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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2화 (2/201)

<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 >

* * *

정진영은 여자의 품에 안긴 채 계단을 내려, 어두운 복도를 달려갔다.

이 복도는 건물의 외곽을 감싸고 있는 것 같다.

계단과 복도가 연이어 나오는데, 중간 중간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었다.

어떤 통로는 사람들이 많이 오갈 것처럼 넓고, 어떤 통로는 어둡고 좁다.

여자는 경비 대장의 지시에 따라 좁은 통로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가며, 미로 같은 길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정신없이 뛰었다.

경비 대장은 때로는 앞장을 서고, 어떤 때는 뒤를 살피면서 여자를 안내했다.

중간에 몇 번이나 적병과 만났지만 일행의 걸음을 멈추지는 못했다.

적병이 그들을 발견하기도 전에 경비 대장의 칼이 날아가 박혔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뭐랄까,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정진영이 아는 칼싸움은 찌르고 베는 것이다.

펜싱처럼 창창창창 소리를 내면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런 거.

하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어떻게 봐도 칼로 상대를 후려 패는 것처럼 보였다. 칼을 납작한 몽둥이처럼 사용하는 느낌이다.

경비 대장의 힘은 엄청났다.

커다란 칼을 자유자재로 휘둘러 적을 두들겨 팬다.

경비 대장의 칼을 한 번 받을 때마다 적병이 나무토막처럼 바닥에 처박혔다.

그렇게 가끔 적병을 물리치면서, 한참을 달렸다.

하지만 붉은 융단이 깔린 복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앞에 있는 것은 수십 명의 적병이었다.

적은 아직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정진영은 심장이 쪼그라들것 같은 공포에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이라도 다시 되돌아가면 괜찮을지 모른다.

하지만 경비 대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저 앞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집무실은 두꺼운 이중문으로 되어 있으니, 들어가기만 하면 잠시는 시간을 벌 수 있어요.”

집무실 안에 있다는 비밀 통로 때문인 것 같다.

경비 대장은 그쪽으로만 가면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적이 성안까지 쳐들어올 정도라면 이미 이 나라, 혹은 이 영토는 이미 적에게 점령된 상태일 것이다.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도망갈 수 있는 걸까?

길게 생각할 틈은 없었다.

경비 대장의 말에 반대하지도 않고, 여자가 퉁퉁한 손을 내밀었다.

“알았어요. 칼을 주세요.”

경비 대장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히죽 미소가 떠올랐다.

“놈들은 신경 쓰지 말고 곧바로 집무실을 향하십시오. 다른 놈들은 내가 처리할 테니, 당신은 부디 작은 주군을···.”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걸리적거리는 치마를 칼로 찢어 하단을 잘라냈다.

그리고 상냥한 눈으로 정진영을 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용감하시군요, 도련님. 울지도 않으시고.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하지만 여자의 입가가 약간 경련하고 있었다. 칼을 잡은 손에도 힘이 들어가 있었다.

여자는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안심시키려 계속 웃어 보이지만, 이 여자도 두려울 게 분명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정진영은 자기도 모르게 작은 손으로 여자의 어깨를 잡았다.

이런 몸이 되기는 했지만, 그는 정상적으로 군대를 다녀온 성인 남자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쨌든 여자보다 강하다. 어쩌면, 아마, 강하겠지?

하지만 어린아이의 몸으로는 뭔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제대로 뛸 수나 있는 걸까 싶을 만큼  몸은 작고, 총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당연히 창이나 칼 같은 무기는 사용해본 적도 없었다.

‘아니, 총이 있어도 이몸으로는 무리구나.’

결국 생각하다 못해 정진영이 꺼낸 것은 격려의 말이었다.

“···아줌마···힘내.”

미안, 뚱뚱한 귀부인 씨!

당신이 누군지 모르니 아줌마라고 할 수 밖에 없다.

한데, 방금 자신이 한 언어가 아무래도 이상했다.

자연스럽게 말이 나오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한국어가 아닌 거다.

영어와 독일어를 섞은 것 같은 언어였다.

