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잉크가 뭐예요? >
* * *
전생의 지구에서는 음식이 모자랄 때 배고픔을 참는 건 어른의 몫이었다.
음식에 여유가 있을 때도, 가난해서 못 먹는 때에도, 보통의 부모는 아이를 우선한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비마마 이외의 인간이 배고픔을 견뎌내야 했다.
그것이 비록 공주이고 아기라 해도 예외는 없었다.
이러한 일이 정상인 세계.
황궁의 작은 아기가 속해 있는 세상은 그런 것이다.
음식을 달라고 조르는 일조차 하지 못하고, 공주는 루디의 손가락을 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아마도 공주에게 있어 루디의 손가락은, 처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공갈 젖꼭지 같은 것이다.
배고프거나 화가 날 때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
그것이 어제 만난 자신의 손가락이라는 사실이, 루디의 눈에는 심하게 슬퍼 보였다.
유모는 가장 먼저 비마마의 상에 음식을 차렸다.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커다란 창 앞 작은 테이블에, 음식물 때문에 약간 오염된 린넨 천이 깔렸다.
오염된 부분을 숨기는 것처럼, 예쁜 레이스가 달린 작은 천이 놓인다.
그 위에 깨끗하게 닦아 반짝거리는 은식기가 가지런히 놓였다.
테이블 보도, 은식기도, 공주가 시집올 때 모국에서 가져온 것일지 모른다.
이 건물 안의 물건들과는 분위기가 약간 달랐다.
화려하기 보다는 소박하고 우아한 느낌이다.
약간 낡은 느낌이지만 소중히 다룬 것처럼 보였다.
비마마는 아직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약기운이 여전히 남아있는 모양이다.
멍한 표정을 보면, 머리의 절반은 꿈속에 잠겨 있는 것 같다.
햇빛이 눈부신 듯 눈썹을 찌푸리더니 천천히 눈을 깜박인다.
작게 벌어진 입술이 비쩍 마른 몸과 달리 통통했다.
피부는 병적일 만큼 하얗고, 몸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말랐는데, 그게 왠지 요염해 보였다.
“루디, 얘야, 공주님을 저 병풍 뒤로 데려가 주겠니?”
“네.”
루디는 마주한 자세로 공주의 허리를 부둥켜 안고 뒤뚱뒤뚱 걸었다.
공주의 몸은 신생아처럼 자그마하지만 루디 역시 작다.
아기 엉덩이를 손으로 받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팔이 짧아서 그것도 어려웠다.
결국 루디가 아기를 안을 때는 항상 공주 허리를 붙잡는다.
그 상태로 걷다 보면, 뭐, 어쩔 수 없이 어기적어기적 똥 싼 폼이 되어 버렸다.
볼품 없는 건 알지만, 몸이 어리니 어쩔 수 없지.
몇 발자국 가서 아기 몸을 추스르고 다시 몇 발자국 가는 식으로 걷다 보니 파티션에 닿았다.
공주를 처음 만난 장소다.
여전히 침대에서는 악취가 풍기고 있었다.
‘이 냄새나는 것도 어떻게 해야겠는데···.’
허리 아픈 유모에게는 맡길 수 없고, 다른 하인은 없다.
‘어쩌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앞날이 구만리구나.
한참 동안 그 작은 공간에 아기와 숨어 있었던 것 같다.
공주는 본래 성격이 그런 건지, 아니면 오랫동안 가만히 누워있기만 해서 그런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는다.
손가락을 주면 가만히 문 채 빨고, 아무것도 없을 때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먹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등을 그의 배에 꾹 누른 채 무릎 위에 앉아, 조용히 루디의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있었다.
기분이 좋은 건지, 아니면 졸렸던 건지 눈을 감고 작은 숨소리를 낸다.
잠이 든 것 같았다.
루디는 벽에 몸을 기댄 채 필요한 물건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꼽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건 고기와 밀가루, 곡식류다.
