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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8화 (18/201)

< 아기 공주님 >

* * *

달리는 마차 안에서, 루디는 지나치는 건물에 시선을 주었다.

후궁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광대한 부지 안에, 수많은 건물이 어우러져 있는 곳이었다.

만나는 건물마다 아름다운 등이 건물의 입구를 밝히고 있다.

은은한 등불 너머로 꽃과 나무가 어우러지고, 그 뒤쪽으로 아름다운 건물의 윤곽이 보였다.

마치 동화에 나오는 공주님의 성 같았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니란다.”

멍한 루디의 얼굴을 보고, 부라도프가 마차를 조종하며 쓰게 웃었다.

황후와 그 자녀가 사는 장소는 황후궁이라 하여 후궁과 다른 장소에 있다고 한다.

후궁에 사는 비빈은 황제가 죽거나 신하에게 내리는 등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한 번 들어오면 대부분의 여자가 그대로 후궁 안에서 삶을 마감했다.

본래 제국 초기에는 한 두 개의 건물에 비빈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황제의 총애나 친정의 후원이 있는 비빈이 새로 커다란 저택을 지어 따로 사는 경우가 생겼다.

그런 건물이 하나 둘 늘면서 어느새 후궁은 거대한 저택과 성으로 가득 찬 미로처럼 되어, 여자들끼리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장소가 되었다.

후궁에 대해 설명하는 부라도프의 목소리는 심히 안타깝게 들렸다.

어떤 비는 성처럼 커다란 저택에서 살지만, 총애도 후원도 없는 빈은 아무도 들러주지 않는 후미진 구역의 작은 건물에서 살다 외로이 죽는다.

또 어떤 비들은 한 건물에 모여 살며, 평생을 서로 미워하고 지내다 죽었다.

지붕 없는 마차를 이리저리 조종해 후궁의 부지를 달려가면서, 부라도프가 씁쓸히 웃었다.

“후궁에 사는 비빈에게는 이 세계가 전부라 더욱 잔인하게 되어버린단다.”

“제가 모실 비마마도 그런 가요?”

“글쎄다.”

부라도프가 힐끔 루디를 보더니 말꼬리를 돌렸다.

“네가 일할 곳은 다른 건물과 많이 떨어진 곳이다. 하지만 그 건물에는 마차가 없어 조금 불편할 게야.”

“···.”

후궁의 부지가 너무 넓다 보니 걸어서 이동하는 일은 거의 없고, 대부분 마차를 이용한다.

그렇지만 비빈에 딸려있는 시녀가 후궁 안에서 마차를 이용할 일은 거의 없다.

후궁에게는 해마다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이 배정 되고, 절차를 밟아 황제의 허락을 얻으면 상인을 후궁 쪽으로 부를 수도 있다.

사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물품은 한 달에 몇 번 일정한 수량이 각 후궁에 지급되었다.

검소하게 산다면 그것 만으로도 이 안에서 지낼 수는 있는 정도의 물량이라고, 부라도프가 설명했다.

매일 먹는 음식도 마찬가지다.

후궁 부지 곳곳에 있는 건물에서 비빈의 음식을 만들어 제공한다.

보통이라면 아무리 후원이 없는 혈혈단신 비빈이라 해도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다.

“하지만 앞으로 가는 처소에는 그런 것들이 조금 모자랄 것이다. 당분간은 내가 조달해주마.”

부라도프의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

“네가 모실 비마마는 덴버 왕국에서 온 공주님이다. 나디아그라 가루리지 님이시지. 너는 그분을 부를 때, 비마마 혹은 나디아 마마라고 부르면 될 것이다.”

묻고 싶은 것이 많다.

왜 루디가 모실 비빈의 처소에는 모자라는 것이 많은지, 그렇게 된 원인은 무엇인지, 만일 적이 있는 거라면 그게 누구인지···.

하지만 몇 번 그런 질문을 할 때마다 부라도프는 은근히 말을 돌렸다.

‘황후의 질투와 괴롭힘이 원인일까.’

가장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몇 년 전에 황자를 잃었다고 했으니, 황위 계승권과 관련된 문제거나 그게 아니면 단순히 황자를 낳은 후궁에 대한 괴롭힘일 것이다.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어느새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한 것 같다.

마차가 멈춰 섰다.

루디는 눈을 깜박거리며 눈앞의 담을 올려다 보았다.

거기에는 주변의 나무와 꽃에 파먹힌 것처럼 보이는 담이 놓여 있었다.

