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서운 아이 >
* * *
부라도프는 쏟아지는 햇빛을 손바닥으로 가리면서 아이의 모습을 보았다.
못 먹어 비실비실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얼굴색이 좋다.
아이는 작은 몸을 요령있게 움직여 잡풀을 옆으로 밀어내면서 걸어왔다.
문득 부라도프의 시선이 아이 손에 닿았다.
“응?”
아이 손에 돌돌 말린 양피지가 들려 있다.
이 아이가 양피지를 들고 있을 이유가 없는데 저게 뭘까, 생각하는 동안 꼬마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배시시 웃었다.
“부라도프님, 안녕하세요!”
아이의 황금빛 머리카락이 햇빛에 닿아 반짝거렸다. 빛을 받은 초록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난다.
자기도 모르게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참으로 예쁜 아이로군.’
황궁에도 아름다운 아이는 있지만, 이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지닌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훗날 카니아 왕국이 진정되면 이 아이의 피를 황족 안에 넣는 것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와토린구 공작가에 강한 마력 소유가 많은 건, 제국에까지 퍼져있을 만큼 유명한 이야기다.
뭐, 진짜로 와토린구 공작가 사람인지는 몰라도 마력 소유를 얻을 수만 있다면 미천한 신분이라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누가 아는가. 이 아이에게서 정말로 빼어난 마력 소유자를 얻을 수 있을지.
처음에는 나디아그라 마마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용도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것이 더 올바른 활용 방법일지 모른다.
부라도프는 속마음을 숨기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 잘 지냈니?”
“네.”
아이가 얼굴 전체를 움직여 활짝 웃었다.
처음 봤을 때는 표정도 잘 움직이지 않고 얌전한 인상이었는데, 며칠 사이 많이 바뀌었다. 웃고 있으니 마치 꽃이 피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 어려서인지, 남자아이라기보다는 중성에 가까운 느낌이다.
외모는 여리고 아름다운데,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서늘한 달 같았다.
‘아이 같지 않아. 꼭 어른의 눈 같구나.’
나이와 눈빛이 맞지 않는다.
왠지 마음이 술렁거렸다.
부라도프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위축된 걸 알아차리고 약간 당황했다.
‘내가 미쳤나. 이렇게 어린 아이한테 무슨···.’
아이는 그런 부라도프를 눈치채지 못한 듯 양피지를 앞으로 내밀며 방긋 웃었다.
“필요한 물건을 적어왔어요.”
“글자를 쓸 줄 알았구나.”
이것도 의외다. 말하는 건 그렇다 쳐도, 이렇게 어린 아이가 글자까지 쓸 줄 알다니.
부라도프는 돌돌 말린 양피지를 폈다.
아이의 모국어가 아니라 제국어였다. 처음 부분의 글자는 조금 삐뚤삐뚤 서툰데, 나중으로 갈수록 작고 능숙해졌다. 같은 사람이 적은 것 같지 않았다.
“···어!”
이게 뭐야.
양피지를 읽어가던 부라도프의 입이 딱 벌어졌다.
설탕, 소금, 꿀, 레몬즙, 마늘, 생강, 양파, 건포도, 소금에 절인 야채, 밀가루, 메밀가루, 보릿가루, 알갱이 있는 곡류(보리, 귀리, 밀, 콩), 저장 가능한 빵 한 푸대 이상, 치즈, 베이컨 다섯 덩이, 사과술 한 통, 무화과, 소금에 절인 양고기, 돼지고기, 소금에 절인 생선, 고급 포도주 한 통, 닭 네 마리, 오리 네 마리, 거위 네 마리, 염소 암수 한 쌍, 토끼 두 쌍, 가공하지 않은 린넨, 손도끼, 송곳, 양동이 다섯 개, 곡괭이 세 개, 밧줄, 톱 세 개, 삽 세 개, 왁스 양초 열 개, 촛불 서른 개, 등잔용 기름 한 통, 어른용 부츠 2개, 여성용 신발 다섯 개, 아이 신발 다섯 개, 여성용 린넨 속옷 열 개, 튜닉 열다섯 벌, 셔츠 열다섯 벌, 양털 담요 열 개, 고급 짚단 매트리스 1개, 자물쇠, 베개 5개, 린넨 침대 시트 스무 장, 수건 서른 장, 양피지 열 장, 고급 종이, 잉크 다섯 병, 신화와 역사 책, 가공된 양털, 가공하기 쉬운 가죽 두 장······.