거기에 마도구로 물을 내면 어떻게든 살아간다.
‘우유가 있으면 좋겠는데···. 뭐, 힘들겠지. 젖보모도 빼앗아 갔는데 우유 같은 걸 줄 리가 없을 테니.’
황궁의 다른 처소에서는 우유를 사용하고 있을 텐데 아쉽다.
루디는 잠시 허공을 노려보다 한숨을 쉬었다.
약간 밑으로 흘러내리는 공주의 머리를 다시 자신의 가슴에 되돌려 놓고, 그 가녀린 몸을 한 팔로 끌어안았다.
“···.”
유모는 최대한 존재를 숨기듯이 살아왔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숨 쉬는 것조차 두려워하면서.
그것도 한 방편이다.
황후도 유모가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에 서서히 경계를 풀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 서서히 죽어갈 뿐이다. 살고 싶다면 요령 있게 싸워야 한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이 괜히 생긴 게 아니지.’
시끄럽게 울면서 매달릴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눈물 콧물 흘리면서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져야 한다.
기왕 필요한 물건은 준다고 했으니, 또 모른다. 누가 알아? 진짜로 닭을 받을 수 있을지.
루디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비마마의 식사가 끝난 것 같다.
아주 작게 달그락 소리가 나더니, 비마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꿈에 리코를 만났어, 유모.”
“···.”
“건강했다···나 없는 세상에서 건강하게 살아 있었어···. 그게 너무 서러워서···. 유모, 나는 나쁜 사람일까.”
비마마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루디를 만났던 일이 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쩌나.
지금 나가면 아무래도 귀찮아질 것 같다.
유모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굳이 꿈이라는 걸 부정하지 않고 대강 얼버무렸다.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데, 문득 품속에 있던 공주가 꿈쩍 했다.
잠이 깬 건가 싶어 고개를 내려 보자, 그의 손가락을 입에 문 채 가만히 있는다.
루디 팔목을 잡은 공주의 작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
비마마의 목소리를 듣고 긴장한 것 같다.
‘괜찮아요.’
귓가에 속삭인 뒤 다른 손으로 톡톡 몸을 두드려주자, 공주의 몸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비마마도 안 됐다고 생각한다.
어린 나이에 먼 타국으로 시집 와, 의지할 사람 한 명 없이 이 외딴 곳에 방치 되어 있는 거야.
이제 겨우 24살인데 아들은 죽고 정신은 오락가락. 자신을 미워하는 황후 때문에 최소한의 음식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그뿐인가.
그토록 애태우며 기다리는 남편의 나이는 현재 50세다.
남자로 사랑했다기보다는 부모가 그리워서, 혹은 자신을 비호할 사람이 그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감정을 사랑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정말 안 됐다고 생각해.
하지만 공주는 그보다 더 불쌍하다.
비마마에게는 지금도 유모가 곁에 있지만, 이 작은 아이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최소한의 것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지금도 제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 잔뜩 굳어있어.
공주에게 어머니는 보호자가 아니라 그저 무서운 사람일 뿐이다.
‘나도 남 걱정할 처지는 아닌데.’
루디는 한숨을 쉬었다.
이상한 곳에 판매되지 않고 이쪽으로 온 건 요행이었다.
거기다 황궁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외딴 건물이다.
이게 바로 전생 특전이 아닐까 싶을 만큼 현재 그의 상황에 안성맞춤이었다.
‘설마 제국의 황궁에 내가 숨어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겠지.’
마력 소유자라는 걸 숨기고 조용히 지내기만 하면 신분이 드러날 위험은 거의 없을 거다.
윽!
루디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긴장한 탓인지 공주가 잘근잘근 그의 손가락을 깨물기 시작했다.
‘공주님, 아파요.’
이제 막 나서 그런지, 아기의 이는 생각보다 날카롭다.
루디는 아기를 달래 손가락을 빼내고 아이 몸을 뒤집었다.
