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국으로 + (외전) 전투노예의 마지막 소원 >
* * *
하늘은 아직 캄캄한데, 이른 새벽부터 노예관은 시끌벅적해졌다.
콧수염이 그동안 구매한 노예들을 제국으로 데려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루디는 고급 노예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마차 바닥에는 건초가 깔려 있었다. 날이 추워졌기 때문에 이불 대신인 모양이다.
실제로 건초가 푹신하게 깔린 마차에 올라가자 새벽 추위가 약간 가신 것 같았다.
마차 구석에는 나무로 된 배변통이 한 개 놓여 있었지만, 나무 뚜껑으로 덮여서 냄새가 많이 나지는 않았다.
루디는 반대편 구석에 웅크리고 앉았다.
다른 노예들도 하나둘 자리에 앉는다.
누워서 잘 만큼 공간이 넓지는 않지만, 모두가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한두 명 정도라면 누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이곳에 끌려올 때 탔던 마차와 비교하면 천양지차였다.
노예들의 표정도 이곳에 처음 도착할 무렵보다는 많이 나아져 있었다.
하지만 값이 싼 노예의 마차는 사람으로 빽빽이 들어차 공간의 여유가 별로 없었다.
게다가 고급 노예의 경우에는 목걸이에 연결된 쇠줄이 모두 제거되었지만, 저급 노예의 마차에는 몇 명이 쇠줄을 하고 있었다.
아마 반항할 기미가 있는 노예들인 모양이다.
그들의 목줄은 마차 바닥에 나와 있는 고리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약간의 벌도 포함이 되어 있는지, 목줄이 매우 짧다. 겨우 몸을 구부리고 앉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 때문에 다른 노예의 자리가 더욱 좁아졌다.
덕분에 목줄이 고정된 노예들은 관리자 측 아니라 같은 노예한테도 매운 눈초리를 받았다.
‘저런 것까지 세세히 생각해서 한 일일까.’
만일 그렇다면 무서운 일이다.
‘나에게 이 목걸이를 가져가게 한 것도 순수한 호의는 아니겠지.’
하지만 고작 어린 노예한테 선심을 베풀 이유도 잘 모르겠다.
루디는 손에 쥔 마목걸이를 가만히 내려 보았다.
어제는 밤늦도록 이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마목걸이는 쇠로 만들어져 있지 않았다.
항아리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것 같은데, 반원 형태인 두 개를 붙여 은제품으로 고정하게끔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접합 부위는 공기 하나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밀착되어서, 마치 보이지 않는 뭔가로 코팅되어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노예는 단순한 노예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마목걸이 자체도 비싼 거라고 하지만, 접합 부위의 은제품도 그못지 않게 가격이 나갈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단순히 연결만을 위한 장치가 아니었다. 아름답게 세공되어 목걸이가 돋보이게끔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 걸 평범한 노예에게 붙였을리 없다.
아마 특별한 노예였을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인 공작의 개인 노예였는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을 알아본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크다.
유모의 말에 의하면 루디는 방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
만일 그를 알고 있다면 반드시 공작가의 안쪽까지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공작을 항상 따라다니는 측근처럼.
루디는 한숨을 쉬며 손 안의 마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주인이 죽은 마목걸이는 무용지물이라던 말처럼, 루디 역시 그것을 풀 수 없었다.
혈액 인증이라는 단어가 있었기 때문에 몰래 피도 묻혀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혹시나 싶어서 같이 있는 노예에게 여기 적힌 글자를 아는지 물어보았지만,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노예들은 여기에 적힌 글자를 또렷하게 보지도 못했다.
마목걸이처럼 비싼 물건은 평생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한번씩 들여다보고는 다들 깜짝 놀랐다.
글자의 형체가 보이기는 하는데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는 것 같다. 마치 흐릿한 유리창 너머를 보는 느낌이라고 했다.
처형장에서 들었던 남자의 말을 생각해보면, 마법식은 오직 코레아 왕조만이 읽고 쓸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알 수 없는 게 너무 많다.
준비가 모두 끝났는지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가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기면서, 루디는 눈을 감았다.
마지막 순간 보았던 전투 노예의 눈빛이 계속 마음속에 남는다.
부드러운 시선 가운데에는 애지중지일까 싶을 만큼의 사랑이 담겨져 있었다.
어째서 그는 자신을 그렇게 보았던 걸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모두 떠올리게 되면 그 눈빛의 의미를 알 수 있을까.
덜컹거리는 바퀴 소리가 하염없이 귓가를 때리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살짝 잠이 들었다.
* * *
잠이 깬 것은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 때문이었다.
퍼뜩 눈을 뜨자, 마차는 어느새 멈춰 서 있었다.
루디는 마목걸이를 건초 속에 밀어 넣고 창살에 매달렸다.
최대한 얼굴을 창살에 붙이고 밖을 보자, 루디가 탄 마차 앞으로 다른 상인의 마차가 여러 대 줄을 서 있었다.
