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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3화 (3/201)

< 마녀의 약 >

* * *

구슬은 단단해 보였지만, 입속에 들어가자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아 없어졌다.

그 순간, 배꼽이 약간 뜨거워졌다.

가만히 아래를 쳐다보자, 배꼽 밑의 문장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마녀의 약은 당신께서 충분히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을 때까지 지속됩니다.”

배꼽에서부터 시작된 열이 조금씩 몸 전체로 퍼졌다.

“약은 문장과 검은 머리를 감추어 주니, 당분간은 신분을 숨길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마력이 오르면 효과가 사라집니다. 마녀의 말에 의하면 보통 20세 전후가 될 것 같지만, 더 이를 수도, 늦을 수도 있습니다.”

경비 대장의 말이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눈이 깜빡깜빡, 시야의 모든 것이 점멸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든다.

자기도 모르게 머리가 약간 뒤로 넘어갔다.

경비 대장이 공손히 손을 내밀어 그를 지탱해 주었다.

정확하게 보이는 것은 아닌데, 그걸 알 수 있었다.

이 느낌은 무엇일까.

방금 먹은 구슬 때문인가.

잘 모른다.

유모의 통통한 몸이 바로 뒤에서 느껴졌다.

머리가 몽롱하고 혓바닥이 굳었다.

정진영은 유모의 몸에 등을 기대고 섰다. 몸이 흔들흔들 제멋대로 움직였다.

“부디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경비 대장이 정진영의 발등에 입을 붙이며 경건히 말했다.

머리는 흔들흔들 허공을 향해 있는데, 경비 대장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

정말 이상하다.

“나의 작은 주여, 그대의 앞날에 축복 있기를.”

쿠웅, 쿠웅, 집무실의 이중문을 뭔가로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통나무 같은 건지, 아니면 작은 폭발물 같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적이 문을 파괴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는 듯, 경비 대장이 몸을 일으키며 유모에게 말을 건넸다.

“출발하십시오.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합니다.”

“경비 대장, 당신은···.”

“나는 그대가 출발한 뒤 마도구를 폭발시킵니다. 작은 주인이 사망했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

유모는 고개를 끄덕이고 재빨리 정진영을 안았다.

아, 경비 대장은 죽을 작정이구나.

약간 몽롱한 가운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진영은 감기는 눈을 억지로 떴다. 경비 대장을 향해 얼굴을 고정하고, 굳어 있는 혓바닥을 힘들게 움직였다.

“···안···돼···함께···.”

그가 말하고 싶은 걸 알았던 모양이다.

경비 대장이 빙긋 웃었다.

“사랑하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면 그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으리.  내 작은 주여, 부디 생명을 소중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유모가 그를 안은 채 계단을 뛰어 내렸다.

곧바로 머리 위에서 사각형의 커다란 구멍이 작은 소리를 내며 닫혔다.

뭐야, 이 사람들 왜 이렇게 진지해. 모두 함께 도망가면 되지 않아? 어째서 누군가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거야.

소리로 내지 못하는 말이 마음속에서 울려 퍼졌다.

왠지 마음이 너무 애절하다.

정진영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몸이 어려졌기 때문인지, 마음마저 어리게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계단은 생각보다 좁고 길었다.

울퉁불퉁한 벽에는 위에서 본 것보다 작은 등이 드문드문 붙어 있었다.

지구에서 자주 보이는, 비상구를 가리키는 등 같은 느낌이었다.

유모는 그를 안고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 마침내 마지막 층계에 닿았다.

거기에 펼쳐진 것은 어둡고 축축한 미로였다.

아마도 상당히 깊은 지하일 것이다.

길게 연결된 복도는 서늘하고 추웠다. 벽과 바닥에서 냉기가 피어올랐다.

어두컴컴한 복도에는 군데군데 계단을 내려올 때 보았던 것과 같은 작은 등이 붙어있었다.

양쪽 벽에는 굵은 선이 여러 개, 어지럽게 그려져 있었다.

빨강, 노랑, 파랑···. 여러 가지 색이 아이가 그려 놓은 것처럼 비뚤비뚤 이어져 있다.

유모가 오른쪽 벽을 보았다.

거기에도 마찬가지로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중 눈에 크게 띄지 않는 검은 선이 있었다.

유모가 안심한 듯 숨을 쉬며 검은 선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몽롱하던 머릿속도 이제는 어느 정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정진영은 정신없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몸을 굳히며, 단단히 유모에게 달라붙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곳곳에 거미줄이 있다.

