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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20화 (20/201)

< 공주님 앞으로 잘 부탁해요 + (외전; 불쌍한 나의 공주님) >

* * *

“에구, 허리야.”

유모가 앓는 소리를 하며 이마를 바닥에 대고 엎드렸다.

“괜찮아요?”

루디가 걱정스레 묻자, 끙끙거리면서도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하지만 이마를 바닥에 댄 채 그러고 있으니 괜찮기는커녕 더욱 아파 보였다.

“우선 어딘가 눕는 게 좋겠어요.”

“착한 아이구나. 나는 괜찮다. 계단을 내려오느라 힘들어서 그래.”

“허리 아픈데 위층에 계세요?”

유모가 끙끙거리며 대답했다.

“하인방은 위층이란다.”

“아무도 없는데 1층에 있으면 되지 않나요?”

유모가 몸은 엎드린 채 머리를 번쩍 들었다.

“그럴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다 우리 마마를 우습게 여겨도, 나만은! 나만큼은 반드시 왕족에 대한 예의를 지킬 거다! 이곳에서는 그저 버림받은 비마마일 뿐이지만, 우리 덴버에서는···!”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 것 같다.

유모의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미안해요. 난 그저···.”

루디가 고개를 숙이자, 유모가 끙, 소리를 내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니, 아이야. 내가 미안하다. 너처럼 어린 아이한테 할 말이 아니었는데···. 우리 마마 처지가 좀 그렇단다.”

유모는 아픈 허리를 주먹으로 톡톡 두드리고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해야겠다. 지금은 너무 아파서···.”

“네, 그런데 제가 해야 할 일은 뭔가요? 그것만이라도 먼저 알고 싶은데.”

“너, 정말 말을 잘하는구나. 내가 오랫동안 유모 노릇을 하고 있지만 너처럼 말 잘하는 아이는 처음 보았다.”

“···.”

“아무튼 다행이다. 시종장님이 엔리코 님 닮은 아이를 찾아 보내준다고 했을 때는 내가 돌봐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와서 정말 다행이구나···한시름 덜었다···끙···아이고 허리야.”

루디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엔리코 님이면···황자님인가요? 왜 황자님 닮은 아이가 필요한가요?”

“비마마께서 찾기 때문이란다.”

유모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비마마는 때때로 엔리코 황자님을 찾아 여기저기를 헤매신단다.”

온 저택을 찾아도 황자가 없으면 밖으로 나간다.

비마마는 신발도 없이 맨발로 정처 없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녔다.

몇 번이나 그런 일이 벌어졌다.

어떤 때는 마마를 제때 잡을 수 있지만, 때로는 유모의 동작이 느려 놓치거나 다른 일을 하느라 보지 못할 때 나가버리는 일도 있었다.

그러다 몇 번은 하루 내내 찾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유모 혼자서는 어쩔 도리가 없어서 발만 동동 구르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시종장이 도움을 준 일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시녀나 호위 기사가 배정되는 일은 없었다.

시종장에게 부탁 해봤지만, 후궁의 모든 일은 황후의 결정에 따른다.

시종장이 시녀를 따로 넣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비마마를 모시고자 하는 시녀를 찾을 수도 없었다.

나디아그라 첩비를 모시던 시녀 몇 명이 억울한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히는 일이 반복되면서, 아무도 이곳으로는 오고 싶어 하지 않았다.

결국 시종장은 골머리를 앓다, 비마마가 밖을 헤매는 일이라도 없애고자 황자 닮은 노예를 찾아 이곳에 보낸 것이다.

아들을 잃은 첩비를 황제가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어린 노예 한 명 보내는 정도는, 황후도 반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네가 할 일은 그저 비마마의 곁에 머무는 거란다.”

“···.”

루디는 유모가 모르게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냥 곁에 있으라고 말하지만, 여기 상황이 너무 한심해 보였다.

첩비도 공주도 말랐지만, 유모도 만만치 않게 말라있다.

자신이 먹을 거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이 아기의 상황부터 절망적이다.

이러다가는 연약한 공주는 며칠 되지도 않아 죽어버릴 거다.

팔힘이 약해서 공주가 약간 흘러내렸다.

루디는 무릎을 세워 아기의 몸을 지탱하면서 유모에게 물었다.

“근데···공주님은 왜 이렇게 마르셨나요?”

“···그건···.”

유모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모두 황후 탓이란다. 처음에는 공주님도 토실토실 굉장히 귀엽게 살이 오르셨단다. 하지만 황후가···.”

유모가 억울한 듯이 입술을 깨문다.

그 동안 아무에게도 억울한 일을 말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유모는 어린 루디를 상대로 줄줄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유모 왈, 공주에게 젖 주던 보모를 다른 후궁에게 빼앗겼다고 한다.

다른 후궁의 젖보모에게 젖이 모자라다는 이유였다.

며칠만 젖보모를 빌린다고 하더니, 그녀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모두 황후 마마의 짓이다. 그 지독한 황후가 황자님을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말을 하다 말고 유모가 흠칫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루디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강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것 같다.

