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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7화 (17/201)

<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 >

* * *

사방은 조용하다.

등잔불을 받은 새장 안에는 루디의 그림자가 실제보다 몇 배는 크게 드리워져 있었다.

거기에 철장의 긴 막대가 박혀, 마치 인간 꼬치가 된 것처럼 보였다.

의미 없는 것을 알면서도, 루디는 손을 뻗어 새장의 잠금쇠를 만지작거렸다.

초로의 남자가 자물쇠를 잠그지 않은 걸 보면 따로 열쇠가 있는 건 아니다.

손으로 더듬거리자 작게 돌출된 것이 만져 졌다.

두손으로 힘껏 누른다.

찰칵 소리가 나면서 잠금 장치가 풀렸다.

“···.”

하지만 왜 잠겨 있지 않을까.

이상하다.

루디는 문을 열고 가만히 밖을 보았다.

지금 나가면 어떻게 될까?

도망칠 수 있나?

아니, 그럴 수 없다.

그의 목에는 여전히 붉은색이 칠해진 노예 목걸이가 달려있었다.

헐렁하기는 하지만 머리가 분리되지 않는 이상 자력으로는 절대로 빼놓을 수 없다. 목걸이를 빼려면 열쇠가 필요했다.

‘하아···.’

루디는 눈을 감고 숨을 내쉬었다.

노예 목걸이를 한 상태로 도망쳐봤자 더 질 나쁜 곳에 잡혀가는 미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아까 건물에 들어오면서 보니, 사방에 목걸이를 한 하인들이 있었다.

잘 모르긴 해도 단순한 하인이 아니라 경비를 겸하고 있는 노예들이다.

이 작고 허약한 몸으로 그들을 피해 도망치기는 어렵다.

도망친다면 차라리 팔린 다음이 더 가능성 있을법하다.

만일 그가 진짜로 성노예로 팔린다면, 이렇게 투박한 목걸이를 끼워 놓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패션 목걸이로 밀어붙일 정도의 모양새는 될 거다.

‘아직 뭐로 팔리는 건지도 잘 모르는 거니까.’

루디는 눈을 감은 채 크게 숨을 마셨다가 내쉬었다.

지금 당장 도망치고 싶은 심정을 꾸욱 누른 뒤, 다시 새장 안에서 문을 당겼다.

철컹, 소리를 내며 문이 잠기자, 사방은 다시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벽에 걸린 등잔불 타오르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다.

아마 그래서였을 거다.

문득,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문이 열린 곳은 없다.

다만 방안에는 커다란 그림이 몇 개 걸려 있었다.

루디는 시선이 느껴지는 뒤쪽의 그림을 보았다.

아름다운 여인이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채 화원에서 미소 짓고 있는 그림이다.

여자 주변에는 화려한 꽃과 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제일 먼저 여자의 눈을 확인했지만, 그건 확실히 그림이었다.

가만히 그림의 배경을 하나씩 확인해가며 보다, 꽃잎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진짜 사람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

영화를 보면 흔히 나오는 장치다.

다른 방이나 비밀 통로에서 그림의 눈동자를 통해 누군가를 지켜보는 건, 너무 흔해서 놀랍지도 않다. 영화라면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깜박깜박 움직이는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기도 모르게 입을 크게 벌렸다. 소리 없는 비명이 입속에서 맴돌았다.

진짜 네 살짜리였다면 너무 놀라서 심장마비로 죽지 않았을까.

아니, 몸의 나이가 실제 나이였다면 그림의 눈동자를 찾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으려나.

그림 속의 눈동자는 루디와 마주치자 이내 사라졌다.

구멍의 뚜껑을 덮었는지, 그림은 원래의 꽃잎 색깔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방의 문이 열리고 콧수염과 마흔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이 남자가 자신을 구매하러 온 손님인가.

남자의 옷차림이나 분위기는 매우 고급스러워 보였다.

난폭하거나 이상한 버릇이 있는 사람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본인이 아니라 집사나 하인일 가능성도 있지만, 어쨌든 조금 마음이 놓였다.

루디는 시선을 내리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콧수염이 정중하게 손님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보신 바와 같이 매우 똑똑한 아이입니다.”

“그래, 생각보다 훨씬 괜찮군. 외모도 아름답지만, 나이에 비해 머리가 잘 도는구나.”

“그 안에서도 잘 해 나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글쎄, 죽지 않는다면, 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하지만···.”

왠지 불길한 소리가 들려온다.

돈만 많은 배불뚝이 색정 할아범이라는 설정은 사라지는 대신, 살아남기 어려운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가는 모양이다.

손님이 새장을 한 바퀴 빙 돌아가며 루디의 모습을 보았다.

“···.”

그 동안, 루디는 가만히 서서 눈을 내리 깔았다.