마주 보고 안은 채 등을 토닥인다.
긴장했던 아기의 작은 몸이 루디에게 달라붙었다.
공주가 작은 머리를 그의 가슴에 마구 비볐다.
딱딱한 이마가 가슴 뼈에 부딪쳐 아프다.
하지만 적국에 잡히면 이 정도는 아픔 축에도 못 들 거다.
와토린구 공작이 왕자를 둘이나 죽였다고 했으니, 놈들의 손에 들어가면 곱게 죽이지는 않을 거다.
여기에서 어린 시절을 무난히 보내고, 어느 정도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무렵에는 노예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는 게 최상이다.
평생 노예 상태라고 생각하면 끔찍해졌다.
‘언젠가는 꼭 자유로운 몸이 되자.’
유모가 비마마를 달래 침대로 들어가 눕게 한 뒤, 테이블에 있던 음식을 치운 모양이다.
돌돌돌돌, 음식 수레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바퀴 소리가 병풍 앞을 지나갔다.
루디는 공주를 바닥에 내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에게 매달려오는 공주를 두 손으로 힘껏 안아 올린 뒤, 조용히 병풍을 빠져나왔다.
힐끔 보니 비마마는 등에 베개를 받치고 반쯤 누워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멍하니 천정을 향해 있다.
루디는 허둥지둥 병풍에서 멀리 떨어졌다.
유모는 음식 창고 앞에서 구부정한 자세로 음식을 나누고 있었다.
스프는 절반 정도 먹은 것 같지만, 나머지는 한 입 정도만 입에 댄 것 같다. 음식은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비마마가 이곳의 음식 사정을 알고 일부러 남기는 건지, 아니면 그저 식욕이 없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덕분에 유모와 공주가 아직 살아있는 걸 거다.
‘황후라는 여자, 정말 독하구나.’
작은 동물 몇 마리를 구멍에 밀어 넣고, 한 마리 양만큼 음식을 넣어준다.
언젠가는 그 동물들이 서로 물어 뜯으며 먹어 치우는 걸, 황후는 기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왠지 그런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유모가 접시에 놓인 작은 고기를 셋으로 나누었다.
손가락 한 개 반 정도가 된 고기를 한 개를 다시 잘게 썬다.
“공주님 건가요?”
루디가 묻자, 유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걸 주면 계속 씹다가 넘기신단다.”
아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지. 이도 제대로 없는 아기가 고기를 삼키다 목에 걸리면 어쩌려고.
지금까지는 끓일 물이 제대로 없어서 그랬다 해도, 이제 사정이 다르다.
루디는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삼키고 배시시 웃었다.
“유모님. 냄비 하나만 벽난로에 걸어주세요.”
“응? 그건 또 왜?”
“우리 고향에서는 아기한테 머길 때 그러케 하거든여. 물에 오래 끄려서···.”
“아니, 그런 곳이 다 있누? 하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드셨어도 공주님은 끄떡 없으셨단다.”
공주가 고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자신이 자주 먹는 음식이라는 걸 아는 모양이다.
루디는 아기가 고기를 잡지 못하게 끌어당겨 안았다.
유모가 그 모습을 보고 빙긋 웃었다.
“보렴, 공주님은 굉장히 잘 크셨지 않니 젖보모를 뺏기고 나서는 한동안 조금 위험했지. 본래는 지금 시기까지 우유를 드셔야 하는데 그걸 못하게 됐으니.”
“···.”
“하지만 이제는 걱정 없으시다. 위험한 시기는 지나갔어.”
안 지나갔다.
제대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해서 시체처럼 비쩍 마른 게, 유모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걸까?
어쩌면 이 세계에서는 돌이 될 때까지 아기한테 우유만 먹이다 곧바로 고형물로 넘어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중세에는 아동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아기를 작은 성인으로 취급했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중세의 그림에는 아기가 징그러운 성인처럼 그려져 있는 시기가 있었다고···.
