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마마와 공주님 >
* * *
“···폐하···. 오시지 않아 그리웠사옵니다···폐하···.”
등잔불이 일렁이며 붉은색의 파티션을 비춘다. 파티션 너머의 공간에서, 발자국과 함께 질질 끄는 옷자락 소리가 들려왔다.
루디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기는 여전히 루디의 손가락을 빨고 있다. 빼내 보려고 했지만 아기가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너무 힘을 주면 다치게 할 것 같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루디는 엉거주춤 작은 공간에 선 채 침만 꿀꺽꿀꺽 삼켰다.
오물오물, 손가락 빠는 소리가 등잔불을 타고 작게 울렸다.
‘나는 황제의 노예···황제의 소유물. 최악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상대는 정신이 오락가락 한다는 비마마다. 은색 목걸이를 알아봐 줄지 약간 걱정이 되었다.
‘비마마가 어떤 사람인지 한 번 더 물어볼 걸 그랬나.’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터질 것처럼 방방 뛴다.
그리고 마침내, 파티션 너머에서 여자의 발소리가 멈췄다.
하얀 손이 파티션 가장자리를 잡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어둠 속에 붕 뜨는 것처럼 하얗게 보였다.
“···폐하···.”
가냘픈 목소리가 잠자리 날개처럼 파르르 떨리며 우는 것처럼 들렸다.
사락사락 천소리가 들리고, 여자의 얼굴이 파티션 공간을 들여다 보았다.
“···!”
이 세상에 요정이 있다면 아마 지금 눈앞에 있는 여자가 그런 존재일 거다.
루디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예쁘다.’
얼굴이 너무 작아서 눈이 절반 정도 되는 것 같다.
이상하다는 듯이 비마마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누구···?”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른 금발 머리가 등잔불을 받아, 금가루를 뿌리는 것처럼 반짝거렸다.
비마마가 천천히 눈을 깜박인다.
꿈을 꾸는 것처럼 눈빛이 몽롱해졌다.
몇 번 눈을 감았다 뜨면서, 비마마가 중얼거렸다.
“···본 적 있는 것 같은데···너···누구···폐하···폐하···,”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조금씩 눈동자가 또렷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청록색 눈동자가 둥글게 부풀어 오른 것처럼 보였다.
“···리코···.”
문득 비마마가 중얼거렸다.
“···리코...리코···”
비마마가 가느다란 손목을 파티션 안으로 뻗었다.
그를 잡으려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손은 허공에 잠시 멈춰, 가느다랗게 떨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청록색 눈동자에 눈물이 차오르더니 순식간에 흘러내렸다.
“···리코···리코···돌아왔구나···내 아가···리코···.”
리코···.
그게 사망했다는 비마마의 아드님일까.
비마마가 비틀거리며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비마마는 그대로 그의 허리에 두 팔을 감아 끌어당겼다.
“아가, 리코, 돌아와 줬구나. 내 아가···.”
“비마마···저는···.”
“···안 돼···리코···제발 그렇게 부르지 마···리코의 어머니는 나디아에요···황후 마마가 아니야···폐하께서도 그리 하라 말씀하셨다···그러니 제발 비마마라 하지 마···리코···내 아가···제발···.”
어쩌면 비마마의 황자는 모친을 어머니라 부르는 것이 금지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첩의 자식은 배를 빌려 낳은 정실의 아이로 취급하는 일이 있다는 걸, 드라마 같은 데서 본 것 같다.
자신의 작은 몸에 매달려오는 비마마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비마마는 어깨를 움츠리며 두려운 것처럼 바르르 떨었다.
막상 접해보니, 그녀가 얼마나 말랐는지 알 수 있었다.
가느다란 뼈에 살가죽이 약간 덮여 있는 느낌이다.
루디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시종장도 그녀가 자신을 아들로 착각하면 부정하지 말라 했고, 어쩔 수 없다.
루디는 아기한테 손가락을 물린 상태로 작게 말했다.
“···어머니.”
비마마가 루디를 끌어안고 통곡하듯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이끌린 것처럼, 아기도 운다.
작은 파티션 안은 이내 두 여자의 울음소리로 가득해졌다.
‘어쩌지.’
우는 아기도, 우는 여자에도 익숙하지 않다.
애초에 남자는 우는 것과는 전혀 가깝지 않은 존재다. 주먹이 오면 마주 싸우지만, 울면서 다가오면 도망가고 싶어진다.
‘언제까지 우는 걸까.’
이 세상에 와서 가장 큰 난관에 부딪친 느낌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모처럼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는데, 셔츠는 비마마의 눈물과 콧물로 어느새 엉망이 되었다.
한참을 울다 지쳤는지, 비마마의 울음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더 이상은 눈물이 나오지 않는 것 같다.
