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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21화 (21/201)

< 마도구가 가장 쉬웠어요 >

* * *

루디는 아기를 부둥켜 안고 뒤뚱뒤뚱 계단 뒤의 공간으로 향했다.

건물 자체가 원룸 형태다보니 공간은 이어져 있지만, 계단과 튀어나온 벽 때문에 자연스럽게 입구가 만들어져 있다.

그 안으로 들어가자, 제법 넓은 공간이 나왔다.

양쪽 벽에는 나무 선반이 여러 개 달려있고, 칸마다 띄엄띄엄 바구니나 그릇 등 물건이 놓여 있었다.

대부분 먼지가 뽀얗게 올라앉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뭔가가 곰팡이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선반도 있었다.

제일 구석에는 얇은 끈으로 꽁꽁 묶은 덩어리 한 개가 허공에 매달려 있다.

한 면에 칼로 베인 자국이 있는 걸 보면 훈제 고기인 것 같지만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현대 지구인이 가공되지 않은 훈제 고기를 볼 기회라는 건 거의 없기 때문에, 솔직히 전혀 뭔지 모르겠다.

전체적으로 선반은 대부분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하아.”

루디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한쪽 구석의 키 낮은 테이블 위에 둥글넓적한 전골냄비 같은 것과 요술램프처럼 생긴 은식기 등이 놓여 있었다.

오늘 비마마와 공주가 먹은 음식인 것 같다.

루디는 공주를 도톰한 양탄자 위에 눕혔다.

공주가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그를 잡으려고 한다. 루디는 살짝 몸을 피했다. 아기를 안고서는 아무 일도 못한다.

테이블로 다가가, 전골 냄비 안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루디의 키로는 무리였다. 루디에게는 테이블이 너무 높았다.

루디는 구석에 있는 의자를 질질 끌어 그 위에 올라섰다.

전골 냄비 뚜껑을 열려다 다시 내려놓았다.

제법 무겁다.

작은 몸으로는 아무래도 뚜껑을 들기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뚜껑을 반쯤 옆으로 밀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고기가 숭숭 들어간 스튜가 반쯤 남아있었다.

불을 쓰지 못한다면서 이걸 어떻게 먹은 걸까.

‘설마 그냥 먹은 건 아니겠지?’

만일 그랬다면 정말 슬플 것 같다.

루디는 전골냄비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테이블 위에 놓인 요술램프 비슷한 은그릇에는 야채 스프가 들어 있었다.

토마토로 국물을 낸 것 같다.

불그스레한 국물에 굵게 썬 야채가 반쯤 잠겨 있다.

그 외에는 구운 고기를 얇게 저민 것 약간과 빵 한 덩어리 뿐이었다.

“···.”

이게 왕의 첩이 먹은 음식인가.

아무리 후궁 한구석에서 버림받은 듯 살고 있어도 비마마인데 정말 너무하다.

하지만 정말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루디는 절망적인 심정이 되어 음식창고 안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구석구석 뒤져도, 테이블 위에 있는 것 외에는 아기가 먹을 만한 게 없다.

간신히 찾아낸 건 밀가루 반 푸대 뿐이었다.

덧붙이자면 루디가 먹을 만한 것도 없다.

부라도프는 부족한 것이 있을 거라고 했지만 거짓말이다. 부족한 게 아니라 아예 있는 게 없었다.

그때, 입구 쪽에서 약한 아기 소리가 들렸다.

“으···으에···흐에엥···흐엥···.”

잠시 동안은 칭얼거리는 소리만 내던 공주가 드디어 울기 시작하려는 모양이다.

루디는 서둘러 그 곁으로 달려가 아기를 안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아기를 무릎에 올린 뒤 토닥토닥하자, 후에 후에 하며 약한 울음소리를 내던 공주가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그러고보니 난방이 전혀 안 되는 건물 안은 춥다. 나름대로 양탄자가 깔린 곳에 내려놓았지만 공주도 추웠을 거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겨울 되면 얼어 죽겠네. 일단 마도구를 확인해보자.’

유모의 말대로라면 마도구로는 음식을 끓이거나 난방을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면 오늘 음식을 끓여서 공주에게 먹이고 싶었다. 최소한 따뜻한 물만 먹여도 좀 나을 거다.

루디는 유모에게 들은 대로 음식창고 옆에 있는 커튼을 젖혔다.

거기에는 드레스룸처럼 생긴 작은 공간이 있었다.

벽에는 음식창고와 마찬가지로 선반이 달렸다.

선반에는 작은 상자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루디는 공주를 바닥에 눕혔다.

이번에는 아기가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했지만, 어쩔 수 없다.

커튼을 닫아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한 뒤 서둘러 선반에 다가가 상자를 확인했다.

상자를 한 개 열어보니, 폭신한 원단 위에 붉은 색의 마도구가 하나 들어있었다.

