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망가는 길 >
* * *
유모는 어느새 평민이 입을 것 같은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에 쓰고 있던 이상한 모양의 모자도 벗었다.
대신 구릿빛 머리카락을 감싸고 있는 것은 수건 같은 커다란 천이다.
유모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정진영의 눈에 시선을 맞췄다.
“도련님, 조금 춥겠지만 잠시만 참아주세요.”
유모가 빠르게 정진영의 옷을 벗겼다.
조용한 허공으로 사락사락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울렸다.
공기가 서늘하다.
유모의 손끝도 차가웠다.
피부에 소름이 돋아 자기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유모는 조용히 정진영의 옷을 벗기고 허름해 보이는 아이 옷으로 갈아입혔다.
본래 입고 있던 것은 얇고 부드러웠지만, 새 옷은 거칠고 투박했다.
모양도 단순해서, 단추나 장식은 일체 없었다. 그저 위에서 아래로 뒤집어쓰면 끝이었다. 그리고 약간 헐렁했다.
하의는 무릎을 덮는 반바지였다. 폭이 좁기는 하지만 본래 입던 것과 비교하면 헐렁해서, 약간 푸대자루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헐렁한 양말을 신었다.
유모가 양말 윗부분을 특색 없어 보이는 초라한 끈으로 묶었다.
옷을 다 입고 신발도 허름한 것으로 갈아 신는다.
신발도 옷처럼 조금 컸다.
옷과 신발이 모두 큰 걸 보면, 이번 침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전투가 일어나더라도 한참 뒤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마법이 있으면 모를까. 전화도, 우편 시스템도 없어 보이는 이런 세계에서는 거리가 멀면 정보도 그만큼 늦게 전달될 것이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니 마법 같은 거, 있었구나.
‘아까 이상한 마법 구슬 같은 거 먹었지.’
그토록 신기한 게 있으면 마법의 거울이나 텔레파시로 통신하는 것도 존재할 것 같은데, 아직 발명 되지 않은 걸까.
‘나였으면 그걸 가장 먼저 만들었을 것 같은데.’
정보는 생명이라든가, 정보를 제어하는 자가 승리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주식에서도 남보다 정보를 조금 빨리 아는 것만으로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
전쟁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지 상대보다 조금 앞선 정보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몇 배는 유리해진다.
아주 잠깐이지만, 이 세계에서 그런 마법이나 도구를 발명해 팔아 떼부자가 되는 상상이 펼쳐졌다.
하지만 정진영은 이내 작은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신분을 숨기고 도망가는 처지다.
몇 년은커녕, 십 분 뒤가 어떻게 될지도 불안한 상황이었다.
눈에 띄는 일을 했다가는 물리적으로 목이 뎅강 날아가고 말 것이다.
‘나중에···. 정말로 유모와 함께 멀리 도망갈 수 있으면, 그때는 다른 나라에서 한 번 해볼 수 있을지 모르지.’
경비 대장도 함께라면 좋았을 것이다. 이미 죽은 사람을 생각해봐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정진영이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유모는 다시 한 번 가방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가방에는 옷이 더 있었다. 얼핏 본 바로는 성인 남자의 옷인 것 같다. 어쩌면 아버지인 공작의 것일지도 모르겠다.
유모는 가방에서 수통과 과도보다 약간 큰 칼을 꺼낸 뒤, 입고 있던 옷들과 함께 구석에 두었다.
가방 한 개를 짊어지고, 유모가 바닥에 있는 검뎅이를 손에 약간 묻혔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조금 더럽힐게요.”
그렇게 말하며 검뎅이를 정진영의 뺨과 목, 손등 같은 곳에 조금씩 묻혀 문지른다.
머리카락에도 손가락을 넣어 자연스럽게 흐트러뜨렸다.
“도련님, 당분간은 귀족이라는 걸 숨겨야 합니다. 그래서 옷도, 얼굴도 조금 지저분하게 했어요.”
“···.”
가만히 있자, 유모가 빙그레 웃었다.
“울지도 않으시고, 참으로 훌륭하시네요. 한데 조금 더 훌륭하게 되셔야 합니다.”
유모의 눈에 습기가 약간 어렸다. 눈을 깜박이면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다.
“앞으로는 누가 물어봐도 진짜 이름을 대서는 안 됩니다. 와토린구 공작가를 안다고 말해서 안 돼요. 누군가가 와토린구 공작가를 욕해도 참으셔야 합니다. 아무 표정도 내서는 안 돼요. 앞으로 가는 길에는 아버님을 욕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절대로 화를 내시면 안 됩니다.”