‘최악 죽게 되어도, 뭐, 성노리개로 장난감처럼 사는 것보다야 나은가.’

이거나 저거나 한숨이 나오는 일이지만, 이 세상에 온 뒤로 루디는 죽음보다 더 지독한 삶이 있는 것을 보아왔다.

그런 걸 겪는 대신 깨끗하게 죽어버릴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을지 모른다.

손님은 한 바퀴 돌아 다시 루디의 앞에 서더니 입을 열었다.

“몇 살이더냐?”

“네쌀 임미다.”

“···.”

손님은 새장 안으로 팔을 넣어 루디의 턱을 잡았다.

살짝 올려 가만히 그의 눈을 들여다 본다.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공작가 사람이냐?”

다짜고짜 묻는다.

루디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다시 감았다.

껌벅껌벅,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손님을 바라보자, 남자가 히죽 웃었다.

“능청스럽구나. 훌륭하군. 정말 네 살이냐?”

“···네.”

손님이 새장의 문을 열고 손짓을 했다.

루디는 얌전하게 한 발 밖으로 나갔다.

담담하게 남자가 말했다.

“옷을 벗어라.”

“···.”

잘못 생각했었나 보다.

이 손님, 색정 할아범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상황에서 버텨 봐야 별 수도 없고.

루디는 느릿느릿 상의를 벗었다.

살짝 시선을 올리자, 손님은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디도 전생에는 건강한 성인 남자였다.

애욕에 찬 남자의 시선이 어떤 건지는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손님의 시선에 색정적인 면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루디의 마음은 안심하기는커녕 오히려 불길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그에게서 뭘 보고 싶은 걸까. 잘은 몰라도 좋은 것은 아니다.

손님이 시선으로 재촉한다.

루디는 바지를 벗고 맨몸으로 그 앞에 가만히 섰다.

손님은 루디의 몸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 본 것은 배꼽이었다.

어쩌면 이 남자는 그가 공작가의 후계자가 아닐까 의심했는지도 모른다.

문득 경매장 도시에서 처형당했던 전투노예가 생각났다.

어쩌면 노예관의 콧수염은 그 전투 노예의 신분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처형은 자신의 반응을 보기 위한 함정이었을까.

그리고 목걸이를 줌으로써 노예 뿐 아니라 루디도 그 사람을 아는지 확인한 거다.

후계자라는 의심은 버렸을지 몰라도, 콧수염은 루디가 최소한 공작가의 귀족이라는 건 알아차린 게 분명했다.

단순히 호의에서 목걸이를 준 게 아니었다.

‘내가 너무 순진했구나.’

자신의 바보 같음에 기가 막힌다.

‘다시는 이런 실수 하지 않아.’

루디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손님은 세세히 그의 몸을 눈으로 확인한 뒤 손으로 뼈를 더듬었다. 골격을 확인하는 것 같다.

“눈에 띄는 상처도 없고, 말라 보이기는 하지만 영양 상태도 괜찮군. 뼈도 올바르게 자리를 잡고 있고.”

손님이 몸을 일으키더니 콧수염을 보았다.

“이 아이를 데려가지. 소문이 나지 않게 해주게. 지금 카니아 왕국과 날이 서면 곤란해.”

“물론입니다. 이 아이가 와토린구 공작가의 귀족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콧수염이 히죽 웃었다.

“와토린구 공작가는 마력 높은 사람이 자주 태어나는 것으로 유명하니, 필시 이 아이도···.”

손님이 손을 들어 콧수염의 말을 막았다.

“그만 됐네. 이 아이는 그런 용도가 아니야.”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한 말을 올렸습니다.”

콧수염이 당황한 듯 얼른 고개를 숙였다.

모르기는 해도 이 손님은 상당히 높은 신분인 모양이다.

얼마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손님이 콧수염에게 묵직해 보이는 벨벳 주머니를 건넸다.

입막음 가격이라도 들어있었던 걸까.

콧수염의 얼굴에 희색이 도는 것을 보면 생각보다 많은 금액이 건네진 것 같다.

“이 아이의 목걸이를 풀어주게.”

손님의 말에 콧수염이 품에서 작은 열쇠를 꺼냈다.

한동안 목을 구속하던 두꺼운 쇠목걸이가 쩔꺽 소리를 내며 풀린다.

그렇게 거북했는데, 쇠목걸이가 없어지자 이상하게 목이 허전했다. 감각이 이상해진 것 같다.

“이 아이의 목에 어울릴 만한 아름다운 것도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필요 없네.”

“예, 뜻하시는 대로.”

콧수염이 허리를 접으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루디는 그 길로 노예관을 뒤로 한 채 손님을 따라가게 되었다.

노예관 건물 밖에는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다.

