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2화 (12/201)

< 경매장 >

* * *

부드러운 베개의 감촉을 느끼며 얼굴을 묻는다.

어딘가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일어나! 늦었어!”

아니, 조금만 더···.

이상한 꿈을 꾼 뒤라 이 포근함을 조금 더 느끼며 마음을 치유하고 싶다.

중세같은 이세계에 가서 노예가 되는 꿈이었다.

아아, 정말, 어쩌다 그런 괴상한 꿈을 꾼 걸까.

뭔가 그런 류의 소설을 보았었나?

아니면 영화?

어쨌든 기분이 좋지 않은 꿈이었다.

“어서 일어나지 못해?”

어머니가 화가 난 것 같다. 목소리가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어,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다.

어머니가 왜 집에 있어?

자취를 시작한 게 벌써 몇 년인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누군가가 배를 걷어찼다.

엄청난 고통에 눈을 번쩍 뜨자, 흐린 불빛을 등 뒤에 인 남자의 발이 보였다. 그 남자의 발에 걷어 차인 것 같다.

‘아!’

꿈이 아니었구나.

이세계로 갔던 건 꿈이 아닌 현실이다.

그걸 깨닫자마자, 루디는 벌떡 일어났다.

내장이 뒤틀리는 것처럼 배가 아팠지만 이를 악물었다.

이런 건 군대에서 선임한테 맞을 때와 똑같다. 소리 내거나 울어서는 안 된다.

루디는 고통을 참으면서 차렷자세로 남자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그것이 주효했던 모양이다.

남자는 더 이상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경매장으로 간다.”

남자가 무뚝뚝하게 말하고 루디의 손목에 밧줄을 묶었다.

그 밧줄을 같은 우리에 있는 여자애와 길게 연결해 묶는다.

굴비처럼 엮인 채 우리 밖으로 나가자, 오늘 경매에 가는 노예들이 줄줄이 끌려 나와 있었다.

대략 열 명 정도 되는 것 같다.

루디나 여자아이와 달리, 그들은 모두 목과 두 손에 쇠사슬이 걸려 있었다.

손의 쇠사슬은 다시 뒷사람, 또 그 뒷사람과 연결되어 있다.

맨 처음의 사슬은 쇠목걸이 남자가 쥐고 있었다.

노예의 긴 줄 양옆에는 쇠목걸이 남자가 한 명씩 서서 노예를 감시했다. 쇠목걸이 남자들의 손에는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자, 움직여! 걸어라!”

쇠목걸이 남자들이 으르렁거리듯 말하며 거칠게 쇠사슬을 잡아당긴다.

쇠사슬에 엮인 노예들이 비틀거리며 걸었다.

그 뒤를 루디와 여자아이가 따른다. 두 사람의 밧줄은 줄 옆에 서 있던 쇠목걸이 남자가 잡았다.

천막 안을 밝힌 횃불이 흔들릴 때마다, 노예들의 그림자도 함께 움직였다.

실물보다 두어 배는 커다란 그림자가, 괴물처럼 천막과 철창 위를 걸어갔다.

천막 밖은 여전히 캄캄했다.

그리고 춥다.

차가운 공기에 접하자, 자기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조금 걷자, 다른 노예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들 쇠사슬에 연결되어 있다.

루디와 일행이 짤그랑 소리를 내며 걸어가는 동안에도, 여기저기의 천막에서 노예들이 나왔다.

한 줄로 엮인 노예들이 시체 같은 눈을 하고 같은 방향을 향해 걷는다.

그것이 마치 좀비의 행렬 같다고 생각했다.

천막이 연이어 있는 공간의 통로를 이리저리 꺾어지며 한참 걷자, 다른 곳보다 횃불이 많이 밝혀진 천막이 하나 나왔다.

아마 그 천막이 경매장인 모양이다.

천막 앞에는 길게 통로가 나있고, 양 옆으로는 철장이 죽 늘어서 있었다.

끌려온 노예들은 모두 그 철장 중 하나로 들어갔다.

루디를 끌고 온 쇠목걸이 남자들은 노예끼리 연결되어 있던 손목의 쇠사슬을 푼 뒤, 한 개의 철장 안에 모두를 밀어 넣었다.

