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9화 (9/201)

< 노예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주인공; 정진영-루디) >

* * *

노예상인은 그를, 천막이 줄지어 서 있는 뒤쪽으로 데려갔다.

‘뭐야, 저거.’

천막 뒤의 공터에는 노예로 잡혀온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남자도, 여자도, 나이 든 사람도 있다.

그들은 모두 몸을 앞으로 구부린 채, 손과 발이 밧줄로 구속되어 있었다.

사람들을 묶은 밧줄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박힌 기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설 수도, 걸을 수도 없으니 밧줄이 묶여있지 않았어도 도망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정진영의 얼굴이 저절로 굳었다.

겨울은 아니지만, 밤이 되면 온도는 영하에 가깝게 떨어진다.

어젯밤도 건물 안, 유모에게 안겨 잤지만 추웠다.

이렇게 외부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묶여 있으면 최악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하게 죽어버릴 것이다.

지구에 있을 때 정도의 체격이라면 견뎌낼 가능성도 있지만, 이 몸은 어리고 약해. 너무 취약하다.

‘생각해라, 정진영.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생각해.’

초조한 마음에 입안이 바짝 말랐다.

사방의 모습을 확인하며 눈알을 굴리던 정진영의 시야에 서너 명의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들은 천막 뒤편에 숨듯이 서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한 명은 목 근처에 피가 맺힌 멍이 있었다.

이곳에서도 그것이 누군가 남긴 치흔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자들은 서로 상대방의 목이나 등을 보면서 상처를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노예상인이 혀를 차더니 정진영의 윗도리 뒷목을 움켜쥐었다.

거칠게 잡아당긴다.

정진영은 비틀거리며 그의 손에 끌려 갔다.

옷이 위로 쏠리면서 목이 졸렸다.

숨을 제대로 못 쉬겠다.

잘못하면 목이 부러져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진영은 가급적 몸을 이완해 반항하지 않는다는 표시를 보였다.

섣불리 굴었다 상처라도 입으면 생존확률은 더욱 낮아질 것이다.

노예상인은 그를 끌고 여자들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그들은 아직도 가지 않았느냐?”

“네, 주인님.”

“아까 나간다고 한 게 아니었나?”

노예상인의 말에 여자들 얼굴이 어두워졌다.

“다른 아이가 그릇을 치우러 왔다가 그만···.”

“쯧쯧, 새로 들어온 여자를 보고  다시 시작한 거구만.”

“예, 죄송해요.”

“됐다. 괜히 이상한 트집을 잡히면 곤란하니, 너희들은 그저 그들의 기분을 잡는데만 신경 쓰면 된다.”

“···.”

노예상인이 힐끔 여자의 목을 보고 물었다.

“그 상처는 십인대장이 낸 거냐?”

“아니요. 대장이 데려온 병사가···.”

“쯧쯧. 밤새 먹은 술만 해도 얼만데, 보이는 상처까지 상품에 달아놓고. 술이 들어가면 특히 심해지는구나.”

노예상인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정진영은 조용히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여자들의 손에 들려있는 천을 보았다.

물 적신 천에는 약간의 피가 묻어 있었다.

여자들의 앞에는 나무로 된 물통이 놓여 있고, 가장자리에는 작은 천이 몇 장 걸려 있다.

“···.”

이건 기회일지도 모른다.

정진영은 사람들이 놀라 반응하지 않도록, 약간 느리게 몇 걸음 걸어나갔다.

타박타박 걸어가, 물통에 걸린 천의 끄트머리를 물에 적신다.

가급적 귀엽게 보이도록 노력하면서 고개를 올렸다.

“누님! 상처 치료해.”

정진영은 두손으로 천을 받쳐 들고 발돋움했다.

목에 치흔을 단 여자가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피식 웃었다.

몸을 약간 낮춘 그녀의 목에 살그머니 천을 대고 살짝 눌러 닦는다.

건너편에 있던 여자가 중얼거렸다.

“어머, 이 아이, 똑똑하네. 문지르지도 않고, 아프지 않게 눌러 닦는 거 봐.”

“귀엽네요, 주인님. 이 아이는 누구예요?”

“설마 주인님 자식?”

“그럴 리가 있냐.”

노예상인이 살짝 한숨을 쉬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둡던 여자들의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노예상인은 악독하고, 여자들은 두려움에 떠는 관계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딱히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정진영은 다른 여자의 손을 물수건으로 닦으면서, 반짝반짝한 눈으로 여자를 보았다.

