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린 의외로 닮은 꼴인지도 몰라요 >
* * *
꿈을 꾸었다.
아무리 이세계라 해도 얼굴은 귀여운 토끼인데 몸뚱아리는 꿀벌이고, 날개는 박쥐인 동물은 없을 테니, 분명 이건 꿈일 거다.
귀엽게 생긴 토끼가 해골처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를 움켜쥐더니, 아, 근데 왜 손은 사람인지 모르겠네, 아무튼 그의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 갔다.
그리고 쪽쪽 빠는데, 기가 그쪽으로 몽땅 빨려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
루디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괴물 토끼에게 말했지만, 들리지 않는 건지, 무시하는 건지, 토끼는 계속 그의 손가락을 빤다.
토끼의 앞니가 손가락 윗부분을 살짝 긁었다.
꿈인데도 아프다.
이 썩을 놈의 토끼! 얼굴만 귀여우면 다냐. 몸은 괴물이면서.
루디는 끙끙거리며 손가락을 빼내려고 했지만, 가위 눌린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갑자기 토끼가 그의 손가락을 꽉 물었다.
“헉!”
번쩍 눈이 떠졌다.
사방은 캄캄하다.
잠시 동안 자신이 어디에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눈을 깜박거리자 간신히 자신이 어제 비마마의 후궁에 왔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누군가가 손가락을 콱 깨문다.
“아파.”
고개를 돌려보니, 어둠 속에 허연 게 있었다.
“점등!”
그가 중얼거리자, 근처에 있던 마도구가 발동했다.
갑자기 사방이 환해진다.
공주가 그의 손가락을 물고 있었다. 아무리 빨아도 먹을 게 나오지 않자, 또 화가 난 모양이다.
“공주님, 손가락은 먹는 게 아니에요.”
“···흐에···.”
아기 눈에 약간 눈물이 맺혔다.
루디는 앉아서 짧은 팔을 내밀어 아기를 무릎에 끌어올렸다.
얼굴이 일그러지며 울음을 터뜨리려던 공주가 흡, 흡, 소리를 내며 입술을 다물었다.
루디가 안아주는 걸로 울음이 사그라진 모양이다.
어쩌면 배고픔보다 사람이 안아주는 기쁨이 더 큰 건지도 모른다. 아기는 누군가 안아주면 울음을 멈추는 경우가 많으니까.
“···.”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기, 분명히 12개월에 가깝다고 들었는데 왜 말을 못해?
배가 고프다고 울거나 손가락을 빠는 것 외에는 특별히 다른 행동을 하지도 않는다.
돌잔치에 몇 번 가봤지만, 그 아기들은 모두 부모가 버거울 정도로 움직이고 버티고 나름대로 짤막한 단어를 말하고 있었다.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돌쟁이는 부모가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고집쟁이 아니었던가?
‘설마···.’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한 가지뿐이다.
아무도 이 아기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다정하게 껴안고 눈을 맞추는 일조차 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꽁꽁 묶여서 누워있었기 때문인지 아직 걷지도 못하는 것 같다.
루디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중세시대 그림을 보고 친구들이랑 잠깐 논란을 벌였던 일이 있었다.
어쩌다 중세 그림을 보았는데, 거기에 아기 미이라 같은 게 그려져 있었던 거다.
어떤 친구는 그게 아기가 죽어서 염을 한 거라 주장하고, 어떤 녀석은 무슨 소리냐, 엄마가 애 안고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이다, 금방 태어난 애가 무슨 염이냐, 그렇게 주장했었다.
우스갯소리로 넘어갔기 때문에 따로 조사해보지는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그림은 이렇게 아기를 싸매 놓은 속싸개다.
공주는 거기에 더해, 이야기를 걸고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도 없었는지 모르겠다.
비마마가 딸인 공주를 몰라보는 데다, 유모는 그녀를 보살피느라 바빠서 아기한테 까지는 신경이 안 갔을 테니까.
자신을 향해 손을 뻗어오는 아기를 보고, 루디는 손가락을 한 개 주었다.
눈을 마주치고 말한다.
“이 손가락은 지금만 빌려주는 거예요.”
그림에 남을 정도면 아마 대부분의 아기가 그렇게 싸매여 자랐을 것이다.
결국, 저 밖 세상을 걸어 다니는 사람도 모두 똑같이 자랐다. 꽁꽁 싸매 기르는 아기도 결국 자라서 어른이 되면 정상적으로 걷게 된다.
어쩌면 루디 자신도 이런 식으로 꽁꽁 싸매여 일년을 보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서너 살이 될 때까지 저택의 방안에만 머물렀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도 늦지 않았다.