“···.”
“도련님, 무슨 말인지 아셨나요?”
“···응.”
“죄송합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에요.”
“알아.”
실제로는 네 살짜리가 아니니까 유모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게다가 전생의 기억이 있기 때문에 공작가에는 큰 애착도 없었다.
지금 정진영에게 더 가깝게 느껴지는 건 공작가가 아니라 눈앞에 있는 유모였다.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
하지만 유모는 울상을 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얘기해 놓고 자신이 상처 받은 것 같다.
정진영은 어쩔 수 없이 유모의 어깨에 작은 손을 올렸다.
톡톡, 부드럽게 친다.
“괜찮아, 유모.”
유모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참고 있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아기이셨는데, 단시간에 이렇게 훌륭해지셔서···.”
“···.”
유모는 손등으로 눈물을 쓱쓱 닦고 어색하게 웃었다.
“도련님, 그럼 이제 갈까요?”
정진영은 살짝 한숨을 쉬고 유모의 얼굴을 보았다.
“호칭···.”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하는 건 어렵다.
겉과 속이 다른 걸 눈치채지 못하게 가급적 짧게 말하고 있지만, 어린아이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는 다 잊어버린 거야.
어린아이였던 건 정말 오래 전의 일이고, 그나마도 거의 기억이 나지 않으니까.
그래도 이런 건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평민 차림에 지저분한 모습을 한 아이를 도련님이라고 부르면 당장 병사들에게 잡혀갈 테니까.
“아···!”
유모가 당황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지요. 이제 도련님이라고 부르면 안 되겠지요. 나도 참. 이름을 하나 정해야겠습니다. 도련님의 중간 이름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혹시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고···.”
유모가 허둥지둥하며 곤란해한다. 자신이 모시던 사람에게 반말을 하고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사실에 당황하는 것 같았다.
정진영은 잠시 유모의 모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진영.”
“네?”
“진영, 내 이름.”
혀 짧은 발음으로 말하자, 유모가 눈을 깜박였다.
“지녕···? 그 이름이 좋으신가요?”
고개를 끄덕이자, 유모가 곤란한 듯 다시 이름을 중얼거렸다.
“지녕···지녕···. 발음이 어려운 이름이네요. 코레아 왕조 쪽 이름은 발음이 조금 어렵다고 들었는데, 혹시 어머님에게 들었습니까?”
“···.”
유모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루디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도련님, 죄송하지만 그 이름은 너무 이목을 끌 것 같아요. 지니라고 하면 어떨까요?”
“괜찮아.”
고개를 끄덕이자, 유모가 그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럼, 갈까요, 아니, 갈까···?”
자신에게 영문 모를 이름으로 불리고, 거기에 더해 반말 듣는 처지가 되어버린 정진영의 처지가 괴로웠던 걸까.
어색하게 말한 유모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나는 괜찮아.”
정진영은 그렇게 말하고, 조금이라도 유모의 부담이 적어지도록 그녀의 목에 작은 팔을 뻗었다.
벽에 붙어 있는 문을 열자, 가파른 나무 계단이 위로 이어져 있었다.
유모가 서둘러 계단을 올라간다.
곳곳에 늘어져 있는 거미줄이 연신 얼굴에 붙어왔다.
유모의 몸이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삐걱거리는 나무 소리가 음침하게 울렸다.
그 소리에 왠지 모를 소름이 돋았다.
저 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학살된 사람들? 병사? 피난민?
이 공간을 나가는 것이 조금 두려워졌다.
하지만 유모의 다리는 거침이 없다. 성큼성큼 걸어서 순식간에 마지막 계단을 올라갔다.
‘역시···.’
지금이라도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상관없이, 유모의 두툼한 손이 계단 위의 판을 밀어 올렸다. 네모난 나무 판은 한손으로도 쉽게 열렸다.
희미한 빛이 구멍 안으로 들어온다.
유모가 얼굴을 내밀어 주위를 살피더니 안도의 숨을 쉬었다.
정진영은 유모의 품에서 내려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버려진 헛간인 것 같다.
비밀통로의 구멍 앞에는 망가진 탁자와 의자가 여러 개 있었다.
그 옆의 구석에는 짚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고, 동그란 염소 똥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깨진 사기 그릇, 나무로 된 판자도 널려 있다.
하지만 당연히, 진짜로 버려진 헛간은 아니다.