“누님, 눈 예뻐.”

“어머, 이 아이, 뭐야!”

여자가 기막히다는 듯이 웃는다.

좋아, 분위기는 괜찮은 것 같다.

정진영은 살짝 노예상인의 눈치를 살피며 두 손에 물수건을 펼쳐 들었다. 노예상인의 앞으로 다가가 방긋 웃는다.

“주인님, 손 닦아 드려요!”

“···어딘가 좋은 집안의 하인 자식인가. 나이에 비해 똑똑한 것 같구나.”

노예상인이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더니, 여자들에게 말했다.

“이 아이, 다음 마차가 출발할 때까지는 천막에 두지. 너희들이 심부름을 시키고 부리면 된다.”

노예상인이 그를 내려다보고 히죽 웃었다.

“꼬마야, 혹시라도 도망갈 생각은 말아라. 그럼 죽기보다 괴로운 일을 당할테니.”

“···.”

노예상인은 그것만 말하고 몸을 돌렸다.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는 노예상인을 보면서, 정진영은 남몰래 안도의 숨을 쉬었다.

나중에야 어쨌든 밤에 얼어 죽는 건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꼬마야, 이름이 뭐니?”

목에 치흔 붙은 여자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루디에요.”

“루디···.”

치흔 붙은 여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머리에 손을 놓았다.

“천막에는 병사들이 온 단다. 가급적 눈을 마주치지 말고 말하지 않는 게 좋아. 네가 그들에게 맞는다 해도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단다. 그러니 조심하렴.”

서른쯤 되었을까.

이런 일을 할 만큼 마음이 강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바삭바삭 말라 비틀어진 낙엽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이제 들어갈까.”

여자가 비쩍 마른 몸을 일으켰다.

“아, 지겨워.”

누군가가 불쑥 중얼거렸다.

치흔 붙은 여자가 어깨를 으쓱하다 얼굴을 찌푸렸다. 상처가 아픈 것 같다. 이빨자국 주위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쩔 수 없잖아. 우리가 빨리 들어가지 않으면 그만큼 안에 있는 애들이 힘들어져.”

“하아.”

여자들이 한숨을 쉬며 느리게 몸을 움직였다.

삐리, 삐리 삐리리···.

어디에선가 새소리가 들렸다.

이런 상황과 심하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정진영은 여자들의 뒤를 따라 천막으로 향했다.

천막에 들어가기 직전, 치흔 붙은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루디, 틈이 날 때마다 조금씩 음식을 먹어 두렴. 남이 보지 않게 조심해서. 안 그러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을 거야.”

“응, 누님.”

“···.”

여자가 살짝 미소를 보였다.

‘이제부터 나는 루디인가.’

루디는 고양이 이름이다.

전생에 기르던 고양이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다시 사라졌다.

그날부터 정진영, 아니, 루디는 천막에 머물면서 간단한 일을 했다.

천막 구석에 서서, 다 먹은 식기를 보면 하나씩 밖으로 내가고, 눈치를 보고 있다가 여자들에게 물수건을 갖다 준다.

여자를 심하게 때리는 군인이 있으면 슬그머니 나가서 근처에 있는 노예상 사람에게 말했다.

그러면 처음에 만났던 노예상인이 와서 천막 밖에서 잠시 상황을 보았다.

노예상인은 지나치게 여자가 맞는다 싶으면 안으로 들어가서 술을 권하거나, 상품이 망가진다며 우는 소리를 하여 말렸다.

루디는 치흔 붙은 여자가 말해준 대로 틈을 봐서 음식을 먹거나 몸을 쉬었다.

그녀가 왜 자신에게 친절한지 몰랐는데, 몇 명의 말을 듣고 이유를 알았다.

열 살에 부모에게 팔린 그녀는 부유한 상가에서 일하다 다시 노예상에 팔렸다고 한다.

그때 상가에서 헤어진 자식이 자신과 비슷한 나이였던 모양이다.

거의 하루 종일 곁에 사람이 있는 편이지만, 화장실에 갈 때나 아주 잠깐 정도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마다 루디는 배에 감아두었던 천가방에서 금화나 보석을 꺼내 상의와 바지의 시접에 밀어 넣었다.

별로 어렵지는 않다.