크기는 작은 편이라서, 루디의 손바닥보다 약간 크다.

하지만 마도구라는 게 원래 이런건가 싶을 만큼 이상하게 생겼다.

와토린구 공작가의 노예 목걸이처럼, 점토에 보석 같은 알갱이를 섞어 만든 것인데 그냥 둥글넓적한 돌 모양이다.

그 돌 모양의 가장자리에는 붉은 색의 선이 빙 돌아가며 그려져 있었다.

마도구 전체에 퍼져 있는 보석 알갱이는 여러 가지 색이 섞인 것 같은데, 그 부위에는 붉은 알갱이만 있는 모양이었다.

붉은 선이 등불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마도구 앞쪽에는 작은 구멍이 있고, 거기에 맞는 작은 막대기가 그 옆에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아마 그게 마도구라는 걸 믿기 어려울 것이다.

아니, 보통 사람은 읽을 수 없다고 했으니 누구나 알려나.

어쨌든 루디가 보자마자 알 수 있었던 것은 그 위에 적혀 있는 글자 때문이었다.

둥글넓적한 마도구 위에는 한글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가스렌지 ; 인증 없음 ; 누구나 사용 가능 ; 명령어 “점화” “소화”, 자동번역]

가스렌지···. 마도구인데 가스렌지래.

이 글자를 누군가가 이해할 수 있다면 분명히 배꼽 잡고 웃고 있을 거다.

노예 목걸이에 [전기 충격기]라고 적혀 있는 걸 보았을 때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이건 좀 웃긴 달까, 기가 막혔다.

그리고 기왕 한글 표기를 할 거면, [가스레인지]라고 제대로 적어라.

명령어는 한글로 점화, 소화라고 적혀 있지만, 자동번역이라고 따로 표기한 걸 보면 아마 제국어도, 디코콰리아 어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것 같다.

한글 표기 옆에는 노예 목걸이와 마찬가지로 전기회로 같은 그림이 작게 그려져 있었다.

회로 그림은 간단했다.

앞에 스위치를 뜻하는 표시가 되어 있고 뒤쪽에는 [마석]이라고 한글 표기가 되어 있는 작은 동그라미가 있었다.

건전지가 있어야 할 자리에 대신 마석이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회로가 그려져 있다는 건, 이 안에 마석이 있다는 걸까.’

들어보니 그리 무겁지는 않다.

루디는 동그란 마도구를 돌려 뒷면을 보았다.

거기에도 구멍이 있는 것 같다. 작은 고리가 달린 뚜껑이 있었다.

그걸 빼내자 앙증맞게 생긴 서랍이 쏙 나왔다. 뚜껑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마석을 넣는 공간이었다.

작은 서랍 안에 붉은 색의 콩알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이게 마석인가?

손에 들고 등불에 비춰보니 약간 투명하다. 꼭 작은 유리구슬 같았다.

‘여기에 마력을 넣으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마석의 붉은 빛이 늘어나는 것 같더니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어···. 어?”

마력, 들어가 버린 것 같은데?

시험해보고 싶어서 마석 서랍을 다시 구멍에 밀어넣었다.

스위치 부분인 구멍에도 작은 막대를 넣는다.

막대를 꽂자마자, 마도구에서 은은한 빛이 스며 나왔다.

발동된 것 같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넣고 뺄 수 있었던 마석 넣는 서랍이 딱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두근두근해졌다.

루디는 마도구를 바닥에 놓은 채 작게 명령어를 말했다.

“점화!”

갑자기 마도구 전체가 뜨거워지더니 가스레인지처럼 불이 확 올라왔다.

“앗!”

생각보다 불길이 크다. 가스레인지가 아니라 모닥불 수준이 아닌가. 이러다 잘못하면 불이 나겠다.

루디는 깜짝 놀라 다급하게 외쳤다.

“소화!”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불이 사라졌다.

“하아.”

마도구 성능이 좋아 다행이다. 고물이라 명령어가 잘 듣지 않으면 큰일날 뻔 했다.

"이제 불은 확보했고.”

다른 상자를 확인해보니, 한 상자에는 [수도]라고 적힌 마도구가, 다른 상자에는 [전등]이라고 적힌 마도구가 몇 개 있었다.

모두 둥글넓적하게 생겼다.

앞에 스위치가 있는 것도, 뒤에 마석 서랍이 있는 것도 같았다.

다른 것은 마석의 색깔이었다.

수도라고 적힌 마도구의 마석은 푸른 색, [전등]의 마석은 노란색이었다.

마석의 색깔마다 할 수 있는 일이 다른 모양이다.

그 외에도 선반에는 상자가 조금 더 있었지만, 키가 닿지 않았다.

이 안에는 의자가 없어서, 상자를 꺼내려면 천상 밖에서 가져와야 한다.

하지만 마도구에 발이 달려 도망갈 것도 아니다. 나머지는 나중에 확인해도 될 것이다.