나지막한 담 너머로, 검은 하늘을 지붕에 이고 우두커니 서 있는 건물의 일부분이 보였다.

건물의 왼쪽은 둥근 탑 모양이고, 오른쪽은 직사각형이다.

건물 주변에는 키 높은 나무가 귀신처럼 음산하게 서 있었다.

“시종도 남자인지라, 이 담장 안으로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여기부터는 너 혼자 가야 한다.”

부라도프가 루디의 작은 몸을 번쩍 안아서 내렸다.

“알고 싶은 게 많겠지만 이곳에서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필요한 물건은 며칠 뒤에 인편에 보내마. 하지만 우선 네가 알아둘 것이 있다.”

부라도프가 무릎을 접고 진지한 얼굴로 루디를 바라보았다.

“너는 지금부터 황제 폐하의 노예다. 은색의 목걸이가 그 증거지. 이것이 시종장께서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배려였다는 걸 알아두면 좋겠구나.”

황궁에도 노예가 다수 있지만, 그들 대부분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허드렛 일을 한다.

고귀한 사람의 근처에 노예가 다가가는 일은 없었다.

또한 황궁의 노예는 황족 누군가가 아무 이유 없이 죽여도 상관없는 존재다.

누구도 그들의 죽음을 입에 담지 않은 채 조용히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예외적인 것이 바로 은색 목걸이를 한 노예였다.

그 목걸이는 해당 노예가 황제의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물건이다.

황제의 소유물을 함부로 훼손하거나 다치게 하는 것은 황제 폐하를 모욕하는 짓이다.

때문에 비록 황후라 해도 은색 목걸이의 노예에는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다.

“이 나라가 황제 폐하의 것이라면, 후궁은 황후 마마가 다스리는 세상이란다. 그걸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말하며, 부라도프가 루디의 손에 작은 등과 짐 꾸러미를 건넸다.

“저 건물로 들어가면 된다. 사흘 뒤, 점심 무렵에 다시 이곳으로 나오너라.”

루디의 등을 살짝 밀어준 뒤, 부라도프는 다시 마차에 올랐다.

어둠 속에 루디를 남기고, 그의 마차는 순식간에 먼 곳으로 사라졌다.

루디는 등을 들고 건물의 입구를 보았다.

문은 달려 있지 않았다.

담장과 담장 사이가 그냥 뚫려 있었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자란 잡풀이 입구의 절반 정도를 덮고 있다. 풀 때문에 입구가 막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로 이 안에서 비마마가 살고 있나?’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 같은 느낌이다.

루디는 목 위까지 올라오는 풀을 헤치며 어렵사리 담장 안 공간으로 들어갔다.

조금 걸어가자, 잡풀이 적어지고 대신 투박한 돌이 깔려 있는 길이 나왔다.

돌길은 담장 입구에서 건물까지 이어져 있었다.

타박타박, 등불 하나에 의지해 걸어간다.

등불이 지나갈 때마다 돌 틈 사이로 자란 풀이 그림자를 만들며 흔들렸다.

정글 같은 정원 안쪽에 쥐가 있는지 뭔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으스스하다.

루디는 건물에 도착하자 고개를 높이 쳐들었다.

건물은 제법 높았지만,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다.

창문이 여러 개 있었는데, 모두 두꺼운 커튼으로 덮여 있었다.

창문에 덧창은 있지만 일부가 부서지거나 아귀가 맞지 않아 완전히 닫을 수 없는 것 같다. 날이 제법 추워졌는데도 덧창이 열려 있었다.

루디는 문 중앙에 달려있는 동그란 문고리를 붙잡고 문에 톡톡 부딪쳐 소리를 냈다.

“···.”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문고리로 두드렸지만 묵묵부답이다.

어쩔 수 없이 힘껏 밀자, 끼이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건물 안은 불을 켜지 않아 캄캄했다.

‘부라도프가 내게 등을 준 이유가 있었구나.’

등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건물 안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는 넓었다.

원형의 탑 있는 쪽으로 빙글빙글 돌며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오른쪽은 거주 구역이었다.

원룸처럼 뻥 뚫린 공간이, 중간중간 튀어나온 벽으로 나뉘어 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안쪽 깊은 공간은 침실인 모양이다.

거기에 비마마가 있는 걸까.

루디는 입구에 선 채 약간 망설였다.