여자가 약간 놀란 것처럼 눈을 뜨더니 빙긋 웃었다.

“도련님, 평상시처럼 유모라고 불러주세요.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모였나.

이 아이, 아니, 자신인가, 어쨌든 부모는 어쩌고 유모만 곁에 있는 걸까.

실제로 어떤지는 모르지만, 정진영은 이 아이의 곁에 부모가 거의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왠지 그냥 알 수 있다.

부모 대신 이 유모라는 여자가 항상 곁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직무유기의 부모를 향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사정이 어떻든 아이를 낳았으면 제대로 기르라구.

“···.”

아니,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 중이야.

정진영의 몸이 훌쩍 흔들렸다.

여자, 아니 유모가 그를 한팔로 번쩍 안아 들었던 것이다.

“도련님, 죄송하지만 저를 꼭 붙잡고 있어주세요. 절대로 놓치시면 안 됩니다.”

물론이다.

정진영은 두 팔로 유모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유모가 경비대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 대장은 곧바로 숨어 있던 기둥에서 몸을 내밀어 앞으로 달려갔다.

유모가 정진영을 안고 그 뒤를 따른다.

경비 대장의 망토가 펄럭이며 시야를 가렸을 때, 적병이 그들을 발견하고 고함을 질렀다.

“적이다!”

정진영과 경비 대장을 향해 저마다 무기를 들고 달려온다.

그때, 머리에서 뭔가가 벗겨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신도 모르고 있었지만 모자를 쓰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검은 머리다! 저 아이, 검은 머리야!”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다!”

“잡아라!”

갑자기 적병이 소란스러워졌다.

몇 사람이 이곳에서 멀어지면서 사람들에게 외치고 있었다.

“공작의 후계자다! 후계자가 여기에 있다!”

“후계자 에디에루다!”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는 이쪽이다!”

정진영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그것을 막는 것처럼, 경비 대장이 자신의 망토를 휙 벗었다.

망토를 고정하고 있던 장식이 후두둑 바닥에 떨어지고, 정진영은 순식간에 망토를 뒤집어썼다.

검은 머리를 보이는 게 좋지 않은 것 같다.

그나저나, 공작가의 아들이었어. 그것도 후계자.

가슴이 아프다.

모처럼 좋은 신분으로 태어났는데, 정신 차리자마자 몰락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가고 있다니, 이건 너무한 거다.

낯선 세계에 던져두는 거라면 전생자 특전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닐까.

‘아!’

정진영은 문득 생각난 대로 작게 중얼거렸다.

“상태창!”

···.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투명창도, 스킬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젠장, 전생자 특전도 없었어.

우울해졌다.

‘뭔가 특별한 능력이라도 있으면 지금의 난관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저 아무 힘없는 어린아이일 뿐인가.

침울해진 정진영을 안은 채, 유모가 칼을 휘둘렀다. 두 사람을 덮쳐오던 병사가  화려하게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유모는 경비 대장이 적을 막는 동안 벽에 바짝 붙어 달렸다.

그때, 한  병사가 다른 사람들 뒤에 숨어 창을 내밀었다.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 병사를 본 건 정진영 한 명 뿐이었다.

병사의 창은 곧바로 유모의 가슴을 노리고 있었다.

그대로 두면 유모는 죽는다.

하지만 싸우기는 커녕 달리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작은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정진영은 뒤집어쓰고 있던 망토자락을 냅다 앞으로 내밀었다.

망토자락이 창을 멈추지는 못했다.

허나 그것으로 충분했던 것 같다.

정진영의 행동이 유모의 주의를 끌었다.

유모는 뚱뚱한 몸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민첩하게 몸을 뒤로 물렸다.

창이 빗나가며 드레스의 일부를 찢었다.

다음 순간, 몸을 뒤튼 경비 대장의 칼이 창 든 병사의 팔을 잘랐다.

병사의 팔과 함께 창이 바닥에 떨어진다.

몸에서 떨어져 나갔는데도 손가락은 여전히 창을 쥐고 있었다.

무섭다.

