이 통해서 다행이다.
루디는 뒤뚱거리며 벽난로 앞까지 쪼르르 달려갔다.
리리샤 공주는 얌전히 기다리다 다시 한 번 꼬르륵 소리를 냈다.
공주가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더니 손으로 주물주물 옷을 위로 걷었다.
공주가 현재 입고 있는 옷은 헐렁한 셔츠 하나뿐이다.
이 시대에는 아동복이 따로 없고, 어른 옷을 그대로 크기만 줄여서 똑같이 만든다고 한다.
공주의 경우에는 그나마도 없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될 때까지 속싸개로 감싸 놓기 때문에 아직 만들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래서 루디의 옷을 하단만 조금 잘라 입혀 놓았는데, 그걸 손으로 들어 올리자 벌거숭이 아랫도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염증과 상처 때문에 붉은 피부가 아파 보인다.
“···.”
루디는 살짝 시선을 돌렸다.
“···말괄량이 공주님이네.”
중얼거리면서 루디는 무릎을 꿇었다.
죽 그릇은 옆에 두고, 자기 배를 꼬집듯이 만져보는 공주의 손을 잡았다.
옷을 가지런히 내려주고 눈을 들여다본다.
“만지면 상처가 덧나요. 뭔가 약을 찾을 때까지는 깨끗하게 씻고 만지지 않는 수밖에 없으니까 건드리지 맙시다. 그리고 꼬르륵 소리는 만질 수 없능 거예요.”
“···우이···잇!”
흠, 아기라는 건 원래 말이 통하지 않는다. 공주가 손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무래도 자기 배에서 나는 소리가 궁금한 모양이다.
또 옷자락을 들어 올리려고 해서 잠시 씨름을 해야 했다.
“여자가 함부로 옷을 훌떡훌떡 넘겨버리면 안 되거든요.”
간곡하게 타이르는 말에, 공주가 눈을 부릅뜨고 화를 냈다.
얌전한 아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의외로 성깔 있다.
벽난로에는 불이 있을 때 냄비를 걸 수 있도록, 엎어진 ‘ㄷ’자 형태의 냄비 걸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왕족의 거처라 그런 게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평범하게 존재했다.
사실, 처음에 봤을 때는 그게 냄비 걸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그냥 장식인줄 알았다.
루디는 유모가 꺼내 놓은 작은 편수 냄비에 죽을 붓고 두 손으로 바짝 쥐었다.
가스렌지 마도구의 불을 끈 뒤, 냄비를 그 위에 올린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낑낑거리며 간신히 올려놓은 뒤 불을 켜고 조금 덥힌 뒤 다시 벽난로에서 냄비를 꺼냈다.
숟가락으로 조금씩 떠서 그릇에 다 옮겼는데, 미지근했다.
바닥쪽에 있던 죽은 뜨겁고 위와 가운데는 여전히 차가웠던 것 같다.
‘전자레인지면 한 방에 해결 되었을 텐데···.’
어쨌든 배고프다.
난방을 다시 켠 뒤, 리리샤 공주와 벽난로 앞에 나란히 앉아 죽을 나눠 먹었다.
스프는 먹지 못했다.
죽이 묻은 냄비에 끓이는 것도 좀 꺼려졌지만, 무엇보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온몸이 고장 난 로봇 같아서 도저히 냄비를 두 번이나 들 수는 없었다.
배가 차자 졸음이 쏟아졌는지, 리리샤 공주는 앉은 채로 머리를 바닥에 대고 잠이 들었다.
결국 낮에 찾아놓은 모포를 질질 끌고 와 공주 밑에 깔아주고, 따끈따끈한 벽난로 앞에 재웠다.
그 뒤는 온전히 루디 혼자.
이제야 겨우 마잉크를 실험해볼 수 있는 시간이 왔다.
루디는 리리샤가 깊이 잠든 걸 확인 한 뒤, 조용히 책상으로 향했다.
창을 통해 달빛이 은은하게 들어와, 쪼르르 놓인 잉크병을 비추었다.
루디는 의자 위에 올라가 잉크와 펜, 양피지를 나란히 놓았다.