양피지 안에는 낯선 단어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게다가 목록이 끝도 없다.
부라도프는 목록을 읽다 말고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이게 다 뭐냐?”
“필요한 물건이에요. 뭐가 필요한지 잘 몰라서 유모님한테 물어봤더니 갈쳐줬어여.”
당황하지도 않고 아이가 대답했다.
“···.”
거짓말이다.
유모에게 약간은 물어봤을지 몰라도, 그 여자가 곡괭이나 손도끼 같은 걸 알 리 없었다.
나디아그라 비의 유모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귀족 가문 출신이다. 젊어서 남편을 잃은 뒤에 왕가의 유모가 되었다고 들었다.
계속 왕궁에서 왕자 공주만 길러온 여자가 평민이 사용하는 도구를 알 리는 없다. 이 아이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토록 작은 아이가 스스로 생각해서 저런 도구를 요구할 수 있나?’
똑똑한 아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도구는 그냥 봤다고 해서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걸 이용해서 뭘 할 수 있는지 알아야 비로소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물건들이었다.
‘이 아이는 저런 걸 사용해본 적이 있었나? 하지만 행동이나 지식을 보면 분명 귀족인데.’
아니, 그 전에, 황궁에서 이런 도구와···뭐? 오리와 염소? 이런 게 왜 필요한 거지?
부라도프는 다시 목록을 확인한 뒤, 아이에게 물었다.
“얘야, 밀가루나 고기 같은 건 이해할 수 있다만, 그 외의 것들은 왜 필요한 거니?”
아이가 슬픈 듯이 눈을 내리깔았다.
“이대로는 비마마가 돌아가실 거예요. 하루에 한 번 음식이 오는데 입에 안 맞으시나바여. 겨우 스프만 한 입 정도 드시니까···.”
아이가 부라도프에게 다가와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부라도프님! 비마마가 저렇게 못 머그면 몸이 너무 망가져서 아이도 못 낳는대여. 한 번 안 조아지면 나중에도 아이 낳는 건 바라지 못한다고 유모님이 그랬거든여.”
“···.”
그것은 알고 있다.
이전에 황궁 의사가 나디아그라 비의 건강에 대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신경을 쓰고 가끔 추가로 음식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나디아그라는 도무지 음식에 흥미를 갖지 않는 것 같다.
이 아이를 데려온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엔리코 황자가 있을 때는 그녀도 제법 식사를 즐기는 편이었다.
“신선한 계란하구 고기가 있으면 마마가 먹고 싶은 대로 이것저것 해볼 수도 있잖아여. 염소가 있으면 우유도 얻을 수 있고··· 비마마도 공주님도 튼튼해질 거예요. 하지만 이대로라면 공주님은 죽고 말아요.”
아이가 그를 올려다보더니 방울방울 눈물을 흘렸다.
“내가 곁에 있으면서 권하면 비마마도 많이 드실 거예요.”
눈물이 가득찬 얼굴로 아이가 그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그리고 슬픈 듯이 말한다.
“······하지만 비마마는 공주님을 보면 다시 정신을 잃으세여.”
작은 입술이 왜곡되는 것처럼 비틀어지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아이는 고개를 약간 내렸지만, 눈은 살피듯이 그를 보고 있었다.
“공주님이 돌아가시면 안대잖아여.”
그를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은 순진한데, 그 말의 내용과 눈빛에 소름이 끼쳤다.
얼핏 들으면 앞과 뒤의 말은 그다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이 아이는 그 말의 속뜻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아이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부라도프는 자기도 모르게 팔을 흔들어 아이 손을 떨궜다.
“너···!”
섬뜩해졌다. 정체모를 괴물을 눈앞에 두고 있는 느낌이다.
아이가 이상하다는 듯이 눈을 껌벅였다.
“···.”
갑자기 이 아이가 무서워졌다.
시종장은 나디아그라 비가 아이를 더 낳았으면 하고 원한다.
황궁의 비가 낳은 아이들 중 엔리코 황자만큼 마력이 많은 황자는 없었다. 몇 명만 더, 라고 바라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동시에 시종장은 나디아그라가 태어날 아이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면 하고 바랐다.