첩비가 사랑 받다 황자를 낳자 독살이든 뭐든, 손을 써서 죽인 거겠지.

비마마가 정신 이상이 된 것도 아마 그 탓 일거다.

“젖보모가 없어진지 얼마나 됐나요?”

“꽤 오래 되었지. 올 봄이었으니···.”

“···.”

공주는 작년 겨울에 태어났다고 한다.

지금은 가을이다.

아기는 이제 겨우 돌이 될까 말까한 나이였다.

젖을 못 먹는 동안은 뭘 먹였냐고 묻자, 말도 안 되는 대답이 돌아왔다.

구운 고기를 잘게 썰어 물에 불려서 주거나, 삶은 콩을 으깨서 주었다고 한다. 때로는 빵을 스튜에 적셔 주기도 했다고···.

푹푹 끓였느냐고 물어보자, 유모는 마도구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끓이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안 돼. 이 사람에게 공주를 맡기면 정말로 죽겠다.

봄에는 아직 백일을 갓 넘긴 아기였을 것이다.

그런 아기한테 고기 불린 걸 먹게 하다니,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게 기적이다.

평생 아기 따위 길러본 적 없는 루디조차도 아기한테 그런 걸 먹이면 안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한동안 비마마가 얼마나 억울하게 살아왔는지 이야기하던 유모는, 힘 빠진 로봇처럼 기진맥진하여 위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다 쉬고, 끙끙거리면서 다시 올라간다.

저렇게 올라가다가는 하루 종일 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루디는 언제 깨어나 황자를 찾을지 모르는 비마마 때문에 아래층에서 기거하기로 했다.

그의 거처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근처다.

계단 뒤편으로는 음식 창고로 쓰이는 공간이 있는데, 그 근처에서 마음에 드는 곳을 정하면 된다고 했다.

유모가 올라가자, 건물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아기는 여전히 루디의 손가락을 빨고 있다. 마치 그것이 없어지면 죽는 것처럼 열심이다.

쪽쪽 손가락 빠는 소리가 등불 일렁이는 공간으로 작게 퍼졌다.

“공주님, 뭐라도 먹어야지. 이러다 죽겠어요.”

아기한테 작게 말하고, 엉거주춤 일어났다.

빼빼 마른 공주님은 여전히 손가락 삼매경인데, 이대로는 움직일 수 없다.

살짝 손가락을 빼자, 아기가 입을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점점 얼굴 전체가 일그러진다.

이대로 두면 아무래도 울 것 같아서, 루디는 얼른 손가락을 아기 입에 다시 넣었다.

공주는 이제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작은 손으로 그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하아···.’

애처롭기는 한데, 이대로는 앞날이 구만리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은 먹을 게 뭐 있는지부터 살펴본 다음에, 죽 같은 걸 만들어 이유식으로 먹여야겠다.’

한데 유모의 말로는 마도구를 사용해야 한다던데, 어떻게 하면 사용할 수 있는 걸까.

유모가 알고 있는 건 그저 마도구에 마력을 공급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장작이 있으면 좋겠지만, 벽난로에 넣는 장작은 열흘 쯤 전에 떨어졌다고 한다.

황후의 눈치를 보기 때문인지, 아니면 중간에 누군가가 착복하고 있는 건지, 음식도 비품도 항상 적게 지급되고 있다고 했다.

우선 아기한테 뭘 먹인 뒤에는 재고 확인을 하자.

부라도프가 부족한 걸 공급해준다고 했지만, 이런 상황을 보면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할 거다.

기회 있을 때 한계까지 받아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루디는 한 손은 아기 입에 물리고, 다른 손으로 아기를 안은 채 질질 끌다시피 해서 부엌 쪽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마도구는 어쩌지.’

유모가 말하는 걸 보면, 마도구만 사용할 수 있어도 생활의 질이 확 올라갈 것 같은데, 마력 공급하는 방법을 모른다.

본래는 후궁에서 사용하는 마도구는 마력이 다 떨어질 때쯤 수거하고 새로운 걸 지급해준다.

그리고 다시 마력이 떨어질 무렵 다시 교체하는 식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황후의 미움을 받는 이곳에는 한 번도 교체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사용할 수 있는 마도구가 거의 없어, 등불조차도 아껴 써야 하는 형편이다.

‘나, 태어날 때부터 마력은 엄청나게 많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코레아 왕조라서 인지, 아니면 와토린구 공작가 핏줄이라서 인지는 몰라도, 태어날 때 엄청난 마력 소유로 소문이 났다고 들었다.

그런 마력이 있으면 어떻게든 되는 게 아닐까?

“···.”

기수련하는 것처럼 단전이 어쩌고저쩌고 해서, 마력을 몸속에서 한 바퀴 돌려 넣는 걸까?

아니면 무협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장풍 날리듯이?

왠지 웃기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기가 작은 이빨로 그의 손가락을 앙, 물었다.

뭔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빨아도 없으니까 화가 난 것 같다.