고개를 들자 높은 성벽이 바로 앞에서 보였다.
아마 나가는 마차들을 검문 중인 모양이다.
비명소리는 여전히 들려왔다.
무슨 일일까 싶어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게 얼마 짜린데, 당신이 물어낼 거요!”
“비켜! 이 자는 귀족이다! 그냥 귀족도 아니고 귀족 가문의 후계자인 거야.”
“나는 전혀 몰랐어요. 비싼 값을 치루고 산 거란 말입니다.”
“그건 판매한 상인한테 가서 불평해. 당신도 알고 있을 거 아닌가. 디코콰리아 귀족의 당주나 후계자는 이유불문하고 처형이야.”
“하지만 경매장에 있는 노예는 마음 놓고 사도 된다고 말한 것도 당신네 나라의 귀족입니다.”
“거 참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군. 나한테 말해봐야 소용없다고 하지 않아. 나는 상관의 명령을 받고 그대로 할 뿐이라구. 귀족을 놔주면 오히려 내가 죽을 판이야. 저리 비켜!”
비명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병사에게 머리카락을 붙잡힌 채 질질 끌려가는 청년이 보였다.
청년은 뭔가에 찔린 듯 다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찢어진 옷 사이로, 가슴 중앙에 가문의 문장이 보인다. 그것을 보고 귀족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오싹해졌다.
와토린구 공작이 미리 마녀의 약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루디의 배꼽 밑에도 비슷한 문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런지···.
루디는 숨을 죽였다.
청년이 질질 끌려 루디의 마차 근처까지 왔다.
그 청년을 쫓아 달려온 상인이 병사를 붙잡고 화를 내더니 다시 애원한다.
그래도 안 되자, 내가 아는 귀족이 몇인데 이런 횡포냐며 협박을 했다.
하지만 대장으로 보이는 병사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부하에게 청년을 끌고 가라고 명령한 뒤, 아우성치는 상인을 무시하고 다음 마차로 향했다.
이미 다음 마차의 노예도 병사들의 확인이 끝난 모양이다.
부하들이 이상없다고 보고하자 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디의 앞에 있던 마차 행렬이 서서히 움직여 문을 빠져나간다.
그 뒤는 루디들의 차례였다.
병사들이 루디가 있는 마차로 다가온다. 햇빛을 받아 창날이 번쩍거렸다.
자신에게 후계자의 증거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루디의 몸이 움찔 굳었다.
언제 왔는지, 콧수염이 마차 앞으로 다가와 대장에게 말을 걸었다.
“소란스러운 사람이군요. 못보던 자인데 근래에 새로 참가한 상인인 모양입니다.”
콧수염의 말에, 대장이 입술 끝을 비틀며 씨익 웃었다.
“아아, 저 사람은 오자마자 말썽입니다. 관리들 하고도 매끄럽지 못한 것 같고, 뭐, 우리 같은 말단 병사하고야 말을 섞으려고도 하지 않아요.”
“허허, 그렇습니까. 고생이 많으십니다.”
두 사람이 말을 하는 사이, 노예 마차의 문이 활짝 열렸다.
병사가 안으로 들어와 한 바퀴 돌며 노예들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진짜로 보기만 한다.
잠시 마차 안에 들어와 머물던 병사가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고 그냥 나가자, 호위 무사들이 문을 잠갔다.
다른 마차도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은 마차 안에 들어가서 얼굴만 확인하고 그냥 나왔다.
대장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지난 번에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집사람이 좋아했어요. 대상인이나 귀족님들이 먹는 거라며 기뻐하더군요.”
“부인이 기꺼워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 지방의 꿀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 거지요.”
두 사람은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콧수염이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며 손을 내밀 때, 손바닥에서 뭔가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악수를 하면서 대장의 손으로 넘어갔다.
반짝거린 건 어쩌면 금화였을까.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제국 상인 소유의 마차는 모두 아무 문제 없이 성문을 빠져나갔다.
한없이 졸아 들었던 심장이 제자리를 찾아 움직여갔다.
루디는 창살에 얼굴을 기대고 길게 숨을 쉬었다.
씨앗이 꽃이 되고 구름이 비가 되듯이,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은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다.
‘이세상이고 저세상이고, 지구고 별세계고 간에, 역시 뇌물이 최고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구나.’
문득 하늘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왜 웃는지도 모르면서, 루디는 한동안 키득거렸다.
마차 안의 노예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멈출 수 없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놈의 세상.
* * *
[외전; 전투 노예의 마지막 소원]
나는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다.
어떤 이는 노예의 처지가 불행하다던가, 그토록 비참한 일은 없다고 말하지만, 내게 노예라는 신분은 자랑스러운 것이다.
내 몸은 주인의 신체를 지키는 방패요, 내 팔은 주인의 적을 무찌르는 검.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들어온 내게, 전투노예의 삶은 한치의 의심도 없는 운명이었다.