소국의 첩비가 황후나 황태자의 지위를 위협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공연히 제국 내부를 뒤흔들 위험이 있었다.
황제가 나디아그라를 총애할 때를 생각하면, 그녀 자체도 조금 꺼려졌다.
그래서 시종장은 나디아비가 아이를 낳을 때는 건강하고 그 이후에는 약간 정신이 오락가락했으면 한다.
그리고 지금 이 아이가 한 말은 분명 그런 뜻이었다.
제 정신이다가도 딸을 보면 이상해지니, 공주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다.
아이의 발상이 아니었다.
“너는 대체···.”
뭐냐.
부라도프는 뒷말을 숨기고 입을 다물었다.
“···어.”
당황한 듯이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 *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루디는 부라도프가 뒤로 물러서는 걸 보고 당황했다.
앞뒤 상황을 살피고 시종장이나 부라도프의 속내를 짐작하는 것까지는 맞았다.
부라도프의 반응을 보면 틀림없다.
이 사람들은 나이다 비의 아이만 쏙 빼내 이득을 보고, 그 뒤에 토사구팽 하듯이 나디아를 팽개칠 생각이다.
루디는 그렇게 하려면 공주도 살려야 하니까 먹고 살 수 있도록 목록에 있는 걸 내놔라, 말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이 사람들도 공주를 보면 발광하는 나디아의 상태는 알고 있을 테니, 넌지시 말하면 말아 듣는다.
실제로도 이렇게 금방 알아차렸고.
‘한데 뭐가 잘못된 거지?’
말한 내용도 크게 이상하지는 않았을 텐데, 부라도프 얼굴색이 귀신 본 듯 하얗다.
‘아이의 행동으로는 너무 어울리지 않았었나?’
그렇지만 처음 황궁에 올 때부터 그렇지 않았던가.
이 사람은 자신의 아이 답지 않은 행동을 충분히 알고 있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뒤돌아보면 오늘의 행동에 크게 문제점은 없을 것이다. 충분히 아이 같았다.
“···.”
루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껌벅거렸다.
한데···어쩌면 좋지.
루디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모른 척, 그냥 밀고 나가는 게 최선이다.
루디는 두 손을 꼭 잡고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부라도프님! 목록에 있는 물건은···.”
“···그래, 그건 시종장께 여쭤 보마.”
부라도프가 속이는 것처럼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루디는 순진한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
부라도프는 마차에 있던 짐을 허둥지둥 내리고, 도망치는 것처럼 떠나갔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면서, 루디는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밀가루 푸대를 보았다.
약간 화가 났다.
허리 고장 난 늙은 할머니와 네 살 아이밖에 없는데 누가 이 짐을 옮기라고 여기에다 두고 가는 거냐.
“빌어먹을!”
그날은 하루 종일 힘들었다.
저택에서 털털거리는 수레를 찾아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잡풀 때문에 밀가루 있는 곳까지 가져올 수가 없다.
그렇다고 밀가루를 거기까지 질질 끌고 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결국 빈 푸대를 수레에 가져다 놓고, 밀가루를 한 바가지씩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 뒤였다.
밀가루야 쥐가 훔쳐갈 것도 아니니 조금씩 담아 옮긴다 쳐도, 말린 고기는 어쩔 거야.
결국 바닥에 천을 놓고 그 위에 고기를 올린 뒤 루디와 유모가 힘을 합쳐 질질 끌어 옮겼다.
저택에 놔둔 공주가 제멋대로 기어 다니는 것도 문제였다.
온몸이 꽁꽁 묶여 있을 때는 하루종일 가만히 누워있었지만, 지금은 팔다리에 조금 힘이 돌아온 것 같다.
아주 빠르게 움직이는 건 아니지만, 잠깐 눈을 돌리면 조용히 이쪽에서 저쪽 끝으로 가 있곤 했다.
한편으로는 기쁜 일인데, 다른 한편으로는 곤란하고 성가시다.
물건 옮기랴, 아기 보랴, 몸이 열 개가 있어도 모자랄 정도였다.
저택 밖에서 안으로 물건 옮기는 일은 오후가 되어 하늘이 붉게 물들 무렵에야 간신히 끝났다.
