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국의 포로 >
* * *
처음에는 나무와 풀, 낡은 우물 밖에 보이지 않던 길에, 멀리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성의 지하에서 뻗어 나온 비밀 통로는 영주성을 둘러싸고 있는 내벽에서 떨어진 외부에 있었다.
공작령 밖으로 도망가기 위해서는 내벽과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외벽을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외벽의 문까지 가려면 도시의 수원으로 사용되는 호수와 복잡한 도시의 거리를 지나야만 했다.
한참을 걸어 도시 근처에 도착했을 때에는, 유모의 숨이 상당히 가빠져 있었다.
걸음도 많이 느려졌다.
그래도 유모는 멈추거나 쉬지 않고 계속 걸었다.
보다 못한 정진영이 쉬었다 가자고 말하자, 유모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강하게 말할 수 없었다.
정진영에게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목숨이 귀하다.
유모가 힘들어 하는 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숨을 가쁘게 쉬며, 유모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젊을 때 이 정도의 거리는 순식간이었는데, 나이가 들다 보니 힘드네요.”
나이 때문이라기보다는 뚱뚱해져서가 아닐까.
정진영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조용히 그녀의 등에 뺨을 붙였다.
한둘 밖에 없던 건물이 점차 늘어나고, 어느새 두 사람은 복잡하게 이어진 거리로 접어들었다.
넓지 않은 거리 양쪽으로 건물이 줄지어 서 있다.
거리 곳곳에는 피가 떨어진 흔적이 있었다.
바닥에 짐짝처럼 널브러져 있는 시체도 보였다.
옷차림을 보면 도시를 지키는 병사였던 것 같다.
하지만 주위에 무기는 없었다.
누군가가 훔쳐간 것일까.
병사는 신발도 벗겨진 채 도로 한 귀퉁이에 물건처럼 축 늘어져 죽어 있었다.
그 병사의 시체 옆으로, 허름한 옷차림의 남자 몇 명이 허둥지둥 도망친다.
그들은 정진영과 유모가 왔던 길로 향하고 있었다.
외벽의 문과는 반대 방향인데, 어디로 도망가는 걸까.
짐이 없는 걸 보면 목적지가 있다기보다는 그저 적병을 피해 도망치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어디에선가 여자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유모의 푸짐한 등이 움찔하더니 걸음이 빨라졌다.
깊숙이 들어갈수록 거리는 더욱 아수라장이었다.
반쯤 벗은 여자가 병사 몇 명에게 잡혀 근처의 허름한 집으로 끌려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병사 몇명이 집집마다 돌며 물건을 약탈하고 있었다.
약탈이라고 해봐야 약간의 동전과 닭, 염소 같은 가축이다.
하지만 그나마도 평민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한 것 같다.
“안 돼! 제발 용서해주세요.”
늙은 남자가 닭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병사의 다리에 매달리다가 창에 목을 찔렸다.
“아버지!”
열 몇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가 울부짖으며 집안에서 뛰쳐나왔다.
닭의 날개를 움켜쥐고 있던 병사가 큰 소리로 웃자, 옆에 있던 병사가 소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정진영이 본 것은 거기까지였다.
유모가 정진영을 앞으로 안았다.
그의 머리를 가슴에 꼭 눌러 보지 않도록 한 뒤, 병사들을 피해 구석으로 향한다.
유모는 병사들이 소녀를 희롱하는 동안 뛰다시피 하여 그 자리를 벗어났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쪽저쪽으로 도망치는 사람들 너머로, 요란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거리의 끄트머리 쪽이다.
약탈하던 병사들이 그 소리를 듣고 히죽히죽 웃으며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야! 거기 서라!”
“모두 이쪽으로 모여!”
“도망가면 죽인다.”
실제로 병사들은 도망가려는 사람들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병사들이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도망치던 사람들도, 오히려 그게 병사들의 화를 돋운다는 것을 깨닫고 걸음을 멈췄다.
부들부들 떨며 바닥에 엎드려 살려 달라고 비는 사람도 있었다.
병사들은 방금 전까지 희롱하던 여자들까지 끌고 나와 거리에 세웠다.
“똑똑히 두 눈 크게 뜨고 봐라! 엉!”
“어디서 고개를 돌려!”
윽박지르는 병사들에게 위협 당해, 사람들이 허둥지둥 도로 양쪽으로 움직였다.
함성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진다.
병사들이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행렬을 보아라.
환영의 함성을 질러라.
고개를 돌리지 마라.
영문도 모른 채, 공작령의 영민들이 우와아, 함성을 올리기 시작했다.
함성과 함께 서서히 거리로 들어선 것은 길게 줄을 이어 행진하는 병사들이었다.