잉크병을 흔들어 마석과 잉크를 섞은 뒤 깃털펜을 묻히자, 펜촉이 반짝 빛을 발했다.
‘뭘 써볼까.’
성공해도, 실패해도 전혀 위험없는 것으로 선택해야 한다.
잠시 생각해본 뒤, 루디는 양피지에 한글을 적어넣기 시작했다.
[공작새 ; 인증 없음 ; 누구나 사용 가능 ; 3D 이미지 ; 명령어 “공작새 구현” “공작새 소멸”]
양피지 위에 반짝거리는 글자가 적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평범하게 펄잉크로 쓴 글자처럼 보였다.
“마력을 넣어야 하나?”
중얼거리면서 손가락을 글자에 대자, 갑자기 은은한 빛이 글자를 따라 번지기 시작했다.
마도구가 발동할 때와 비슷한 빛이었다.
빛은 손가락을 댄 곳에서 시작해 전체 글자로 번진 뒤, 점차 가라앉는 것처럼 약해졌다.
은은하게 마력을 두른 한글이 환상처럼 양피지 위에 그려져 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루디는 작은 소리로 한국어를 입에 올렸다.
[공작새 구현]
글자에서 작은 빛이 떠올라 양피지를 떠난다. 빛이 조금씩 늘어나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름답다.
눈앞에서 은하수가 구현되고 있는 것 같다.
반짝거리는 빛이 오색찬란하게 허공에 퍼지더니 순식간에 모습을 바꾸어 공작새가 되었다.
“와우!”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리자, 공작새가 동그란 눈을 깜박이며 그를 보았다.
“맙소사! 움직이잖아.”
그저 그림 하나 떠오른다고 생각했는데, 이 공작새에게는 의지가 있는 것 같다.
마치 하인이 주인에게 하는 것처럼 공손하게 머리를 내리더니 날개를 펼쳤다.
활짝 펴진 날개에서 은은한 빛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강렬한 태양 같은 빛은 아니다. 마치 달빛처럼 은은하고 아름다운, 서늘한 느낌을 주는 빛이었다.
주인에게 자신의 모습을 자랑하는 것처럼, 공작새가 천천히 몸을 앞으로 숙여 날개를 보였다.
그리고 한 바퀴 천천히 돈다.
완전히 자신의 모습을 보인 공작새가 ‘어떠세요, 마음에 드십니까’ 하는 것처럼 그를 보았다.
루디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고마워. 예쁘다.”
그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공작새가 부리로 루디의 손을 가볍게 건드렸다.
톡톡 터지는 공기 같은 것이 피부에 닿았다.
어쩌면 그것 역시 마력인지 모른다.
딱딱한 몸은 없지만 공작새의 몸은 알 수 없는 뭔가로 이루어져 있었다.
“미안하지만 잠시 내 실험을 도와줄래?”
루디의 말에 공작새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말이 통하는구나.”
이상한 일이다.
루디는 손을 내린 뒤, 조용히 주문을 읊었다.
[공작새 소멸]
루디의 말이 허공으로 나오는 순간, 공작새의 모습은 알갱이 하나하나가 꺼지는 것처럼 조금씩 사라져갔다.
그 뒤로 열 번이나 반복했지만, 공작새의 모습이 사라지거나 약해지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마도구가 아니라도 마잉크로 쓴 뒤 마력을 부으면 주문은 완성된다.
‘그렇다면 왜 마도구가 필요한 거지? 거기에는 마석도 있던데.’
어쩌면 더 큰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마석이 있어야 하는 걸까?
‘기껏 수도나 전등을 사용하기 위해서 마석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집안에서 물이나 불을 낼 수는 없으니, 내일은 마잉크를 외부로 가져 가서 실험을 해보자.
그리고 리리샤 공주에게도 이 공작새를 보여주자.
‘굉장히 좋아하겠지.’
아직 말도 못하는 아기이니 비밀이 새어 나갈 리도 없고, 괜찮을 거다.
왠지 내일이 기대된다.
< 마잉크 테스트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