루디는 아기가 부지런히 자신의 손가락을 빠는 걸 보고 빙긋 웃었다.
정서적인 면은 다른 사람보다 약간 뒤쳐졌지만, 부지런히 말을 걸어주고 사랑을 내리부으면 이 아기도 금방 보통 사람을 따라잡게 된다.
아기의 뇌는 스펀지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아기에게는 그만큼의 유연성이 있는 법이다.
“공주님도 이제 금방 말도 하고, 고집도 부리게 될 거예요.”
썰렁하게 외롭던 가슴 속에 성냥불이 켜진 느낌이 들었다.
이 작은 아기에게는 자신밖에 없다.
비마마에게는 자신을 기르고 소중히 여겨주는 유모가 있다. 분명히 유모에게는 아기보다 비마마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 아기에겐 아무도 없었다. 이 적막한 건물에서, 어머니의 눈에 띄지 않도록 칸막이에 가려져 숨죽이고 자라왔다.
거기에 전생의 모든 걸 잃고 이 세상에 홀로 뚝 떨어진 루디가 온 건, 어쩌면 의미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운명이라는 게 정말 있는지는 몰라도, 만일 진짜 존재한다면 반드시 이런 게 아닐까.
사람에게 외면 받아 홀로인 아기와, 익숙한 세상에서 혼자만 뚝 떼어져 버린 자신.
“우린 의외로 닮은 꼴인지도 몰라요.”
너도 나도, 둘 다 한없이 외로운 존재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밥 먹읍찌다.”
이런, 발음이 샜다.
아직 몸이 작고 어리다 보니 혓바닥도 짧다.
대부분은 신경 쓰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말할 수 있지만 가끔 자기도 모르게 아이 말투가 나오는 경우기 있었다.
아기밖에 없어도 조금 창피하다.
어색하게 히죽 웃고, 루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가락을 물고 있던 아기의 얼굴도 따라 올라왔다.
아니, 이제 그만 물고 놔줬으면 좋겠다.
루디가 손가락을 빼내려고 하자, 아기가 두손으로 그의 손가락을 꽉 잡았다.
힘이 장사다.
루디는 한손으로 아기의 팔을 잡고 조금 일으켜 보았다.
다리가 부실하긴 해도 12개월 가까이 되었으니 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기의 다리가 너무 가늘었다. 손아귀 힘은 강했지만 다리는 또 다른 모양이다.
아기는 아주 약간 몸을 일으켰지만 금세 주저앉았다.
루디가 살짝만 팔을 잡았는데도 스스로 몸을 일으키는 걸 보면, 일어나려는 의지는 많은 것 같다.
‘그러고보니 공주 이름도 모르네.’
유모가 일어나면 제일 먼저 아기 이름부터 물어봐야겠다.
몇 시쯤 되었는지 모르지만 아직 밖은 캄캄했다. 건물 안인데도 손발이 시릴 만큼 춥다. 이런 가운데서 용케 잤구나 싶었다.
루디는 마도구 창고로 다시 들어갔다.
상자를 더 뒤져보니 [난로]라고 적힌 마도구가 한 개 있었다.
명령어는 [난로 온], [난로 오프]였다.
어느 녀석이야, 이런 명령어 만든 게. 어휘력 너무 형편없는 거 아니냐.
난로 켤 때마다 이런 말을 중얼거릴 생각을 하니 한심해졌다.
루디는 길게 한숨을 쉰 뒤에, 음식 창고에서 찾아낸 주머니를 어깨에 멨다.
작아서 루디의 몸에 딱 맞는다.
뭐에 쓰이는 건지 모르지만 선반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거기에 난로 마도구를 넣고 아기를 안는다.
푹 자고 난 뒤라 그런지, 어제보다 안는 게 훨씬 수월했다.
거기다 공주도 안기는 데 요령이 생긴 모양이다. 루디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목은 좀 졸려서 괴롭지만 덕분에 안정감 있게 움직일 수 있었다.
어제의 공주는 이런 동작조차 하지 못했던 걸 생각하니, 약간 마음이 아팠다.
벽난로는 건물의 중앙에 있다.
전등 빛이 약간 비치지만 실내는 아직 어두웠다.
루디는 아기를 안고 구르지 않도록 조심하며 벽난로로 향했다.
난로의 마석은 황금색에 가까운 진한 노랑이었다.
가스렌지는 빨간색, 전등은 연한 노란색이었으니, 추측하건대 난로는 아마 전기로 작동하는 걸 거다.
