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안에 든 쥐 >
* * *
어딘가 중세는 한적할 거라고 생각한 면이 있었다.
현대 지구보다 사람 수는 적은데 땅 덩어리는 넓으니 그럴 것 같았던 거다.
하지만 도시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람 사는 곳은 모두 이런 건지, 생각보다 건물은 다닥다닥 붙어 있고 어떤 길은 굉장히 좁았다.
물건까지 놓여 있어, 때때로 지그재그로 움직여야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길도 있었다.
거기에 사람까지 복작복작 많다.
지나는 골목마다 상당수의 사람이 공포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정진영과 유모는 물건과 사람들을 피해 외벽을 향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외벽에 가까이 갈수록 사람이 많아진다.
유모는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는 것처럼 몸을 숙이고 걸었다.
유모의 품에 안겨, 높은 벽을 올려다보았다.
정진영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높다.
그리고 거대했다.
정진영은 지하통로로 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내벽의 모습을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보았을 뿐이다.
그래서 중세의 성벽이 이토록 엄청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직선으로 놓인 두꺼운 벽은 둥근 탑 같은 구조물을 끼고 다시 길게 이어져 있었다.
이 거대한 벽에 가까이 있으니 꼭 개미가 된 기분이었다.
‘설마 이렇게 커다란 벽이 도시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걸까.’
현대 지구에서도 만들기 어려울 것 같은데 여기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걸 만든 걸까.
벽을 올려다보느라 머리가 꺾일 것처럼 뒤로 넘어갔다.
직선 벽에서 약간 튀어나오도록 만들어진 탑 구조물 위에서, 사람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병사 몇 명이 활을 들고 있었다.
갑자기 정신이 확 깨었다.
정진영은 머리를 바로 하고 유모의 귀에 살짝 속삭였다.
“유모, 위에 병사가 있어.”
“···.”
유모가 살짝 위쪽을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서 성문이 가까워 그런가 봐요.”
지나온 길마다, 사람들이 커다란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피난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문으로 도망가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데, 그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멀리서 외벽의 문이 보이자, 유모의 걸음이 멈췄다.
적병이 문을 장악하고 있었다.
시퍼런 칼과 창을 든 병사들이 문 근처를 서성이며 사람들을 노려본다.
문이 있는 벽의 양쪽에도 커다란 원형의 탑이 있었는데, 병사가 한 명씩 올라가 있었다.
도저히 도망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유모가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더니, 살그머니 몸을 돌렸다. 그대로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섞인다.
“이곳 말고도 문이 하나 더 있어요. 그쪽으로 한 번 가보죠.”
다시 한참을 걸어 반대편에 있는 성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도 여려 명의 병사가 서 있었다.
유모가 멀리서 그 모습을 확인한 뒤 몸을 돌렸다.
유모는 약간 떨고 있었다.
성문 주변에는 도망가려다 베인 것처럼 보이는 시체가 여럿 있었다.
자신과 유모가 문으로 돌진하다 베이는 모습이 언뜻 머릿속에 떠올랐다.
[도망갈 수 없다.]
성문 앞에 쓰러져 있는 시체가 그 사실을 눈앞에 들이댄 것 같았다.
유모가 빠르게 발을 놀린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정진영의 작은 몸도 꺼떡꺼떡 위아래로 흔들렸다.
흔들리는 머릿속에서, 정진영은 혼란스러운 감정을 추스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쩌지.’
모처럼의 이세계가 하루도 안 돼 끝나 버릴 것 같다.
‘죽으면 다시 환생하는 건가. 아니면 세 번째 인생은···.’
하아···.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세 번째는 인간이 아닌 개돼지로 태어날 수도 있다.
안 돼, 안 돼. 절대로 살아나자. 비인간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
‘힘내자.’
정진영은 멀어져가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죽을까보냐. 절대로 살아준다.
* * *
“죄송합니다, 도련님.”
유모가 비통하게 한 마디 하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두 사람은 외벽의 성문을 뒤로 하고, 사람들의 파도를 거슬러 걸었다.
도시는 여전히 혼란의 도가니였다.
유모가 말한 대로 병사들의 포로 사냥이 시작되었는지,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유모는 갈팡질팡,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것 같다.
오직 외벽을 통과하는 일만 생각했는데,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당황한 모양이다.
게다가 사모해 마지않던 공작의 비참한 모습을 본 이후라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정진영은 유모의 품에서 내려 그녀의 손을 당겼다.
“유모, 이쪽으로! 이쪽!”
멀리에서 젊은 남자가 목에 줄이 걸려 병사에게 끌려가고 있다.
목이 졸리는지 컥컥 거리지만 병사는 킬킬거리고 웃으며 오히려 강하게 잡아당겼다.
다들 미쳐 돌아가는 것 같다.
정진영은 유모를 끌어,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아직 젊은 남녀가 남아있기 때문일까. 유모나 정진영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젊은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외벽의 성문으로 향할 때만 해도 소녀나 젊은 여자가 간간이 보였지만, 지금은 그보다 나이 많은 여자들이 눈에 띄었다.