우선 아기를 먹이고 씻기는 게 급선무였다.

루디는 [전등]마도구에 있는 마석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작동법은 가스레인지 마도구와 마찬가지였다. 막대를 꽂고 적혀 있는 명령어를 말하면 된다.

명령어는 점등과 소등이었다.

전등 마도구를 켜자 등불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실내가 밝아졌다.

갑자기 불이 밝아지자 눈이 부셨던 모양이다. 공주가 눈을 꽉 감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루디가 가서 안아주자 손가락이 하얗게 되도록 그의 옷을 움켜쥐었다.

“맙소사!”

어두운 등불 아래에서는 잘 몰랐는데, 밝은 빛에서 보니 아기의 목이며 손목 등 피부 곳곳이 빨갛다.

얼마나 아프고 괴로웠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앞으로는 내가 있으니까요, 공주님.”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기를 안고 음식 창고로 나간다.

정작 힘든 것은 그 다음이었다.

마석에 마력을 붓는다는 엄청난 일은 밥 먹는 것보다 쉬웠는데, 정작 냄비를 화덕에 올리는 건 할 수 없었다.

네 살 작은 몸으로는 스튜를 덥히는 것도, 커다란 냄비를 화덕에 올리는 일도 할 수 없다.

‘이런 불합리한 일이···.’

불도 물도 있는데, 써먹을 수가 없다니, 이럴 수는 없다.

고민하던 루디는 어쩔 수 없이 ‘수도’ 마도구를 꺼내왔다.

이 마도구에서 나오는 물을 먹을 수 있는건지 아직 모른다.

어쩌면 목욕할 때만 사용하는 걸지도 모를 일이다.

최소한 입에 들어가는 건 검증한 뒤에 사용하고 싶었지만, 당장 먹을 물이 없으니 별 도리 없었다.

루디는 한숨을 쉬고 마도구에 쓰여진 글자를 보았다.

수도는 전등이나 가스레인지와는 조금 다르게 적혀 있었다.

[수도 ; 인증 없음 ; 누구나 사용 가능 ; 수위 자동 감지 ; 명령어 “냉수” “온수”, 자동번역]

‘수위 자동 감지’라는 말이 더 붙어 있다.

보아하니, 한글로 되어 있기만 하면 뭐든 자기 마음대로 써서 마도구 성능을 규정할 수 있는 것 같다.

어떤 식으로 물이 나오는지 모른다.

루디는 일단 건물 밖으로 수도 마도구를 들고 나갔다.

바닥에 내려놓은 뒤 [냉수]라고 말하자, 신기하게 마도구에서 습기가 생기더니 점차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수도라고 적혀 있어서 진짜 수도처럼 나올 줄 알았는데 그냥 마도구 전체에서 물이 스며 나오는 식이다.

조금 먹어 보자, 무색무취 평범한 물이었다. 수돗물 특유의 약품 냄새 같은 건 나지 않았다.

루디는 음식창고를 뒤져 그릇을 하나 꺼냈다.

거기에 수도 마도구를 넣고 [온수]라고 말하자, 컵라면도 먹을 수 있을 만큼 뜨거운 물이 조금씩 그릇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물은 계속 나오다 그릇을 9부 정도 채운 뒤 멈췄다.

그것도 이상한 맛이 나지는 않았다.

일반 수도에서 온수는 먹지 못하는 물이지만, 마도구는 다른 것 같다.

마도구, 엄청나구나. 이 정도면 현대 지구보다 더 편리한 게 아닐까.

글자만 더 써넣을 수 있으면 보리차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보리가 없어서 보리차가 안 된다면, 최소한 맛 좋은 약수 정도는 가능할 거다.

먹고 나서 한 시간 쯤 지나도 아무 문제 없자, 루디는 다시 뜨거운 물을 냈다.

거기에 스튜를 조금 타서 공주에게 조금씩 먹인다.

유모의 말로는 공주가 잘 먹지 못한다고 하던데, 루디가 보는 한 그런 일은 없었다.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가까이 댈 때마다 두 손으로 움켜잡고 먹어서 흘리기를 여러 번.

한참을 먹던 공주는 결국 숟가락을 입에 물고 잠이 들었다.

그 무렵에는 루디도 기진맥진이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도 귀찮고 힘들어져서, 루디는 아기를 안은 채 음식창고 한 귀퉁이 쓰러지듯이 누웠다.

빨지 않아서인지, 양탄자에서는 눅진한 냄새가 났다.

루디는 눈을 감은 채 [소등]이라고 중얼거렸다.

조금 전까지 음식 창고를 밝게 비추던 전등이 꺼지고, 사방이 조용해졌다.

새근새근 아기의 숨소리를 들으며, 어느샌가 루디의 의식도 암흑 속으로 떨어졌다.

< 마도구가 가장 쉬웠어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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