제일 앞에 있는 것은 말 탄 무장이다.
높은 사람인지 전신을 갑옷으로 두르고 있었다. 긴 망토가 말 엉덩이를 덮으며 펼쳐져 있다.
그 옆과 뒤로, 앞선 무장보다 약간 수수해 보이는 망토를 두른 무관 몇 명이 말을 타고 따라왔다.
그중 한 명은 커다란 깃발을 들고 있었다.
말 탄 무장이 지나가자, 겁에 질린 영민 중 몇 명이 넙죽 바닥에 엎드렸다.
유모도 그를 품에 안은 채 구석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적의 무장이 말을 타고 다가오더니, 정진영의 앞을 지나간다.
혹시나 자신의 신분을 알아차리지 않을까 싶어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이 정진영에게 향하는 것은 아니었다.
적의 무관들은 고개를 높이 들고 벌레에는 흥미가 없는 것처럼 차례차례 지나갔다.
말 탄 무관들이 지나가는데, 뒤쪽에서 숨죽인 듯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영민들의 시선이 무관들의 뒤쪽를 향한다.
유모와 정진영도 자연스레 그쪽을 보았다.
무관들의 뒤에는 포로로 잡힌 남자들이 여러 명 있었다.
그냥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딘가의 문짝으로 보이는 나무판 위에 사지를 묶여 누워 있었다.
그 나무판을 말이 질질 끌고 있다.
일부러인지, 남자들의 몸은 약간 느슨하게 바닥에 치우쳐 묶여 있었다.
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려 엉망이다. 바닥에 닿는 부위는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할 만큼 닳아 있었다. 일부는 뼈가 드러나 있다.
바닥에 닿지 않는 부분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고문을 받은 건지, 아니면 싸우다 그랬는지 피부가 피로 뒤범벅 되어 있었다.
포로들이 가까이 오자, 유모의 무릎이 꺾였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유모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아아···.”
비통한 소리가 유모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정진영은 재빨리 손을 뻗어 유모의 입을 막았다.
그녀의 품에서 벗어났지만, 유모는 모르는 것 같다.
유모는 멍하니 끌려오는 포로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누구이길래, 아니, 알고 있다. 유모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일까지 잊어버린다면, 그 대상은 당연히 공작일 것이다.
정진영은 유모의 옆에 파고들듯이 서서 포로들의 모습을 보았다.
제일 앞에 끌려오는 남자가 공작일까.
유모의 시선이 그 남자를 따라 움직인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넘쳐흘렀다.
구경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서, 설마···영주님인가?
“···맙소사! 공작님이야.”
“어쩌다 이런 일이!”
겁에 질린 속삭임이 사람들 사이로 번져갔다.
‘와토린구 공작···. 나의 아버지.’
처참한 모습의 공작이 유모와 정진영 앞을 지나갔다.
바닥에 나무판 끌리는 소리가 듣기 싫게 울린다.
본인의 의지 없이, 공작의 머리는 나무판이 흔들리는 대로 꺼떡거리며 움직였다.
머리가 흔들릴 때마다 죽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멍한 눈동자도 함께 움직였다.
허공을 헤엄치는 듯하던 공작의 눈동자가 문득 유모의 모습을 스쳤다.
순간, 공작과 눈이 마주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공작의 눈동자에 약간 빛이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입가가 조금 올라간 것 같다.
하지만 금세 사라졌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공작의 모습이 조금 멀어지자, 그를 따라가려는 듯 유모가 몸을 일으켰다.
정진영은 재빨리 유모의 손을 잡았다.
“엄마!”
작게 말하자, 제정신을 차린 듯 유모가 퍼뜩 그를 보았다.
“아!”
유모가 짧게 외치더니 주저앉아 그를 끌어안았다.
유모가 그의 귀에 입을 대고 작은 소리로 흐느꼈다.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그것이 정진영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공작에게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무판에 묶인 포로가 지나간 뒤에는 손을 줄에 묶인 사람들이 줄줄이 끌려갔다.
남자도 몇 명 있었지만, 대부분 젊은 여자다.
병사 몇 명이 행렬 가장자리에 서서 걸으며 가끔 군중 속의 여자나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문득 병사 한 명이 젊은 여자를 잡아 끌었다.
“넌 이리 와라!”
“꺄아앗!”
병사가 거칠게 여자를 잡아 끌고 간다. 버둥거리며 반항하자 강하게 뺨을 두들겼다.
결국 여자는 줄에 손을 묶여 행렬의 중앙에 끼게 되었다.
병사가 다시 다른 여자들의 얼굴을 확인하며 걷는다.