온풍기 같은 거면 아무데나 둬도 되겠지만, 전기 난로와 똑같이 작동한다면 그냥 바닥에 둬서는 안 된다.
잘못하면 불이 나요.
또 의외로 황금색과 연노랑 색의 마석은 전혀 다른 종류일 가능성도 있다.
‘벽난로에 두는 게 가장 안전하겠지.’
루디는 스위치 대신인 난로의 구멍에 작은 막대를 꽂아 벽난로에 넣은 뒤, 작게 중얼거렸다.
[난로 온!]
갑자기 마도구가 붉게 달아오른다.
순식간에 빨개진 마도구가 보이지 않는 불에 타는 것처럼 보였다.
‘헉! 이거 과열돼서 터지는 거 아니야?’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유모의 말을 들어보면 이전에도 썼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불안하게 작동되는 건지 모르겠다.
[난로]는 순식간에 공기를 데우며 건물 안을 따뜻하게 만들어갔다.
하지만 지나치다.
마도구 밑에 깔린 재가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하얗게 변해갔다.
걱정스런 마음에 그걸 들여다보다, 문득 명령어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루디가 지금까지 말한 건 모두 한국어다.
하지만 마도구를 작동시킬 때 누군가가 한국어로 말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한글을 읽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어찌 말을 할 수 있을까.
게다가 그렇다면 굳이 마도구에 자동번역이라고 적어두었을 리도 없다.
수도나 전등 같은 단어가 이 세계에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자동번역이라는 건 어쩌면 그저 자동 해석이라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루디는 난로를 끈 뒤에, 이번에는 제국어로 말했다.
“벽난로!”
이번에는 아예 작동하지 않았다.
전기 난로라는 단어가 없을 테니 벽난로라고 말해봤는데 되지 않는다.
‘뭐가 잘못된 거지?’
루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은은하게 뜨거워지는 불 없는 난로!”
오오, 이번에는 마도구가 작동하려나 보다.
은은하게 빛났다.
한데 아까 한글로 말했을 때보다 마도구 발동의 빛이 상당히 적다.
발동은 한 것 같은데 작동이 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공기가 전혀 따뜻해지지 않았다.
마도구에도 변화가 별로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마도구에 손을 대보자, 조금씩 따뜻해지고 있었다.
‘그렇구나. 마도구에 적힌 단어와 비슷하게 설명하면 작동되는 식이었군.’
몇 번 더 실험해본 결과, 마도구에 적힌 명칭과 비슷하게 설명할수록 위력이 세지고, 실제와 다르면 아예 작동하지 않는 걸 알 수 있었다.
한글로 말했을 때가 가장 위력이 세다.
‘사람들 앞에서는 한글로 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적당한 강도로 난로를 작동시킨 뒤, 루디는 공주를 안고 다시 음식 창고로 향했다.
공주님이 배가 고픈지 이제는 루디의 머리카락을 씹고 있었다.
유모가 깨어나면 도움을 좀 받아서 아기 이유식으로 고기죽을 끓여야겠다.
쌀은 없지만, 물에다 고기와 스튜, 야채스프의 건더기를 조금씩 넣고 오래 끓이면 되지 않을까 싶다.
맛은 어떨지 몰라도 건강이라는 측면에서는 괜찮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어요. 대강 뜨거운 물에 조금 타 먹는 수밖에.”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아기에게 말을 건네고, 움푹한 그릇에 야채스프에서 건져낸 건더기를 넣었다.
야채 건더기를 숟가락으로 뭉갠다.
생각과 달리 몸이 잘 움직여주지 않았다.
건더기를 숟가락으로 누를 때마다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
손으로 잡고 싶은 생각은 굴뚝 같았지만, 참자.
아직 어리기는 해도 공주님이 먹을 음식이다.
노예의 손가락 따위로 잡아서···아니, 이미 손가락을 빨아 먹고 있나. 그러면 상관없지 않을까.
루디는 약간 고민했지만, 결국엔 손으로 야채를 고정하고 숟가락으로 뭉갰다.
거기에 마도구에서 낸 뜨거운 물을 조금 붓는다.
다시 숟가락으로 잘 개서 아기의 입에 대자, 덥석덥석 먹기 시작했다.
정말 잘 먹는다.
왠지 흐뭇한 마음에 한 숟가락씩 주다 보니 어느새 그릇이 비어 있었다.
아, 배고프다.
하지만 노예가 마음대로 먹어도 되는 걸까. 약간 고민하다 빵을 조금 뜯어먹었다.
뭐, 어제도 먹었으니까 고민해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 우린 의외로 닮은 꼴인지도 몰라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