이대로 들어가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노예는 밖에서 자야한다든가, 후궁 마마가 있는 안쪽으로 들어가면 안된다는 규칙이 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지?

약간 망설이면서 입구에 서 있는데, 어디에선가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바람 빠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히이···”하며 우는 것 같기도 하다.

설마 귀신인가 싶어 섬뜩해졌지만,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자, 거주 공간 중간 쯤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뭔가를 밟지 않도록 조심해서 안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소리가 나는 곳은 어두운 색의 파티션이 놓여 있는 뒤편이었다.

파티션은 다섯 폭으로 되어 있었는데, 벽과 약간의 공간을 두고 서 있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소리가 조금 크게 들렸다.

“히에···히에···으에···엥···.”

“···?”

소리가 작기는 했지만 꼭 아기 울음소리 같다.

하지만 왜 이런 곳에서 아기 울음소리 비슷한 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파티션은 마치 뭔가를 숨기는 것처럼 벽쪽으로 둥글게 놓여, 도저히 아기의 잠자리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살짝 파티션 안으로 몸을 밀어 넣어 들어가자, 아기 침대 하나가 벽에 딱 붙은 채 놓여 있었다.

“···!”

루디는 자신이 등을 들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아기를 향해 번쩍 손을 들었다.

등불이 흔들리면서 그림자가 춤을 추었다.

“맙소사.”

루디는 작게 말하며 등을 바닥에 놓았다.

침대에는 아주 작은 아기가 누워 있었다.

갓 태어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작다.

아기는 눈을 감은 채 아픈 것처럼 가느다랗게 숨을 쉬고, 생각난 것처럼 가끔 힘없이 울었다.

아기 특유의 포동포동함이 거의 없다. 마른 탓에 눈과 뺨이 쑥 꺼져 있었다.

설사를 했는지, 아기 침대 전체에서 퀴퀴한 냄새가 풍긴다.

무엇보다도 놀란 것은 아기가 옴짝달싹 못하게 미라처럼 천으로 감겨 있었던 점이다.

아기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린넨처럼 빳빳한 천으로 감긴 뒤 끈으로 꽉 묶여 있었다.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다.

“누가 이런 짓을···.”

루디는 서둘러 아기의 끈을 풀기 시작했다.

기저귀나 옷 없이 맨몸에 묶인 탓에 아기의 하반신은 온통 똥과 소변으로 뒤범벅 되어 있었다.

대소변 때문에 살이 짓물러져 있다.

아기가 아프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풀어낸 천의 깨끗한 부분으로 톡톡 건드려 닦는다.

천이 피부를 스칠 때마다 아기가 가냘픈 소리로 울었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아기를 대강 닦은 뒤, 루디는 부랴부랴 부라도프에게서 받은 짐 꾸러미를 열었다.

거기에는 여벌 옷과 몇 가지 일용품이 들어 있었다.

루디는 자신의 셔츠를 꺼내 아기를 감쌌다.

꼬물꼬물 움직이던 아기가 갑자기 루디의 손가락을 꽉 잡았다.

작고 가느다란데 의외로 힘이 세다.

배가 고팠는지, 아기는 루디의 손을 자신의 입에 가져가 물었다.

의외로 아기에게는 위아래 모두 이가 나 있었다.

갓 태어난 아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10개월이나 12개월 정도는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같은 회사 직원이 돌잔치 하면서 아기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때 이가 위아래 모두 네개씩이라고 자랑을 했던 것 같다.

얼마나 못 먹었으면 이렇게 작은 거야.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분노가 일어나, 가슴이 답답해졌다.

손가락을 빼려고 했지만, 아기가 놓지 않았다.

손가락에서 우유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죽을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손가락을 빤다.

어쩔 수 없이 한 손으로 아기를 안아보지만 쉽지 않았다.

네 살 짜리 짧은 팔에는 아기가 아무리 작아도 조금 버겁다.

이리저리 아기를 안으려고 애를 쓰는데, 파티션 너머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 폐하···폐하가 오셨습니까···폐하···폐하구나···폐하···소첩 나디아입니다···폐하···.”

헛소리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어, 어쩌지···.’

후궁의 처소에 아기가 있다면, 그것은 아무리 보살핌 받지 못하는 걸로 보여도 공주님일 것이다.

한낱 노예, 그것도 낯선 노예가 함부로 공주의 몸에 손을 댔다면 맞아 죽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

루디의 몸이 잔뜩 굳었다.

< 아기 공주님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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