가장 뛰어나게 되어라.
가장 충성심 깊은 자가 되어라.
주인을 위해서는 목숨도, 가족도 버릴 수 있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
아버지의 말은 내게 삶의 지침이었다.
그 말을 이루기 위해, 나는 죽을 만큼 노력했다.
그리하여 공작가 특유의 마목걸이를 받게 된 것이 열 한 살이었다.
대부분의 전투노예는 제어를 위해 마목걸이를 한다.
하지만 공작가에서는 가장 뛰어나고 충성심 깊은 전투 노예에게 특별한 목걸이가 주어졌다.
공작가의 문장이 은으로 새겨진 마목걸이다.
귀족은 가문의 문장을 아무 곳에나 넣지 않는다.
그것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은, 그 노예가 매우 특별하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다.
비록 노예지만, 공작가 문장이 찍힌 노예는 그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다.
건드릴 수 없다.
누군가가 그 노예를 훼손하면 공작가에서 보복이 들어갈 테니까.
공작가에서도 그 목걸이를 받은 노예는 다섯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 다섯 명에는 와토린구 공작의 가장 뛰어난 전투 노예이자, 호위인 아버지가 들어가 있었다.
나는 목걸이를 받자마자 공작의 말단 호위가 되었다.
그리고 후계자 에드에루 님이 태어난 날, 나는 그분의 첫 번째 전용 호위가 되는 것이 정해졌다.
아직 작고 어리신 에디에루님이 당신의 방을 나오는 네 살이 되면, 내 목걸이의 주인은 바뀐다.
대신 목숨을 버릴 노예가 누구라도 있는 공작님과 달리, 에디에루님께는 나 혼자 뿐이다.
오직 나만이 그분의 곁에 머물며, 그 사랑스러운 목숨을 지킬 것이다.
그 기간이 한정되어 있고, 에디에루 님께는 이후 수많은 호위와 노예가 생길지라도, 주인의 첫 노예가 나였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것은 내게 매우 감미로운 것이었다.
딱 한 번, 공작님의 허락을 얻어 에디에루님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먼 발치에서 잠깐 보았을 뿐이지만, 그 모습은 평생 기억에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방 안에 쏟아져 내리는 햇살과 반짝이는 칠흑의 머리카락.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깊은 암흑의 눈동자.
에디에루님을 보는 순간 머리에 번개가 내린 것 같았다.
그토록 아름다운 칠흑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이 없다.
내 주인, 나만의 주인님.
나는 언젠가 내 모든 것이 에디에루 님의 소유가 되는 날을 계속 기다려왔다.
그 날이 멀지 않았을 터인데, 이제 곧이었는데,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가증스러운 적 카니아가 제국의 개가 된 탓이다.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전쟁은 우리 나라 쪽이 조금씩 우세해지고 있었다.
에디에루 님이 공작이 되는 시기 쯤에는 완전히 적을 멸망시킬 수 있을 거라고 모두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국이 적에 가세하면서 힘의 균형이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렸다.
제일 먼저 죽은 것은 아버지였다.
공작에게 쏟아지는 화살을 몸으로 막아, 주인의 목숨을 구한 뒤 화살 꼬치가 되어 절명했다.
아버지다운 죽음이었다.
공작의 위기를 눈치채고 전투 노예와 무관들이 모두 그분께 몰려갈 때, 나는 말 한 마리를 낚아 채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배신자라고 생각했을 수도, 겁쟁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 내 머릿속에는 오직 내 어린 주인 에디에루 님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목걸이로 고통을 주지 않았던 것을 보면, 공작님도 내 마음을 알았던 게 아닐까 싶다.
어쩌면 동료들도 알았을 것이다.
아무도 나의 앞을 막거나 죽이려 하지 않았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무작정 달렸지만, 적의 눈을 피해 도착한 성에 에디에루 님은 없었다.
성은 파괴되고, 후계자는 죽었다는 소문만 무성하게 들려왔다.
그 뒤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속이 비어진 껍데기처럼 누가 발로 차면 맞고 욕을 하면 가만히 들었다.
주인을 지키지 못한 개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더 때리고, 더 모욕하고, 더 아프게 해줬으면 하고 바랐다.
부디 편안한 죽음을 주지 말기를, 더 고통스러운 최후를 달라고 마음 속으로 빌었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의 날, 나는 눈물이 날 것처럼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
나의 주인은 살아있었다.
* * *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너무 늦게 당신의 곁으로 갔지요.
이제 너무 빨리 당신을 떠나니, 나의 죄를 어찌 보상하면 좋을까요.
그 곁을 떠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텐데, 노예로 태어난 나는 그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이제 떠나면 다시 만날 날 없을 테지요.
미천한 종은 죽음에 이르러 신께 빕니다.
나의 주인님, 부디 당신의 앞날에 축복이 가득하기를···.
< 제국으로 + (외전) 전투노예의 마지막 소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