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 의도 없이 남을 돕는 사람은 없다 >
* * *
유모가 루디를 데려간 곳은 책장과 책장 사이의 공간이었다.
작은 나무 책상 앞에 등받이가 뱀처럼 구불구불 엉켜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나무 의자가 놓였다.
의자가 특이하게 생겼다.
발이 네 개 달린 현대 의자와 달리 굵은 하나의 기둥이 밑으로 내려와, 다시 길게 세 개로 나뉘어 뻗었다.
그 모습이 꼭 삼발이 문어 위에 의자를 얻어 둔 것처럼 보였다.
유모가 힘들게 의자를 책상 가까이 밀고 그를 불렀다.
“이 위에 올라오렴.”
루디가 의자에 올라서자, 유모가 끙끙거리며 허리를 굽혔다. 몸을 책상에 의지한 채 유모가 말했다.
“저게 잉크병이란다. 제일 오른 쪽에 있는 걸 빼면 모두 마잉크지.”
먼지가 약간 올라앉은 책상 구석에, 은인지 청동인지 모를 금속으로 만들어진 작은 병이 십여 개 있었다.
아이 손보다 약간 큰데, 항아리 미니어처같은 느낌이다.
한쪽에 동그란 고리가 있어서 잡을 수 있게 되었고, 전면에는 예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위에는 동그란 뚜껑이 올려져 있는데, 토끼 꼬리 달린 찐빵 모자 같아서 귀엽다.
“굉장히 귀한 거란다. 후궁의 다른 마마들도 마잉크는 가지고 있지만 겨우 한 개 있을 만큼, 엄청나게 구하기 어려운 거야.”
가난한 비마마의 처소에 그런 게 있다니 조금 이상하다.
루디의 의문을 알았는지 유모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공주님의 나라는 작고 가난하지만 마석 산지란다. 그걸 캐낼 기술과 돈만 있으면 다른 나라한테 기대지 않아도 될 텐데···. 우리 왕비마마도 항상 그게 걱정이셨지. 힘은 없는데 마석이 있어서 다른 나라가 넘보는 거라고···하아···. 정말로 신은 불공평하시구나.”
처음에는 우쭐하던 유모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나중에는 한숨이 되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로 덴버 왕국이 어떤 형편인지 알 것 같다.
유모가 우울함을 터는 것처럼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괜찮아. 공주님의 아드님이 마력 소유라 황태자 님을 제치면 모두 해결되는 거야. 그리 되면 우리 마마를 괴롭히던 놈들은 모두 후회하게 될 게다.”
여기에 어리석은 꿈을 꾸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정말 큰일 날 소리 하고 있어.’
안 그래도 몰락일직선으로 굴러 떨어지는 중인데, 등 뒤에 고장난 기관차를 메고 가게 되는 모양이다.
한숨은 루디 자신이 쉬어야 될 것 같다.
“유모님! 그런 이야기 다른 데서는 하면 안대여.”
루디가 유모를 보자,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듯이 히죽 웃으면서 유모가 루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라. 당연히 다른 사람한테는 하지 않아요. 예전 엔리코 황자님 살아 계실 때 그런 말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자업자득이었냐.
황후가 나쁘다고만 생각했는데 달랐던 모양이다.
유모와 나디아 마마가 황태자 꿈을 꾸고 있었다면, 황후가 그녀를 미워하고 몰아내려 했던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어쩌자고 그런 황망한 꿈을 꾸었을까.
‘이 사람들도 곤란하구나. 잘 보고 있어야지, 잘못하면 큰일나겠다.’
문득 자신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던 시종장과 부라도프의 얼굴이 떠올랐다.
순진해뵈는 유모조차 마음 속에 남모를 야망을 숨겨 놓고 있는 곳이 황궁이다.
그 안에서 나름의 권력을 쥐고 있는 시종장이라면, 그리고 그 측근이라면, 웃는 얼굴로 사람을 함정에 거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조심해야지. 그 사람들이 순수한 호의로 비마마를 걱정하고 있는 건 아닐 거야.’
루디는 시종장의 일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의자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키가 작아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책상과 높이가 맞지 않는다.
“여기에 있는 것들을 쓰면 된다.”
유모가 책상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잉크병이 조르르 놓인 옆에 화려한 깃털 펜이 있었다.
루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부터 눈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장식인줄 알았다.
깃털펜은 처음 보는데, 굉장히 길다. 길이가 어른 손바닥 두 개는 훨씬 넘어 보였다.