가끔 꺽꺽거리면서, 비마마가 루디의 몸에 얼굴을 부볐다.
하지만 아기는 아직도 악을 쓰고 있었다.
이제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울다가 탈수라도 되면 큰일이다.
어른과 달리, 아기라는 건 목이 다칠 지경이 되어도 울음을 멈추지 않는 것 같다.
울면서도 루디의 손가락을 떼지 않는 걸 보면, 놀라움을 넘어서 측은해졌다.
“···저···이제 공주님을 좀···.”
루디가 주저하며 말하자, 비마마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공주···?”
눈을 깜박거리며 아기의 모습을 본 비마마의 눈썹이 가파르게 치켜 올라갔다.
“···리코···놓아요···그 아기를 만지면 안 돼···리코는 고귀한 분의 자식이에요···누군지 모를 아이에 닿을 신분이 아니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루디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는데, 비마마가 갑자기 루디를 잡아당겼다.
그 가냘픈 몸 어디에 그런 힘이 있었을까 싶다.
몸이 크게 휘청하면서, 하마터면 반쯤 안고 있던 아기가 침대에서 떨어질 뻔 했다.
루디는 침대에 이마를 부딪치면서 아기를 꼭 끌어안았다.
서둘러 손가락을 빼내면서 아기 이에 걸렸다.
피가 약간 맺힌다.
아픈 건 별 거 아닌데, 혹시라도 아기가 앞니를 다쳤을까 싶어 식은땀이 흘렀다.
아기가 더욱 크게 울면서 악을 쓴다.
비마마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피가···피가···. 리코! 그 아이를 놓아!”
갑자기 미쳐 버린 것 같다.
요정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지고, 하얀 얼굴에 섬뜩한 귀기가 어렸다.
“리코!”
비마마가 루디와 아기에게 달려들었다.
루디는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아기를 자신의 몸 밑에 넣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다.
아기가 이곳에 있는 걸 보면 분명히 비마마가 낳은 걸 텐데 왜 자신의 아이를 몰라보는 거야.
비마마가 루디의 팔을 잡고 미친듯이 잡아당겼다.
긴 손톱이 살을 파고 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덧없이 꺼져버릴 듯하던 여자와 동일 인물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어깨가 빠져 나갈 것처럼 아프다.
하지만 비마마의 몸에 손을 댈 수는 없는 일이다.
루디는 그녀가 하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며, 그저 자신의 몸으로 아기를 덮고 가만히 그 시간을 견뎌냈다.
얼마나 시달렸는지, 비마마도 루디도 기진맥진할 무렵이었다.
누군가가 비마마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외쳤다.
“공주님! 진정하세요. 피는 괜찮습니다. 리코님이 아니에요. 리코님은 안전한 곳에 계십니다. 공주님! 진정하세요.”
루디를 잡아 당기고 흔들던 손에 힘이 조금씩 빠지더니, 마침내 멈췄다.
“···리코가 아니야?”
비마마가 중얼거린다.
루디는 고개를 약간 들어 그녀를 보았다.
숨이 차오른 비마마의 가슴이 크게 올라갔다 내려간다.
비마마는 이상하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리코···.”
그녀를 끌어안고 있던 여자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 아이는 리코님이 아니에요, 공주님. 리코님은 좋은 곳에 계세요. 안전한 곳에. 더 이상 아프지 않습니다. 피도 더 이상은 흘리지 않아요. 리코님은 괜찮아요.”
비마마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더니, 뒤에 있는 여자에게 몸을 돌렸다.
“···유모···. 리코도, 폐하도 없네···리디아가 외로운데 아무도 없어···.”
“제가 있잖아요, 공주님. 괜찮아요. 언젠가 리코님도 만날 수 있습니다. 폐하도···다시 오실 거예요.”
“그럴까.”
“그럼요. 당연히 좋은 날이 올 겁니다.”
“한데···저 아이는 누구야? 저 아기는 왜 여기에 있어?”
“···.”
비마마가 이상하다는 듯이 루디와 아기를 보았다.
유모라는 늙은 여자가 타이르듯이 말했다.
“저 아이는 앞으로 마마를 시중들 노예에요. 황제 폐하가 마마를 위해서 보내신 아이랍니다.”
“···폐하가···.”
비마마가 약간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저 아기는?”
“···그 아기님은 공주님이세요. 기억나지 않으신가요?”
“공주?”
“네. 작년에 마마가 낳으셨어요.”
“거짓말!”
비마마가 크게 소리치더니 아기를 노려보았다.
“나는 공주를 낳은 적이 없다! 저 아이는 가짜야! 황후가···그래, 황후가 보냈구나. 나를 폐하에게서 떼어내려고 황후가 보낸 게 틀림없어. 황후가!”
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표독스럽게 변해갔다.