문장이나 장식은 없지만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짐칸이나 마부석에 앉게 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손님은 루디를 마차 안에 들어가게 했다.

겉보기와 달리, 안쪽은 굉장히 화려했다.

푹신하고 두꺼운 쿠션이 달린 좌석이 마주 보게 놓여 있고, 벽은 푸른 빛이 도는 벨벳천이다.

이 손님이 귀족이라면 상당히 높은 가문이 아닐까 싶었다.

루디의 옆에는 손님의 종자인지, 부하인지 모를 남자가 딱 붙어 앉았다.

무술을 하는 사람인 것 같다.

경비 대장이나 전투 노예를 보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손님은 맞은 편이다.

그는 마차에 오른 뒤부터 가만히 루디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어디로 가는 걸까.

루디는 창문 쪽에 시선을 주었지만 밖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작은 창에는 두껍고 어두운 색의 커튼이 빈틈없이 늘어져 있어서  밖이 보이지 않았다.

조용한 마차 안에, 말발굽과 바퀴 소리만이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참을 달리던 마차가 멈추자,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

마차에서 내린 루디의 눈이 왕방울만해졌다.

그의 눈앞에는 화려한 궁전이 서 있었다. 와토린구 공작가의 저택보다 크다.

“이쪽으로 오너라.”

손님이 거침없이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복도를 종종 걸음으로 따라들어가자, 바로 뒤에서 마차 안에 함께 탔던 젊은 남자가 따라왔다.

손님은 긴 복도를 한참 걸어 안쪽으로 가더니, 궁전만큼이나 화려한 방 앞에 섰다.

문 앞에 서 있던 제복 차림의 하인이 문을 활짝 열자, 따라오라고 살짝 눈짓을 했다.

방 안에는 손님 만큼 나이를 먹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시종장님, 비마마 시중을 들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시종장?

루디가 아는 시종장이라고 하면 왕을 모시는 사람이다.

‘설마···여기 황궁이야?’

게다가 방금 남자가 한 말에 의하면 루디는 비마마를 모시러 온 것 같다.

노예, 그것도 네 살 짜리가 어째서 왕의 비를 모시게 된 건지 모르겠다.

시종장은 잠시 귓속말로 보고를 듣더니 손짓을 해 그를 불렀다.

가까이 다가가자, 가만히 그의 눈을 쳐다본다.

살며시 시선을 내려 입가에 두자, 시종장이 약간 웃었다.

“밝은 황금 머리와 초록 눈동자라···. 용케 이런 아이를 찾았구나.”

시종장이 중얼거리더니, 루디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이야, 너는 오늘부터 후궁에 계신 비마마를 시중들게 될 것이다. 비마마께서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때가 있으시니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예.”

“그분께서는 불행하신 분이지. 몇 년 전 아드님을 잃으셨다. 너는 돌아가신 황자님의 머리색과 눈을 많이 닮았구나. 혹여 그분이 너를 혼동해 부르시더라도 정정하지 말고 그대로 두거라.”

“네.”

“혹시 필요한 게 있거든 그 사람에게 말하면 된다.”

“감사합니다.”

그를 데려온 남자가 루디를 밖으로 데려가려는데, 시종장이 그를 불렀다.

“아이야, 입에 넣는 음식에는 주의하도록 해라.”

대답을 원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시종장은 그대로 고개를 돌린 채 책상에 가서 앉았다.

루디는 자신을 데려온 손님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손님도 시종장 밑에서 일하는 시종이었던 것 같다.

밖으로 나오자 그가 루디에게 말했다.

“비 마마 처소에는 부족한 것이 많이 있을 게다. 시녀들에게 말해도 구할 수 없다면 나를 찾아라. 내 이름은 부라도프다.”

“예, 알겠습니다.”

이제 어린 아이 말투는 집어치웠다. 그런 척하는 모습으로는 아무래도 이곳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부라도프가 히죽 웃었다.

“후궁은 피 없는 전쟁터다. 네 나이가 어리다 하여 봐줄 사람은 없으니, 살고 싶다면 스스로를 잘 보호해야 할 것이야.”

“···네.”

그 뒤, 루디는 부라도프의 감독 아래, 온 몸을 다시 씻었다.

향유와 백분의 냄새를 모두 떨군 뒤에는 황궁의 하인이 입는 옷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몸에 붙인 건 가느다란 은색의 노예 목걸이다.

쇠사슬을 연결하는 고리가 있기는 했지만, 너무 작아서 장식처럼 보였다.

실제로 쇠사슬을 연결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노예의 신분을 표시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붙은 것 같다.

몸치장을 다 할 무렵에는 밤이 깊은지 한참 된 시간이었다.

루디는 부라도프를 따라 앞으로 자신이 일할 후궁으로 향했다.

<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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