정진영의 몸이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뭐야, 왜 이제 와서 이렇게 떨려!’

정진영은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답은 이미 알고 있다.

지금까지는 직접적인 생명의 위기가 없었다.

영화 보듯이 주변에서 벌어지는 참변을 구경하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방금 전, 그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이 죽을 뻔한 걸 보았다.

경비 대장의 칼이 조금만 늦었으면, 혹은 병사의 창이 조금만 각도를 틀었으면, 어쩌면 죽는 것은 유모나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저기에서 둔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뒤늦게 공작의 후계자를 잡으려는 적병들이 몰려온다.

정진영이 떨고 있는 동안, 경비 대장과 유모는 목표로 삼았던 집무실로 뛰어 들었다.

안에는 적병이 한 명 있었다.

귀중품을 찾고 있었던 걸까.

바깥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적병은 무방비로 등을 돌린 상태였다.

경비 대장은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닫았다.

적병 한 명이 문틈에 끼었지만, 경비 대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대로 문을 누른 채, 칼을 거꾸로 들어 적병의 얼굴에 꽂았다.

칼이 턱을 뭉개면서 박힌다.

적병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경비 대장이 칼을 빼면서, 움직이지 못하게 된 적병을 밖으로 밀었다.

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그 사이, 집무실 안을 뒤지던 적병이 몸을 돌렸다.

적병의 손에는 무기 대신 은으로 된 촛대와 금으로 만든 장식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손에서 은촛대가 떨어졌다.

적병이 무기를 들려고 몸을 움직였지만, 유모가 더 빨랐다.

유모가 정진영을 내려놓고, 앞으로 달리면서 검을 위에서 아래로 쳐내린다.

적병은 지푸라기로 만든 허수아비처럼 어이없게 쓰러져버렸다.

경비 대장이 안쪽의 이중문을 닫고 몸을 돌렸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잠시 뒤에는 놈들도 마도구를 가져와 문을 파괴할 겁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경비 대장이 집무실 정면에 놓인 육중한 책상 뒤로 향했다.

의자를 밀고 양탄자를 걷는다.

얼핏 볼 때는 그냥 바닥인 것 같았다.

하지만 경비 대장이 바닥을 손가락으로 쓰다듬다 어느 지점에서 강하게 누르자 네모난 모양으로 바닥이 툭 떨어졌다.

그 밑으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복도가 나옵니다. 오른쪽 벽에 있는 검은 선을 따라 가세요.”

“알았어요.”

유모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경비대장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전에 준비할 것이 있습니다.”

경비 대장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문진을 잡았다.

책상 모서리에 톡 건드려 깨자, 안에서 손톱만한 작은 구슬이 나왔다.

검은 색의 구슬이었다.

하지만 구슬 주위에는 작은 빛이 반짝거리며 돌아다녀, 마치 밤하늘의 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쁘다.

경비 대장은 무릎을 꿇고 정진영의 얼굴을 보았다.

“아직 어리신 작은 주인께서 앞으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의 이름은 에디에루 페레 세루히 마치 와토린구. 디코콰리아 왕국의 가장 고귀한 가문 와토린구 공작가의 후계자이십니다.”

경비 대장이 그의 옷에 손을 댔다.

“당신의 어머니는 코레아 왕조의 피를 잇고 있습니다. 검은 머리는 코레아 왕조의 혈통이라는 증거지요.”

경비 대장은 정진영의 상의를 걷어 배꼽을 드러냈다.

정진영이 고개를 내리자, 배꼽 밑에 두 개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경비 대장은 정진영이 문장을 보는 걸 확인하면서 말했다.

“이 두 개의 문장이 당신의 신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에게 들키면 안 되는 일. 이 문장과 검은 머리를 감춰야 합니다.”

경비 대장이 정진영의 입술에 구슬을 가까이 했다.

“이것은 당신께서 태어났을 때 마녀에게 의뢰하여 만든 것입니다. 이걸 드시면 혈통의 증거가 감춰집니다.”

경비대장이 구슬을 정진영의 입에 밀어 넣었다.

<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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