바로 앞에 무거운 탁자가 쌓여있는데, 비밀 통로의 입구에는 가벼운 지푸라기만 올려져 있을 뿐이라니, 그런 교묘한 우연이 있을 리 없다.
필시 누군가가 세심하게 관리해왔을 것이다.
헛간의 앞과 옆에는 출입문이 있었다. 안쪽에서 막대기를 걸어 잠글 수 있게 되어 있다.
뒤쪽으로는 사람 몸이 빠져 나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창이 하나 나있었다.
문은 모두 닫혀 있지만, 그 옆으로 몇 군데 자연스럽게 작은 틈이 나 있다.
정진영이 헛간을 살피는 동안, 유모는 다시 비밀 통로 입구를 닫고 지푸라기와 모래를 그 위에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혼자 중얼거린다.
“···이리와, 그래, 진영, 그렇구나···.”
입에 붙은 존댓말을 없애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 멀리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정진영은 헛간의 틈 사이에 눈을 대고 밖을 보았다.
드문드문 서 있는 나무 너머로 말 탄 남자들이 보였다.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사 차림이지만, 진짜 기사인지 아니면 단순한 기병인지는 잘 모르겠다.
손톱만큼 작게 보이기도 했지만, 중세 체험 1일이기 때문에 판단할 만한 자료가 없었다.
그러니 가까이에서 본들 아마 모를 것이다.
다만, 멀리에서 봐도 공작가의 경비 대장보다는 차림새가 저렴해 보였다.
“성 쪽으로 가고 있군요.”
어느새 유모가 그의 뒤에 와서 중얼거렸다. 생각 탓인지 유모의 얼굴이 굉장히 파리했다.
잠시 입술을 깨물고 있던 유모가 불쑥 입을 열었다.
“위험할지도 모르겠어요. 어느 가문에나 비밀 통로 하나 둘 있는 건 비밀도 아니죠. 어쩌면 도련님이 살아있다는 걸 알아차릴 지도 몰라요.”
조금 아까 연습한 것 같은데 말투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 점을 지적하자, 유모가 당황하며 사과를 해왔다.
적병이 지나간 뒤, 유모는 그를 데리고 헛간에서 나왔다.
그리고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말이나 마차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런 것까지는 준비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그를 안고 걷던 것이, 어느새 등에 업고 걷는 걸로 바뀌었다.
가방은 앞으로 멨다.
유모가 힘들어하는 걸 보기 어려워, 정진영은 중간에 걷겠다고 한 번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이 몸의 주인은 워낙 어리다.
게다가 공작가의 소중한 후계자.
평소에 걷지 않은 탓인지 평범한 아이 수준 정도로도 걷지 못했다.
“미안해요.”
정진영이 등에 업혀 고개를 숙이자, 유모가 힘든 숨을 쉬면서도 빙긋 웃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귀족의 아이들은 서너 살이 될 때까지 건물에서 거의 나오지 않지요. 도련님도 오늘까지 한 번도 저택에서 나온 적이 없습니다. 이제 겨우 네 살이니까요. 거의 방에만 있으셨지요. 걸을 수 없는 건 당연한 거예요.”
말투를 지적할까 했지만 그만뒀다.
가만히 유모의 등에 얼굴을 대고 있다가 물었다.
“유모는 왜 그렇게 강해?”
“저는 몰락 귀족 출신입니다. 오라버니가 용병을 해서 먹고 살았지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검을 배웠어요.”
유모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혼인도 못하고 나이들어 가는 걸 공작님이 주워주셨죠.”
목소리가 애잔하다.
살짝 머리를 들어 유모의 옆 얼굴을 보았다. 눈동자가 살짝 젖어 있었다.
‘아···!’
그 순간 알아버렸다.
이 여자는 그 공작을 사랑하는구나.
그리고 아마 애인이었을 거다.
공작이라는 단어에 평범하지 않은 단맛이 배여 있었다.
아무리 유모라고 해도 왜 마지막까지 망해가는 공작가의 유아에 매달려 있나 궁금했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여서 그랬구나.’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행복하게 사는 걸 곁에서 보면서 그 아이를 기르다니, 정진영의 머리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식으로 아내와 애인을 함께 두는 남자의 머리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의 아버지라는 사람, 그렇게 좋은 남자는 아니었나 보네.’
좋은 남자는커녕 최악이지 않을까.
유모가 왠지 불쌍해져서 꼬옥 끌어 안았다.
< 도망가는 길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