얼굴에 가느다란 실 같은 거미줄이 여러 번 달라붙었다.

손을 뗄 수 없어서, 그때마다 유모의 목에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유모가 한참을 뛰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폭음이 울렸다.

콰콰콰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지하 전체가 흔들렸다.

바닥이 정신없이 흔들리고, 먼지가 우스스 떨어져내렸다.

핵폭탄이 터진 상황에서 방공호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다.

유모가 휘청하며 쓰러질 뻔했다.

복도의 천정과 벽에는 나무나 철로 된 구조물이 군데군데 있었다.

잘못하면 그것들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할 만큼 진동이 컸다.

하지만 이런 경험은 없었던 것인지, 유모는 몸을 세워 다시 움직이려고 했다.

황급히 이곳을 벗어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

잘못하면 떨어져 내리는 물건에 머리를 맞아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다.

정진영은 작은 손을 뻗어 유모의 머리를 껴안으며 외쳤다.

“기둥! 기둥으로 가서 엎드려!”

당황한 유모가 주춤했지만, 이내 그의 말에 따랐다.

곧바로 근처에 있는 굵은 기둥으로 가더니, 그의 작은 몸을 가슴에 당겨 엎드린다.

그와 동시에,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이 있던 자리에 천정을 지지하던 나무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조금만 늦었으면 그 밑에 깔렸을 것이다.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아까보다 더 큰 폭음이 들렸다.

쿠콰콰콰콰콰콰쾅!

다시 한 번 지하의 긴 통로가 장난감처럼 흔들리고, 먼지와 지지대 등이 부러져 떨어졌다.

조금 떨어진 곳은 아예 천정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진동은 잠시 이어지다 멈췄다.

유모는 허리가 빠진 것 같다.

잠시 동안 앉아서 움직이지 못했다.

이런 진동보다는 사람을 죽이는 게 더 충격적일 것 같은데, 이쪽 세계 사람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

정진영은 어린애 특유의 통통하고 짧은 손을 내밀어 유모의 등을 문질렀다.

“유모, 이제 가자.”

짧은 발음으로 그렇게 말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유모가 그를 안고 일어났다.

문득 그녀가 중얼거렸다.

“과연 주인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런 일에도 놀라지 않으시고···.”

특별히 그가 겁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군대를 전방으로 다녀온 남자라면 이런 상황을 한두 번은 겪었을 것이다.

매일 벌어지는 일은 아니더라도, 방공호에 뛰어들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신참을 보며 선임들이 웃을 만큼은 벌어지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자주 겪으면 익숙해진다.

처음에는 포격이 있을 때마다 방공호에 뛰어들던 신참들도 어느새 다음 녀석들이 들어와 똑같은 행동을 할 때마다 웃게 되어 있었다.

정진영도 그런 식으로 익숙해졌다.

지금처럼 폭격당하는 것도 아닌 상황이라면, 조금 놀랐을 뿐 두려울 일도 없다.

문득 가녀린 여성의 모습이 뇌리 속에 떠올랐다.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였다.

침대에 앉아 슬픈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내 귀여운 아가. 미안해요. 엄마가 너무 약해서···. 하지만 사랑하고 있어. 내 인생 전부를 그대와 바꾸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사랑해요.]

어머니, 이 몸을 낳아준 여성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그를 안고 있다가 살며시 그 여성의 눈까지 몸을 낮췄다.

여성은 잠시 정진영을 보고 있다가 그를 안고 있는 사람에게 시선을 올렸다.

어머니가 웃는다.

[이 아이를 부탁해요. 당신과 함께 해서 너무 행복했어요.]

굵고 낮은 목소리가 그의 머리 바로 위에서 흘러 나왔다.

[나도 행복했소.]

어쩌면, 그를 안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였던 것 같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아마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자신이 이 몸에 빙의된 게 아닐까 생각했었지만, 그 기억으로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는 제대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같다.

그리고 아마 아버지의 사랑도, 어머니의 애정도 충분히 받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한 개 돌아왔기 때문일까.

갑자기 눈물이 또르륵 굴러 떨어졌다.

정진영은 달리는 유모의 목에 손을 두르고 꼭 끌어안았다.

그가 기억한 그 장면의 한 구석에, 유모도 있었다.