쇠목걸이 남자들이 철장을 잠그고 그대로 문 밖에 섰다.

어느새 날이 조금씩 밝아오기 시작했다.

철장에 들어가는 노예들의 숫자가 많아지고, 점차 손님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몰려왔다.

조용하던 공간도 점점 시끄러워졌다.

대부분의 철장이 노예로 채워질 무렵, 경매가 시작된 모양이다.

손님들이 천막 안으로 들어가고 밖이 썰렁해졌다.

하지만 모든 손님이 안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몇몇은 경매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 놓인 철장을 둘러보았다.

그중 한 명은 어제 보았던 상인 중 한명이었다.

상인은 종자를 몇 명 데리고 돌아다녔는데, 주로 아이만 확인하고 있는 듯 했다.

루디가 있는 철장 근처에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있자, 잠시 멈춰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어제 못 본 아이로군.”

상인이 철장을 지키고 있는 남자에게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다고 말하자, 남자가 구석에 있던 아이를 철장 가까이로 불렀다.

상인은 아이에게 한 바퀴 돌아봐라, 입을 벌려라, 두 손을 위로 들어봐라, 등 여러 가지 주문을 했다.

아이가 쭈삣거리며 제대로 명령을 따르지 못하자, 철장을 지키던 남자가 문을 열고 아이를 끄집어 냈다.

겁에 질린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몸을 얽어매고 있는 쇠사슬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아이 몸에 비해 크고 무거운 쇠사슬이 쩔렁 소리를 내며 철장에 부딪쳤다.

어른과 달리 어린아이는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더 맞는다는 걸 알아도, 위축되면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게 아이다.

경매가 있기 때문인지 몽둥이로 맞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남자의 커다란 손에 잡힌 채 몇 번이나 거칠게 흔들렸다.

루디는 자기도 모르게 한 발자국 나갔다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자신도 철장에 갇힌 처지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상인은 아이가 우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을 움켜쥐더니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상인이 아이를 놓고 됐다고 말하자, 남자는 다시 아이를 철장 안에 가두었다.

상인은 천천히 걸어 루디가 있는 철장으로 오더니 그를 향해 손짓했다.

루디가 앞으로 나가서 공손히 절하자 상인이 히죽 웃었다.

“역시 네가 제일이구나.”

상인이 하라는 대로 한 바퀴 돌고 얼굴을 위로 든다.

상인은 철장 너머로 몇 번이나 루디의 얼굴을 꼼꼼히 확인한 뒤 떠나갔다.

함께 온 노예들 중에서 가장 먼저 경매장으로 들어간 것은 여자들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남자들이 경매장으로 끌려갔다.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팔렸는지, 안 팔렸는지, 누구에게 얼마에 팔렸는지, 그런 것들은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번 나간 노예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철장 안에는 루디와 열 살 가량의 여자아이만 남았다.

해가 하늘 높이 떠오르고, 다시 기울어간다.

햇빛은 아직 남아있지만 조금씩 기온이 낮아진다고 느낄 무렵, 루디와 여자아이의 차례가 되었다.

루디는 쇠목걸이 남자를 따라 경매장 천막의 뒤쪽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다른 아이들이 스무 명 가량 서 있었다.

아까 근처의 철장에서 울던 아이도 있다.

대략 여섯 살 정도부터 열 두어 살 정도로, 대부분 여자아이였다.

쇠목걸이 남자들은 루디와 열 살 여자아이를 경매장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넘긴 뒤, 천막 밖으로 나갔다.

이제부터는 경매장 사람들이 노예를 책임지는 모양이다.

루디는 경매장 안에 시선을 주었다.

경매장 안은 높은 단상과 손님이 앉는 객석으로 나뉘어 있었다.

빈 의자가 없을 정도로, 객석은 사람으로 꽉 차 있다.

단상 위에서 사회자가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 여러분, 이제 마지막 순서 입니다. 오늘은 그야말로 최상급의 아이들만을 골라 여러분께! 오직 오늘 오신 손님에게만 구매할 기회를 드립니다.”

아이들은 경매장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단상 위로 올라갔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온 아이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최상급 소재입니다. 자, 여러분! 돈 주머니 끈을 푸시고 잘 봐주십시오. 오늘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이런 아이들을 한 자리에서 보지 못합니다!”