시접의 실을 끊어 아주 작은 공간을 만든 뒤 매듭을 짓는다.

루디는 동전이 빠듯하게 지나갈 만한 구멍을 만든 뒤 틈 날 때마다 가장 값어치 높은 걸 밀어 넣었다.

시접의 공간이 넓지 않았기 때문에 안쪽으로 밀어 넣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하지만 덕분에 동전이 부딪치지 않으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얼마나 넣을 수 있으려나 싶었지만, 의외로 많이 들어가서 천주머니에 있던 돈은 모두 숨길 수 있었다.

이대로 여기에서 일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렇게 잘 풀리지는 않았다.

삼일 뒤, 루디는 밖에 묶여 있던 노예들과 함께 마차에 태워졌다.

마차는 모두 넉 대였다.

옆 면에는 두꺼운 나무판자가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고, 뒤는 자물쇠가 걸린 두꺼운 나무문으로 되어 있었다.

지붕까지 나무판자로 둥글게 만들어져서, 어느 정도의 공격에는 견딜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공격을 대비했다기보다는 도망방지를 위한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숨 쉴 구멍은 지붕과 앞 뒷문 사이에 있는 작은 반원의 공간과, 옆면의 나무판 사이 뿐이었다.

키가 작은 루디는 성인들 틈에 가려 숨쉬기도 어려울 것처럼 보였다.

노예들은 여전히 손이 묶인 상태였지만, 발의 구속은 풀어졌다.

노예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손과 발이 묶여 있으면 차지하는 공간이 많기 때문인 것 같다.

만원전철처럼, 마차 안은 앉을 틈도 없을 만큼 빽빽하게 노예로 채워졌다.

루디는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억지로 몸을 밀어 넣어, 루디는 옆 면과 닿아있는 모서리 공간을 차지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일부 노예는 며칠 동안 밖에 있다가 구속된 상태 그대로 죽었다.

죽은 건 나이가 많았거나 처음부터 상처를 입고 잡혀온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루 한 번 배급되는 멀건 죽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그래서 더 쉽게 죽었을 것이다.

죽은 노예는 마차에 태우기 직전까지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을 당시의 모습과 동일한 자세로 경직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 상태 그대로 버려졌다.

근처 어딘가에 시체를 버리는 장소가 있다고 들었다.

자리가 없어서 마차에 타지 못한 노예도 몇 명 있었다.

모두 몸 상태가 조금씩 나쁜 사람들이었다.

그중에는 특별히 상처가 있거나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닌데, 연일 설사를 하는 바람에 다 죽어가게 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다음 마차가 출발할 때까지 이 자리에서 기다린다고 한다.

하지만 남겨진 자들은 이미 죽은 노예들처럼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태워달라고 울면서 애원했지만 매를 맞았다.

서서히 앞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치흔붙은 여자가 천막에서 나왔다.

함께 있던 군인이 천막을 떠나 간신히 나올 수 있게 된 모양이다.

치흔붙은 여자가 마차로 다가와 나무판 사이로 그의 손을 잡았다.

여자의 손바닥에 작은 육포가 몇 조각 숨겨져 있었다.

“누님, 고마워요.”

루디가 속삭이듯 말하자, 여자가 히죽 웃으며 몸을 돌렸다.

아무도 모르게 육포 조각을 옷 안 배에 감은 천가방에 끼웠다.

덜컹덜컹, 루디가 탄 마차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몸이 허공으로 튄다.

특별히 돌을 밟은 것 같지도 않은데, 마차의 흔들림은 엄청났다.

이걸 앞으로 며칠동안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끔찍해진다.

하지만 잠시 뒤에는 그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몸은 정신없이 위아래 옆으로 흔들리고, 구역질이 치밀어 오른다.

마차 자체와 사람들에게서 풍겨오는 악취도 견디기 힘들었다.

누군가가 멀미를 참지 못하고 구토를 한 모양이다.

새로운 냄새가 더해지면서 괴로움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하루가 지날 무렵에는, 지하 밑에 더 깊은 지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노예는 마차에서 내리지 않는다.

하루 한 번, 묽은 죽이 배급되었지만 마차 안에서 먹어야 했다.

인간은 먹으면 배설을 하는 동물이다.

당연히 노예도 똥오줌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것을 모두 마차 안에서 해결해야 했다.

이 세계에서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물건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알게 되었다.

< 노예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주인공; 정진영-루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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