뭔가 좀 이상하지만, 그 시대는 그랬다고 한다.
“유모 니임···.”
루디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유모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엄마가 항상 해주던 건데···먹고 시퍼여···그거 머그면 항상 손에서 이상한 힘이 막 나오고···.”
“!”
유모의 눈이 커졌다.
“설마···. 그렇구나! 네가 마력이 많은 이유가 그건 것 같다.”
“···.”
유모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렇군. 예전에 마녀가 특별한 비법을 써서 온갖 희한한 약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구나. 그런 것과 비슷한 모양이다. 너는 뭔가 특별한 음식을 먹고 큰 거야.”
그럴 리가 없지.
하지만 유모는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번쩍 고개를 들었다.
“맙소사! 어쩌면 너는 마녀의···.”
유모가 힐끔 루디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얼추 맞지. 이상하게 마력이 많은 것도, 똑똑한 것도, 분명히 그래서야. 그래, 네 말대로 하는 게 좋겠다.”
유모는 허둥지둥 음식 창고로 들어가 냄비를 꺼내오더니 거기에 고기를 모두 집어넣었다.
그 뒤는 쉬웠다.
유모는 루디가 무슨 말을 하면 그대로 따랐다.
마치 거기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뭐, 잘 됐다.
루디는 유모의 도움을 얻어, 냄비에 고기와 밀가루, 물을 넣고 푹푹 끓였다.
소금으로 간을 해 먹으니, 그럭저럭 먹을만 했다고 할까.
사실은 맛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느낀 자신이 너무 불쌍해졌다.
지구에서라면 백만 원, 아니, 천만 원쯤 줘도 안 먹을 것 같은 음식인데 정말 맛있었어.
‘대체 얼마나 굶주렸던 거야, 나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왔다.
걸신들린 것처럼 먹는 공주님을 보고는 정말로 울었다.
식사를 다 마친 뒤, 루디는 유모에게 종이와 잉크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내일은 부라도프를 만나는 날이다. 그가 직접 올지 다른 사람이 올지는 모르지만, 미리 그에게 줄 목록을 만들어야 한다.
유모는 루디가 종이와 펜을 요구하자 깜짝 놀란 모양이다.
“아니, 너 글자를 쓸 줄 아니?”
“···네···엄마가 나는 귀족님한테 가게 댄다고 해서···매일 배워써여.”
“그렇구나. 그렇지. 마력 소유는 당연히 귀족한테 판매···.”
유모가 말하다 말고 힐끔 루디를 보았다. 차마 부모가 판다는 말을 애 앞에서 하기는 뭐했던 모양이다.
유모가 앙상하게 마른 손을 그의 머리에 얹었다.
“그래, 그 어린 나이에 글자를 배웠다니, 참으로 대단하구나. 글자는 엄마한테 배웠니?”
글자 선생한테 따로 배웠다고 말할까 하다 그만뒀다.
거짓말이 너무 많아지면 나중에 오류가 나온다.
거짓으로 대답할 가짓수는 적을 수록 좋은 법이다. 모든 질문에 “엄마”라고 대답할 수 있도록, 거짓말 종류는 하나로 통일하자.
“네.”
“어쩌면 너의 엄마는 숨어 사는 마녀였을지도 모르겠다.”
유모는 그를 벽난로 근처에 있는 책장으로 데려갔다.
“그렇지. 네가 마녀의 아이라면 마잉크를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마녀의 힘은 그런 것과는 다르다고 들었지만 너는 마력이 있으니 또 모르지.”
“마잉크가 뭐예요?”
“마도구에 글자를 넣을 때 쓰는 잉크란다.”
이곳에 루디가 온 건 정말로 전생자 특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루디는 배불리 먹고 잠이 든 공주의 모습을 살짝 훔쳐 본 뒤, 유모가 꺼내는 잉크병에 시선을 주었다.
< 마잉크가 뭐예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