펜의 손잡이 부분은 잉크병과 같은 재질로 보였다. 화려하게 조각 되어 있어서, 오래 쓰면 손에 배겨 아플 것 같다.
‘진짜로 이걸로 쓴 단 말이야?’
손에 비해 펜이 너무 크다.
루디가 손에 들자 깃털펜이 제 맘대로 움직였다. 제대로 잡기가 어렵다.
그 사이, 유모가 책장에 있는 두루마리를 몇 개 가지고 왔다.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지만, 펼치자 직사각형의 종이가 되었다.
한데,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종이치고는 굉장히 두껍다.
표면을 만져보니 매끄럽기는 한데 뭔가 종이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꼭 부드럽고 얇게 가공된 북 같았다.
‘아, 이게 양피지구나.’
루디는 그제야 책상에 놓인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 차렸다.
양피지가 중세에 쓰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가죽 같지가 않다. 만져보지 않았다면 그냥 두꺼운 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조금 신기한 생각이 들어 만지작거리는데, 유모가 웃었다.
“전혀 아이 같지 않더니만, 이제 조금 내가 아는 아이들 같구나.”
유모가 마잉크 병 하나를 당겨서 손으로 뚜껑을 꼭 누르더니 조금 흔들었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 루디에게 보였다.
루디는 고개를 빼꼼 내밀어 병을 보았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병 안쪽에 닿으면서 뭔가가 반짝거린다.
“그게 마석이란다.”
“마석···.”
예쁘다.
마치 한밤의 강물에 별을 뿌려 놓은 것 같았다.
“마석을 잉크에 섞은 건가여?”
“그래, 잘 아는구나. 마석을 잘게 부순 뒤에 잉크와 섞은 거지. 나는 본 적이 없지만, 마도구사가 이걸로 주문을 적는다고 하더라.”
문득 다른 비들도 모두 마잉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뭔가 좀 이상하다.
나디아 마마는 마석 산지인 모국 덕분에 여러 병 지니고 있다 해도, 다른 비마마들은 어째서 마잉크를 가지고 있는 걸까?
루디는 고개를 갸웃하고 유모를 올려다 보았다.
“비마마들은 마도구사도 아닌데 왜 마잉크를 가지고 있나여?”
“응? 그건 당연히 마도구사가 올 때를 대비해서지. 귀족이나 왕족의 매너란다.”
마도구사가 스스로 마도구를 만들어 파는 경우도 있지만, 워낙에 비싼 물건이다 보니 주문제작이 기본이다.
마도구사는 주문한 사람의 집에 머물면서 요구하는 대로 만들고 돈을 받는데, 표면적으로 마잉크는 그때를 대비한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다.
마잉크는 비싸기도 하지만 구하기도 어렵다.
마석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런 걸 가지고 있다며 남들에게 보여 과시하는 의미였는데, 점차 누구나 구비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바뀌었다.
“우리 마마의 잉크에는 특별히 마석이 많이 포함되어 있지. 모국의 왕비마마께서 특별히 신경을 많이 쓰셨단다.”
아니, 그런 데 말고 딸이 갈 황궁 내부의 사정에 더욱 신경을 써라.
열 두 살에 시집 보냈다면서 이렇게 물정 모르는 유모 한 명만 딸려 보내면 어쩌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 두 명이 여지껏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아마 지금까지는 시종장이 신경을 써줬던 게 아닐까 싶···. 아, 이런, 싫은 생각이 들었다.
루디는 어느새 고국의 왕과 왕비의 이야기로 넘어간 유모의 옷을 살짝 잡아당겼다.
“유모님! 유모니임! 비마마 말고 이곳에 마력 소유의 황자님은 얼마나 계세여?”
유모가 자랑스럽게 가슴을 내밀었다.
“내가 알기로, 엔리코 님처럼 마력이 많은 분은 한 명도 없었다.”
“···.”
시종장의 생각을 알 것 같다.
역시 아무 의도 없이 남을 돕는 사람은 없다. 특히 이 황궁 안에는.
‘조심하지 않으면 큰 코 다치겠는데···.’
이 유모의 가벼운 입을 어떻게 막을지,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튀어나온 벽 너머 안쪽에서 유모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봐야겠다.”
유모가 허둥지둥 책상을 떠나고, 루디는 책상 위에 시선을 주었다.
일단 목록부터 작성하자.
시종장이 비마마를 죽일 생각이 없다면 어떻게든 통과되겠지.