몇몇 여자들이 겁에 질려 도망가려 하자 다른 병사들이 쫓아가 바닥에 쓰러뜨렸다.
소란스러운 틈을 타서, 유모가 그를 안고 조금씩 뒤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왜 그래?”
정진영이 묻자, 유모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저 행렬에 잡힌 여자들은 아마 귀족들의 소유가 될 거예요. 노예로 잡아가는 겁니다. 하지만 이 행렬이 끝난 뒤에는 병사들 차례가 됩니다. 그때는 예쁘고 젊은 게 문제가 안 돼요. 어린아이조차도 잡아갈 수 있습니다.”
유모의 눈물은 어느새 말라 있었다. 사람들 시선을 피해 뒤로 빠진 유모가 그를 바닥에 내렸다.
“말단 병사들은 아무나 잡죠. 숫자만 채워서 뒤따라오는 상인에게 넘길 겁니다. 그러니 지금 도망가야 해요.”
유모가 몸을 굽혀 사람들 뒤편을 빠르게 걸었다.
정진영도 유모의 손을 잡고 뛴다.
행렬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몇몇 병사가 끌려가는 여자들을 향해 고함을 치고 있었다.
“어서 걷지 못해!”
“어딜 자빠져 있어! 일어나라!”
주변에는 아직 포로로 잡히지 않은 젊은 여자들이 몇 명 있었다.
병사 한 명이 사방을 살피더니 한 여자를 강제로 잡아 끌어 근처 건물로 향했다.
여자의 가족으로 보이는 소년이 병사에게 달려들었다.
한 명이 그 소년을 발로 차 쓰러뜨리고 머리를 밟는다.
“네놈들은 벌레다. 벌레가 사람한테 뭐라고 말하는 거 아냐!”
동료 병사들이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유모는 감정이 빠진 인형같은 표정으로 조용히 정진영의 손을 끌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틈이 있는 곳을 발견하자, 유모가 그를 안고 그 곳으로 들어갔다.
좁은 틈을 빠져나가니 다시 골목이 나왔다.
사람이 없는 장소에 이르자, 유모가 여전히 걸으면서 말했다.
“도련님, 이번 전쟁은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습니다. 보통은 귀족 포로를 저런 식으로 대하지 않아요.”
유모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흐를 것 같다. 코를 훌쩍거리며 유모가 말을 이었다.
“저자들은 오랫동안 적국이었던 카니아의 사람들입니다. 백 년 넘게 전쟁을 반복해왔지요. 한데 몇십 년 전부터 전쟁이 더 치열해졌어요.”
정진영의 걸음이 느려지자, 유모가 번쩍 그를 안았다.
“그 동안 귀족 중의 마력 소유자가 많이 죽었습니다. 귀족 가문에는 마력 소유가 없어서는 안 돼요. 하지만 마력 소유는 매우 드물죠. 소중한 마력소유자가 여럿 죽으면서 서로 간의 증오가 더욱 강해졌습니다.”
건물의 그림자에 숨어 주변을 살핀 뒤, 유모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몇년 전에는 카니아의 왕자 두 명이 아버님 손에 죽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상당히 강한 마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와토린구 공작가에도 피해가 컸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몇 안 되는 마력 소유가 거의 죽고 마지막까지 남은 건 공작님과 경비 대장 정도였죠.”
경비 대장은 완전한 남이 아니라, 공작의 이복 동생이라고 한다.
전대 공작의 평민 첩이 낳은 자식인데, 마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외부에 내보내지 않고 공작가 안에 남겼다고 했다.
“도련님은 태어날 때부터 강력한 마력 소유자로 유명합니다. 코레아 왕조의 혈통이니까요. 그런 마력 소유는 지금 상황에서라면 더욱 중요해요. 그러니 보통 때라면 적에게 잡혀도 죽을 염려는 없지만···.”
유모가 정진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절대로 잡혀서는 안 됩니다. 몇 년 정도 지나면 또 모르죠. 그때 가면 다시 제정신이 돌아올 지도. 하지만 지금은 안 돼요. 증오가 너무 커서 정상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모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억지로 미소지었다.
“도련님, 제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으실 거예요. 하지만 꼭 기억해주세요. 제가 혹시 죽게 되어 혼자가 되더라도 절대 귀족이라는 걸 들켜서는 안 됩니다. 와토린구 공작가의 후계자라는 걸 놈들이 알게 되면 큰일 나요. 아시겠어요?”
“···응.”
유모가 그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사랑하고 있어요, 나의 도련님.”
플래그다.
이거, 아무래도 사망 플래그야.
정진영의 가슴이 두근두근 불길하게 뛰었다.
< 적국의 포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