사회자가 큰 소리로 침을 튀기며 말하는 동안, 진행요원이 아이들을 횡으로 세운 뒤 차렷 자세를 하도록 만들었다.

사회자가 손가락으로 제일 오른쪽에 서 있는 여자아이를 가리키자, 진행요원이 그 아이를 앞으로 데리고 나갔다.

“이 사랑스러운 용모를 보십시오. 이 아이는 필시 빼어난 용모로 자라겠지요. 이 아이는 삼 년 만 있어도 제국 금화 한 두 장의 가치는 충분히 나올 겁니다. 자, 자, 지금이 아니면 구입할 수 없는 염가로 들여가세요! 10리리부터 시작합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객석에서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10리리 나왔습니다. 20리리, 아, 저쪽 분이 20리리 부르시는군요. 40리리 없습니까! 오, 40리리 나왔습니다. 50리리 없습니까?”

사회자가 객석을 향해 외친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후회합니다. 50리리, 50리리 부를 분은 안 계십니까!”

그 아이는 결국 40리리에 팔렸다.

그다지 높은 가격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음 아이는 60리리, 그 다음은 50리리였다.

아까 밖에서 울던 아이는 30리리, 남자애라서였는지 가장 낮은 값에 팔렸다.

구매자는 아이를 꼼꼼하게 살피던 상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루디의 차례가 되었다.

사회자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자, 이제 마지막 순서가 되었습니다. 이미 이 아이를 보신 분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매우 특이한 상품을 소개합니다. 저도 오랫동안 사회를 보아왔지만, 이런 아이는 처음이라지요.”

사회자가 루디쪽을 향해 과장되게 두 팔을 펼쳤다.

“이 아이의 모습을 보아 주십시오. 화려하게 반짝이는 황금색 머리카락, 깊은 바다를 연상케 하는 초록 눈동자! 눈처럼 하얀 피부색! 귀족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만큼 관리가 잘 되어 있는 아이입니다.”

진행요원이 루디를 한 바퀴 빙그르 돌렸다.

“하지만 이 아이의 진정한 가치는 외모가 아니라는 사실, 믿을 수 있습니까! 이 아이는 네 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고급 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말투도, 행동도 더할 나위 없지요.”

사회자는 계속해서 돈이 많이 드는 고급 교육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 지를 설명했다.

“이 아름다운 아이는 어릴 때는 귀족 도련님과 공주님의 놀이 상대로, 커서는 귀족 남성분과 부인의 애인으로도 손색이 없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 어떤 자리에도 동행할 수 있을 만큼의 교양을 이미 쌓고 있지요. 제가 자신 있게 말씀드립니다. 이 아이는 열 서너 살만 되어도 금화  서너 장의 가치는 충분히 나올 수 있습니다.”

열변을 토하던 사회자가 객석을 둘러보았다.

“이 아이는 판매처의 요청으로 100리리, 1은화부터 경매를 시작합니다! 100리리, 100리리 내실 분 계십니까!”

객석에서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아까 밖에서 보았던 상인이다. 그는 느긋한 얼굴로 다리를 꼰 채 히죽 웃고 있었다.

“100리리 나왔습니다. 110리리, 아, 저쪽 분이 손을 드셨군요···180리리 나왔습니다···190···200리리, 오! 이쪽 분께서 200리리를 부르셨습니다.”

객석이 웅성거린다.

견물생심이라고, 옆에서 누군가가  뭔가를 갖고 싶어하면 자신도 원하게 되는 게 사람의 심리다.

처음에는 별 관심 없던 사람들도 경매에 참여하면서, 경쟁이 과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장소는 이를테면 물건을 생산해내는 현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전쟁 때문에 생기는 노예를 싼 값에 구입하기 위해서 온 거지, 제 가격에 사고 싶은 게 아니었다.

점점 가격이 올라가면서, 포기하는 사람이 생겼다.

하나 둘 사람들이 나가떨어지고, 결국에는 처음 경매에 참여했던 상인과 어제 보았던 뚱뚱한 제국상인만 남았다.

두 사람은 경쟁적으로 가격을 올리더니, 결국 750리리에 제국 상인이 그를 낙찰 받았다.

< 경매장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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