어머니의 발치에 서서, 유모는 걱정스러운 듯이 가만히 그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이 세상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그를 지키고 싶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를 직접 낳은 어머니도, 당주인 아버지도 이 어린 몸을 사랑했을 테지만, 가장 가까이에 머물며 24시간 아낌없이 애정을 부어준 사람은 이 푸짐한 몸집의 여성이었을 것이다.

또 한 명의 길러준 어머니, 라는 것이 아닐까.

군데군데 무너져 내린 지하 복도를 한참 동안 달렸다.

선이 이어지는 중간에는 몇 개의 문이 있었다.

하지만 검은 선은 계속 이어져 있다

유모는 문으로 나가지 않고, 계속 검은 선을 따라 달렸다.

굉장히 오랜 시간, 긴 거리를 달렸던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검은 선이 끝나며 한 개의 작은 문에 도착했다.

미로는 계속 다른 길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검은 선은 끊어져 있었다.

유모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성의 지하 미로에는 여러 길이 있지만 상당 부분 함정으로 연결 되어 있어요. 잘못된 문으로 들어가면 그대로 죽는답니다.”

유모는 그를 내려놓고, 문의 주변을 탐색하듯이 서성였다.

벽을 만져보고 문 위에 손을 올려 더듬는다.

“뭘 하고 있는 거야?”

그가 묻자 유모는 여전히 문 주변을 살피면서 대답했다.

“도망의 준비가 되어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다른 곳과 싸우고 있었으니까요. 언제든지 주인님이나 도련님이 도망할 수 있도록, 아, 찾았어요.”

유모는 흐트러진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벽을 두 손으로 뜯어냈다.

깜짝 놀랐다.

손으로 벽을 뜯어내다니, 그건 괴물 아닌가.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것은 벽이 아니라 두꺼운 천 같은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가죽 이었을까.

벽과 비슷한, 두꺼운 천을 진흙 같은 것으로 발라 벽에 붙여 놓은 듯했다.

그 천 안쪽에는 작은 공간이 있어서 등에 짊어질 수 있는 배낭 같은 가방이 몇 개 들어 있었다.

개중에는 허리에 묶을 수 있게 끈이 달린 긴 천주머니도 있다.

유모는 가방을 꺼내 안을 확인한 뒤 훌렁훌렁 옷을 벗기 시작했다.

속옷 차림이 되자, 가장 먼저 허리에 천주머니를 감는다.

천주머니 끝에 달린 끈을 단단히 묶으며, 유모가 말했다.

“이 안에는 금반지나 작은 은제품이 들어있습니다. 도련님은 어리시니 잘 모르겠지만, 혹시 제가 쓰러지면 이걸 꼭 가져가 주세요. 여기를 잡아당기면 쉽게 풀어집니다.”

유모가 매듭을 지으며 그에게 보였다.

유모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안다.

지구의 어머니도 전쟁 대비라면서 여유가 생길 때마다 금반지를 사모았다.

너무 단위가 큰 건 안 된다. 그런 건 정말 전쟁이 터졌을 때 나눌 수 없기 때문에 곤란하다.

그래서 어머니가 모으는 것은 돌 반지나 금 쌍가락지 같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걸 살 때마다 굵은 줄에 꿰면서 어리던 그에게 말하곤 했다.

[전쟁이 나면 이걸 허리에 묶고 도망가는 거야. 뭐? 보인다고? 멍청하기는. 당연히 옷 속에 묶는 거지.]

자랑스러워하며 어머니가 한쪽 눈을 찡긋 하던 게 기억에 남아있다.

[전쟁 때는 한 돈짜리나 반 돈짜리 금반지로 생명을 구할 수도 있는 거다. 네 외할머니가 실제로 피난 갈 때 금반지로 우리를 구했으니까.]

씩씩한 어머니였다.

아, 어머니 생각을 하니 코끝이 시큰해지네.

정진영은 코를 훌쩍거리며 유모의 얼굴을 보았다.

어쨌든 유모가 하고 싶은 말은 안다.

그렇지만 유모가 죽었다고 해서 네 살 어린아이가 금반지 더미를 가지고 다녀봐라.

그걸로 목숨을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 때문에 죽는다.

어쩌면 유모도 그렇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 없이 여자 혼자인데 금붙이까지 가지고 있다면 그 끝이 좋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또 모르지. 국경이라도 넘어갈 수 있다면 뇌물로 쓸 수 있을지도.’

자기도 모르게 작은 입술에서 한숨이 흘러 나왔다.

< 마녀의 약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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