‘서둘러야 해. 유모의 말처럼 이자들은 곧 우리에게도 눈을 돌린다.’
유모는 노예로 팔아먹는 일만 언급했지만, 단순히 그렇게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와토린구 공작을 그런 식으로 다루는 걸 보면, 이곳에 사는 사람이 다 죽어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게 아닐까.
증오가 지나쳐, 노예로 팔아먹는 게 아니라 다 죽이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마력 소유자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걸까. 근데 마력 소유가 대체 뭐야?’
가장 중요한 걸 듣지 않았던 것 같다.
어딘가에 몸을 숨기면 제일 먼저 그것부터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정진영은 짧은 다리를 열심히 놀렸다.
외곽으로, 외곽으로.
사람이 없는 장소를 찾아···.
‘아, 숨 가빠 죽겠네.’
여기에서 벗어나는 대로, 이 허약한 몸부터 어떻게 하자.
* * *
정진영과 유모가 향한 곳은 중심에서 벗어난 도시의 외곽이었다.
어디를 가나 오물 냄새가 풍기기는 마찬가지지만, 이곳은 더욱 심하다.
건물도 허름했다.
군데군데 벽은 흡집이 나 부서져 있고, 나무로 된 창문은 쥐이빨처럼 깨져 있었다. 어떤 창은 그저 나무 판때기 한두 개로 가려져 있을 뿐이다.
몇몇 창문에는 긴 막대기가 삐죽이 나와 있었다. 거기에는 걸레인지 옷인지 알 수 없는 것이 걸려 있었다. 아마 빨래를 한 뒤 말리려고 널어둔 모양이다.
유모가 불안한 듯 정진영의 몸을 꼭 안았다.
“도련님, 여기는 아무래도 빈민가 같아요. 도련님이 오실 데가 못 됩니다.”
그건 안다.
하지만 병사가 오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곳은 여기 밖에 없었다.
적병이 위험하냐, 부랑아가 위험하냐고 묻는다면 단연 전자다. 위험의 정도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병사가 위험하다.
하지만 네 살짜리가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건 아무래도 부자연스럽지요.
정진영은 어깨를 움츠리고 작게 말했다.
“여기, 병사가 없으니까. 나 여기 있고 싶다.”
“여기라면 적병은 오지 않겠지만.”
유모가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주변은 조용했다.
이곳에 사는 사람의 상당수는 이때다 싶어서 도둑질이나 작은 약탈을 하러 간 것 같다.
나머지는 아마 건물 안에 숨어 조용히 사태를 지켜보고 있을 거다.
“유모, 저기 가자.”
정진영은 작은 손가락을 들어 이층 건물을 가리켰다.
더러운 중, 가장 깨끗해 보이는 건물이었다.
그 건물은 일반 거리에 있는 건물 보다는 더럽고, 빈민가 거리의 건물보다는 조금 깨끗했다.
간판은 없었지만, 일반 집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여인숙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먹을 게 있을지 몰라.”
정진영이 말하자, 유모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배고프시죠?”
유모가 허둥지둥 그를 안은 채 건물로 향했다.
정진영은 유모의 목을 끌어안고 사방에 시선을 보냈다.
병사는 없지만, 사람의 시선이 느껴진다.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호랑이를 피해 여우의 굴에 들어온 건가.’
적병이 언제까지 이곳에 있지는 않을 거다. 언젠가는 떠난다.
게다가 며칠 지나면 여자와 술, 정복감 때문에 경계도 서서히 무너질 것이다.
그러면 성문의 감시도 느슨해진다.
‘며칠 동안 이 거리에 숨어 지내면서 기회를 노려보자.’
어두컴컴한 건물로 들어가면서 정진영은 가만히 사방을 노려보았다.
생각했던 대로 이 건물은 보통의 집은 아니었다.
1층은 술집인 것 같다.
테이블과 의자가 몇 개 놓여 있고, 맞은편 구석에 주방이 있었다.
주방 뒤편으로는 작은 뒷문이 있다.
그쪽으로 나가자 건물 벽으로 막힌 약간의 공간이 있었다.
닭 같은 가축을 토막낼 때 사용하는 곳인 것 같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키 낮은 통나무가 놓여 있었다.
통나무 근처에는 가축을 처리할 때 생긴 흔적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통나무 위에 커다란 칼이 꽂혀 있다.
정진영이 칼을 빼내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온몸의 힘을 다해 두 손으로 잡아도 마찬가지였다.
“도련님, 제가 할 게요.”
유모가 정진영을 뒤로 물러서게 하고 칼을 잡았다.
유모가 손에 힘을 주자 칼은 금세 빠졌다.
‘정말, 이놈의 몸, 너무 약하다.’
정진영은 나이에 맞지 않는, 세파에 찌든 것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무기 확보다.