루디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이 축 늘어져, 밥도 먹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그가 깨어났을 때는 창밖이 캄캄해져 있었다.
바로 누운 채 천천히 눈을 깜박이는데, 뭔가가 옆에서 꼼지락거리며 움직인다.
고개만 돌려보니 공주가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한참 동안 그러고 있었던 것 같다.
공주의 주변에는 어디엔가 버려져 있었던 것 같은 작은 천 조각 두 개, 어디에 쓰이는 건지 알 수 없는 나무공 하나, 여자 신발 한 짝, 끈 두 가닥 등의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벌벌 기어다니며 바닥에 있는 물건을 주워 온 모양이다.
공주 입에 더러운 끈이 물려 있는 걸 보고, 손을 뻗었다.
“윽!”
조금 올리려던 팔이 바닥으로 내려갔다.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온몸이 아프다. 마치 잠자는 동안 누군가가 망치로 두들겨 팬 것 같았다.
끈을 입에 문 채 공주가 그를 보더니 눈을 깜박거렸다.
“···아···에이어···.”
뭔가 중얼중얼 말하는데, 뭐라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 그를 걱정하는 게 아닐까.
“풋!”
루디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공주의 모습이 꼭 못난이 삼형제 인형 같다.
공주가 걱정스러운 듯 작은 손으로 루디의 뺨을 두드렸다.
“공주님, 아파요.”
루디의 말에 공주가 입을 헤, 벌린다. 공주의 입 안 가득 끈이 들어가 있는 걸 보고, 루디는 다시 손을 뻗었다.
“더러워요. 그런 거 먹으면 병에 걸리거든요.”
“···에...아···.”
살짝 당기자 침과 함께 끈이 조금씩 나왔다. 그 작은 입에 의외로 많이 들어가 있다.
자신의 끈을 빼앗아간다고 생각했는지 공주가 입을 앙다물었다.
“···그...으···.”
공주의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루디는 삐거덕거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앉은 뒤, 공주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안 돼요. 나쁜 행동이에요.”
이해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이제 혼자서도 오래 앉을 수 있게 됐군요. 장하네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자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들었던 걸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루디가 한 말이 칭찬이라는 걸 알았던 걸까.
공주의 볼이 허물어지면서 입이 약간 벌어졌다.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끈을 쏙 빼내자, 공주는 화가 났는지 손을 내밀어 루디의 옷을 잡았다.
입술이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다.
귀여워라.
루디가 머리를 쓰다듬자, 공주는 커다란 눈을 깜박이더니 갑자기 쿵, 하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박았다.
“윽!”
가슴뼈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
“공주님, 아가씨가 그렇게 난폭하게 행동하면 시집 못가요.”
“···우...유···머···.”
뭔가 열심히 대답하려고 하던 공주 입에서 익숙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어, 유모라고 한 건가요?”
루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공주에게 접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말을 전혀 모르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어쩌면 말을 걸어주지 않아서였을 뿐, 공주는 그동안 들은 단어를 모두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이름은 루디에요.”
“···느···이···.”
유모는 자러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비마마 쪽도 조용한 걸 보면 자고 있는 걸 거다.
시간이 얼마나 됐는지는 몰라도 아마 지금은 깊은 밤, 아무도 깨어있지 않다.
공주와 루디 두 사람뿐이었다.
동그란 눈을 보고, 루디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작게 소리를 죽여 공주의 귓가에 대고 말한다.
“정진영···그게 내 진짜 이름이에요. 한 번 불러봐요, 공주님.”
“···전···지···연···.”
“···.”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불러주지 않을 이름이 허공에 퍼진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루디는 눈을 감았다 천천히 떴다.
이제 다시는 아무도 불러주지 않을 이름과 마음속으로 작별하면서, 루디는 작게 웃었다.
이제 정말 끝이다.
전생의 삶과 완전히 이별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 누군가에게 불렸으면 그걸로 된 거지.
질질 끌어왔던 미련을 가슴 한 곳에 묻고, 루디는 공주의 이마에 자신의 머리를 갖다 댔다.
“고마워요, 공주님.”
전등 마도구의 은은한 빛이 두 사람 사이에 흐린 그림자를 만들었다.
< 무서운 아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