유모가 비마마를 끌어안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얘야, 공주님을 안 보이는 데로 데려가 다오. 어서!”
“···.”
루디는 허둥지둥 아기를 안고 몸을 일으켰다.
네 살 짜리 몸은 아무래도 힘이 약하다.
안 그래도 비마마에게 시달려 힘이 빠진 루디는 아기를 반쯤 바닥에 끌면서 힘들게 파티션을 빠져나갔다.
유모가 비마마를 잡고 있는지 쫓아오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급하다.
비마마가 아기를 내쫓아야 한다, 황후가 보냈다며 울부짖듯 외치고 있었다.
커다란 원룸 형태지만, 실내는 몇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벽에서 약간 튀어나온 가벽이 커다란 아치형의 형태로 뚫려 있었다.
루디는 그 아치형의 벽 뒤로 가서 몸을 숨겼다.
아기는 계속해서 울고 있다.
‘제발 그만 울어.’
바닥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아기를 안는다.
몸 전체를 이용해서 흔들어봤지만, 네 살 짜리 몸이 제대로 아기를 어를 리도 없다.
아기는 불만스러운지, 아니면 배가 고픈 건지, 어둠 속에서도 알 만큼 얼굴을 빨갛게 만들며 울었다.
루디도 울고 싶어졌다.
“제발···그만 울자···.”
어쩔 수 없어서 손가락을 입에 넣어주자, 조금씩 울음이 가라앉는다.
다시 일심불란, 아기가 손가락을 빨기 시작했다.
간신히 울음은 멈췄지만, 이번에는 너무 불쌍하고 측은해졌다.
‘얼마나 배가 고프면···.’
며칠 뒤에 부라도프가 사람을 보내면, 아기한테 먹일 음식부터 구해달라고 해야겠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등불이 흔들거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유모라는 여자다.
나이가 상당히 많아 보였다.
회색빛의 머리카락은 윤기 없이 부슬거렸고, 얼굴에는 잔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유모는 몸이 안 좋은지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히고 있었다. 한 팔을 뒤로 돌려 허리를 누르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할머니였다.
다리를 약간 절뚝거리면서 다가온 유모가 피곤한 듯 말했다.
“미안하구나. 온다는 말은 들었는데 내가 몸이 아파서 일어나 있지를 못했다.”
유모가 언뜻 아기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아니, 왜 공주님의 싸개를 모두 벗겨 놓았누.”
싸개? 속싸개를 말하는 건가?
아기를 꽁꽁 싸매 놓아서 학대라고 생각했지만, 조금 다른 건지도 모르겠다.
루디는 분노가 표정에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입을 열었다.
“일부러 싸 놓은 건가요?”
“너는 어려서 모르는가 보구나. 아기는 일 년 넘을 때까지는 다 이렇게 싸개로 감아 놓는 거란다.”
일 년? 미쳤나, 이 여자가?
루디는 조금 전까지 아기가 감겨 있었던 싸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건 속싸개 같은 개념이 아니다. 천으로 꽁꽁 두른 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끈으로 묶어 놓았다.
게다가 싸개를 매일 갈아주는 게 아닌지, 대소변 때문에 피부가 짓물러 있었다.
중세 시대에 아기들의 생존율이 형편없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는데, 저래서 그랬던 게 아닐까 싶다.
심지어 방금 유모는 아기를 일 년 동안 묶어 놓는다고 하지 않았나.
안 돼. 이 여자에게 아기를 맡겨 놓으면 반드시 죽는다.
루디는 아기를 한 팔로 꼭 안고 유모를 보았다.
“비마마는 덴버 왕국에서 왔다고 하던데, 거기 관습인가요?”
“그렇단다.”
유모는 허리가 아픈지 등불을 바닥에 놓고 반쯤 엎드려 길게 숨을 쉬었다.
“제가 있던 곳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깜짝 놀랐는데···.”
“그랬구나. 하지만 함부로 싸개를 벗기면 안 돼요. 하아···허리야···.”
“어···많이 아프세요? 앞으로는 제가 공주님을 돌볼게요.”
“···그건 고맙지만, 할 수 있겠니?”
“네.”
“하아···싸개로 매는 걸 가르쳐주마.”
“아니요. 그건 내 손으로는 너무 힘드니까···.”
“그럼 내가 해주···.”
“아니에요. 제가 천천히 배울게요.”
“···미안하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시녀도 한 명 없이 모두 혼자 하려니 힘에 부치는구나. 공주님은 너에게 맡기자.”
유모는 허리가 몹시 아픈지 엎드려서 잠시 숨을 쉬었다.
그리고 고개만 약간 들어 그를 보았다.
“너에게 미리 말해둘 것이 많구나.”
유모는 살짝 안쪽 공간에 시선을 보냈다 다시 루디를 보았다.
< 비마마와 공주님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