정진영은 손에 넣은 커다란 칼을 반짝거리는 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유모가 냉큼 그 칼을 가져가 버렸다.
“도련님한테는 너무 위험해요.”
“···.”
아니, 아니, 무기를 가져가 버리면 어쩌겠다는 거야.
이곳이 빈민가다. 맨몸으로 데굴데굴 굴러다닐 만큼 안전하지 못한 거다.
당연히 무기가 필요했다.
게다가 몸은 아이라도 내용은 어른이고, 칼은 좀 무거웠지만 적당히 다룰 수는 있을 것 같다. 문제는 없다.
하지만 유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칼을 돌려주지 않았다.
“이 정도의 칼이면 적이 와도 문제없이 휘두를 수 있을 것 같네요.”
칼을 들고 한 번 휘둘러 본 뒤 유모가 약간 어깨를 내렸다.
“여자가 큰 칼을 들고 다니면 눈에 띌 것 같아서 버리고 왔는데, 실수였는지도 모르겠어요.”
“실수 아니야.”
정진영은 유모의 어깨를 토닥토닥 건드렸다.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칼을 가지고 왔다면 여기까지 오기도 전에 죽었을 거다.
어쨌든 무기를 구해야겠다. 기왕이면 먹을 것도.
정진영은 유모가 문 입구에 탁자와 의자를 쌓아 바리케이드 만드는 것을 보고 몸을 돌렸다.
타박타박 어두운 실내를 돌아다니며 바닥과 구석구석을 살핀다.
먹을 것은 이미 누군가가 훔쳐갔는지 남아있지 않았다.
주방 구석에서 떡인지 빵인지 잘 모르겠는, 둥글넙적한 걸 하나 찾았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먹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너무 딱딱하다. 돌덩이도 이것보다는 부드럽지 않을까.
어쨌든 주방 구석에 챙겨 놓았다. 먹을 수 있는지는 나중에 유모에게 물어보자.
먹을 게 아니라고 해도 무기나 방어구로 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만큼 딱딱해.
그리고 계속해서 무기가 될 만한 게 있는지 주방을 살폈다.
하지만 칼 종류는 누군가 훔쳐갔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찾은 건 조금 이상하게 생긴 못이었다.
지구에서 사용하는 못은 둥글고 길지만, 이건 각이 져 있다. 머리 모양도 울퉁불퉁했다.
하지만 끝이 뾰족하고 길어서, 무기로 쓴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아 보였다. 현대 지구의 못 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정진영은 못을 들고 뒷문으로 나갔다.
건물과 건물이 닿아 있는 그늘에는 가축을 매놓았던 것으로 보이는 말뚝이 하나 박혀 있었다.
그 근처는 대소변이 뒤섞여, 코가 썩을 것 같은 악취가 풍겨 나왔다.
옷으로 코를 막고 그곳으로 가서, 가장 오래 되어 보이는 똥무더기에 못 끄트머리를 찔러 담갔다.
한참 두었다가 꺼내서 조금 떨어진 바닥에 문질러 닦는다.
정진영은 오물에 못을 담갔다 다시 바닥에 닦는 걸 몇 번 되풀이 한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못은 주방에서 찾아낸 작은 헝겊 조각으로 둘둘 싸매 다치지 않도록 했다.
좋아, 이제 무기는 마련했다.
이 못이라면, 당장 죽지는 않아도 반드시 찔린 뒤에 오랜 시간 동안 고통스럽게 죽어갈 것이다.
이런 시대에 제대로 된 대처가 가능할 리도 없으니, 십중팔구 원수는 갚는 거다. 혹시 자신이 그 장면을 보지 못하더라도.
문득 정진영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이 건물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밝았던 하늘에 붉은 노을이 걸리고 있었다.
“도련님! 여기에서 뭐하시나요?”
유모가 당황한 얼굴로 뒷문으로 나왔다.
그가 없는 사이, 혼자 울었던 걸까. 유모의 눈이 빨갛다.
“이렇게 더러운 곳에 계시면 안 돼요.”
유모가 말하며 그를 훌쩍 안아들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주방 구석에 있는 나무통의 물로 그의 손을 씻긴다.
“유모, 저거 먹을 수 있는 거야?”
손을 씻은 뒤, 정진영이 구석의 넙적한 걸 가리키자 유모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 빵이네요.”
‘어, 저거, 진짜 빵이었어? 딱딱해서 이빨도 안 들어갈 것 같은데.’
유모가 빙긋 웃었다.
“어렸을 때 가끔 먹었죠. 오라버니가 용병을 하기 전 얘기예요. 그때는 좀 궁핍했으니까요.”
그리운 듯 유모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딱딱한 빵에 음식을 올려서 먹는 거예요.”
“접시처럼?”
“그렇죠. 공작님도 제가 저런 빵을 먹은 적이 있다고 하니까 깜짝 놀라셨어요. 도련님처럼요.”
유모의 이야기가 잠시 이어지는 동안, 어느새 사방이 캄캄해졌다.
< 독안에 든 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