루디는 작은 손으로 깃털펜을 쥐고 양피지 위에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아, 이런, 처음부터 삑사리네.
깃털펜이라는 거, 정말로 사용하기 어렵다.
* * *
나디아그라 마마의 처소는 그야말로 후궁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다.
부라도프는 지붕 없는 작은 마차를 손수 운전해 후궁 부지를 달렸다.
마차에는 밀가루와 절인 고기 약간, 소금 등의 물건을 싣고 있다.
‘그 꼬마도 상당히 배가 고플 테지.’
지금이 은혜를 팔기에는 적당한 시간일 것이다.
‘뭐, 그렇게 작은 아이에게 신경을 쓰는 것도 우습지만.’
그래도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야 훗날 좋은 것이 되어 돌아온다.
그 아이는 똑똑하니, 미래에 비마마의 아이가 태어나도 좋은 하인이 될 거다.
‘잘 가르치고 따르게 만들면···.’
어느새 나디아그라 비의 저택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황궁에 자리한 잡초투성이 집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래서야 폐가나 다름없지 않은가.
아름답게 가꾼 황궁의 일각에 이런 건물이 서 있다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뭐, 당분간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나디아그라의 정신이 조금만 멀쩡하면 좋으련만, 그녀의 상태는 호전되는가 싶더니 다시 나빠졌다.
황후의 짓이다.
‘정말, 황후마마도 곤란한 분이지.’
한때 황제와 사이가 좋을 때에는 그녀도 현명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황제의 취향이 나이 들면서는 조금 어려졌지만, 본래 그는 30과 40대의 성숙한 여성을 좋아한다.
아이를 낳은 여자의 몸은 30대 후반에 접어들어 몸의 굴곡이 조금 더 완만하게 깊어진다.
황제는 그 무렵의 여자 몸을 선호해서, 어릴 때부터 약혼자였던 황후와도 오래도록 사이가 좋았다.
첩비가 들어오면 금세 끊겨버리는 밤의 생활도, 황제와 황후의 경우에는 40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 덕에 황제와 황후 사이에는 황자 황녀도 풍부하다.
본인은 대국의 공주인데다, 자신이 낳은 황자는 이미 황태자로 인정받은지 오래다.
황태자를 대체할 황자도 여럿 있으니 , 어느 면으로 봐도 황후의 자리는 굳건했다. 그녀가 불안해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40대 후반이 되면서 황제의 사랑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을 뿐이다.
그것을 황후가 견뎌내지 못한 건 뜻밖이었다.
“하아···.”
부라도프는 마차를 나디아그라 비의 처소 앞에 멈췄다.
황후가 나디아 마마의 처소에 가는 물건을 모두 차단한 뒤부터, 부라도프는 몇 번이나 그곳에 은밀히 물건을 전달해왔다.
가장 기본적인 물조차 그곳에서는 스스로 조달할 수 없으니, 생활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비빈의 처소에 하루 먹을 음식조차 제대로 가지 않는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몇 번이나 그래서는 안 된다고 시종장이 충고했지만, 황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황후는 황제의 취향조차도 비틀어버린 나디아그라가 밉다.
게다가 10대와 20대의 여성에는 관심도 없던 황제를 첫눈에 반하게 한 나디아그라가,
황후의 눈에는 마녀보다도 요망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그녀를 놔두면 황제를 망칠지 모른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모처럼 마력 소유를 낳은 비빈을 죽일 이유가 없다.
‘그 정도는 충분히 알 사람인데···.’
부라도프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얼마 전에는 나디아그라의 처소로 들어가는 음식에 소량의 약이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황후가 둘러 둘러, 하인의 가족을 통해 협박하고 매수한 모양이다.
그 때문에 간신히 안정을 유지하던 비마마의 정신이 다시 이상해졌다.
재빨리 발견했으니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그대로 쇠약해져 죽었을 것이다.
그 일을 빌미로 노예 아이를 나디아 비의 처소에 들여보낼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 아이가 나디아그라 마마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면 좋은데.’
그 일이 있은 뒤로는, 나디아 마마의 처소에 있는 물건은 아무리 사소한 것도 부라도프의 손이 닿아 있다.
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입고 덮는 모든 것이 그의 감시 아래 있었다.
멍하니 저택을 향해있던 부라도프의 눈에 잡풀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아! 나오는군.”
꼬마가 타박타박 작은 몸을 흔들며 다가왔다.
< 아무 의도 없이 남을 돕는 사람은 없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