“성깔 있는 공주님이구나.”

그래, 그 정도로 성 낼 수 있다면 앞으로 살아날 수 있다.

“공주님, 앞으로 잘 부탁해요.”

작은 앞니에 물리면서, 루디는 빙긋 웃었다.

아, 근데 조금 아프다.

* * *

[외전 ; 유모의 작은 공주]

지금은 폐가처럼 변했지만, 한때 이 황량한 곳에도 영화(榮華 )가 머물던 시기가 있었다.

이곳은 폐하께 가장 사랑 받는, 아름다운 첩비가 사는 곳.

꽃에 나비가 날아와 앉듯, 폐하의 걸음이 멈추지 않는 장소였다.

황제의 명으로 각지에서 아름다운 꽃이 모여, 봄이면 이 저택의 주위에 흐드러지게 피었다.

여름이 되면, 황제는 첩비가 좋아하는 과일을 들여와 손수 입에 넣어주곤 했다.

아들보다 어린 첩비의 사랑스러움에, 황제는 몸이 달아 보석을 선물하고 사랑의 말을 구걸했다.

능수능란한 남자의 감언이설에 외로운 공주가 함락되는 건 금방이었다.

열 두 살 어린 나이에 인질로 시집와, 후궁에서만 지내던 어린 공주는 사랑을 했다.

열렬한 구애가 언제까지고 계속될 거라고, 후궁 밖 세상을 모르는 어린 새는 그렇게 믿으며 사랑에 침식되었다.

어쩌면 그걸 막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12살의 공주가 유모와 함께 제국에 도착했을 때, 얼굴 한 번 봐주지 않았던 황제였다.

황제는 따뜻한 말 한 마디 보내지 않고, 그대로 공주를 후궁 깊은 곳에 들여보냈다.

열 여덟 살이 되어 황궁 연회에 처음 나올 때까지, 공주는 황제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매정한 황제가 언제까지고 공주 만을 사랑해 줄리 없다

하지만 순수하게 웃는 그 얼굴을 보고 어찌 말할 수 있었을까.

유모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손에서 큰 공주가 밝게 웃을 때마다 입밖으로 나오는 말을 삼켰다.

[유모, 오늘은 폐하께서 꽃을 주셨어. 나를 닮았다 하시면서 내 머리에 꽃을 꽂아 주셨다.]

환하게 웃는 공주가 꽃 같다고 생각했다.

보석보다는 황제가 손수 건넨 꽃 한송이를 더 아끼는 공주가, 유모의 눈에는 환한 태양처럼 보였다.

하지만 화려하게 핀 꽃은 언젠가 지는 법이다.

공주가 황자를 임신한 동안, 왕의 사랑은 또 다른 후궁으로 옮겨갔다.

그것 뿐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차라리 그때 여자아이를 낳았다면, 공주는 황제에게 잊혀졌을지언정 황후에게 미움 받는 일은 없었을 텐데···.

태어난 황자에게 마력이 있었던 것도 좋지 않았다.

공주보다 나이가 많은 황태자는 겉으로 마력소유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마력이 거의 없는 수준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마력 있는 황자가 태어나자, 결국 공주와 엔리코 황자는 황후의 눈엣가시가 되었다.

어느 날, 공주의 눈앞에서 황자가 피를 쏟으며 절명했다.

황자의 작은 몸이 고통스럽게 뒤틀리는 모습을, 공주는 그대로 눈앞에서 보았다.

쿠키에 독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공주를 모시는 시녀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 사건을 수사하고 지휘한 사람은 황후의 측근이었다.

그래도 한 때 다른 후궁을 출입하던 황제가, 그 일로 다시 공주의 처소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황제의 용안을 뵙는 걸로, 잠시동안은 공주도 안정을 찾는 것 같았다.

공주가 임신했어도, 지난번과 달리 황제는 부지런히 그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아가 태어나기 전까지, 황제의 사랑은 다시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생각하면, 황제는 마력 소유의 아들이 갖고 싶었던 것뿐이다.

딸이 태어나면서 황제의 걸음이 그길로 뚝 끊어지고, 공주의 착란이 시작되었다.

공주는 자신이 딸을 낳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 뒤로, 이 작은 저택은 찾는 이 아무도 없는, 잊혀진 곳이 되었다.

황제도, 황후도, 이제는 더 이상 버려진 첩비에게는 신경 쓰지 않았다.

외로운 저택에 갇혀, 유모의 작은 공주는 언제까지나 폐하를 기다리며 사랑하는 아들의 모습을 찾아 헤맨다.

‘불쌍한 나의 공주님.’

은색의 목걸이를 한 노예 아이가 조금이나마 비마마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으면 좋겠다.

유모는 황후에게 끌려가 매를 맞은 뒤부터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몸을 침대에 뉘였다.

‘부디 내 공주님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를···.’

매일 하는 짤막한 기도를 신께 바치면서, 유모는 눈을 감았다.

< 공주님 앞으로 잘 부탁해요 + (외전; 불쌍한 나의 공주님)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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