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신 차려보니 이세계, 4살 아이가 되어 있었다 >
* * *
회사 빌딩의 전기가 갑자기 나간 것은 한 시간 전쯤이었다.
더운 여름이다 보니, 전기 사용량이 급증하면서 어딘가에 부하가 걸렸거나, 아니면 노후된 낡은 전기 배선이 결국 끊어졌던가, 그랬던 것 같다.
전기가 끊겨 방송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단지, 누군가가 아래층에 내려가서 이야기를 주워듣고 와 그렇게 떠들고 있었다.
“하아···. 덥다.”
정진영은 숨이 턱턱 막히는 허공을 향해 한숨을 쉬었다.
지구의 여름은 점점 더 더워지고 있다.
온난화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아마존 밀림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인간이 자연을 훼손한 탓일 거다.
인간이 자연을 좀먹고 있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고작 한 시간 에어컨이 나오지 않았다고 이렇게 더울 리가 없다.
창문을 활짝 열어 놓았지만 들어오는 건 실내보다 더 뜨거운 바람뿐이었다.
더워 죽을 것 같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다.
진심 죽을 것 같아요.
정진영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축 늘어져 앉았다. 허리뼈가 없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무실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늘어져 있었다.
다들 몸에서 물이 줄줄 나온다. 땀이 꼭 물처럼 보였다.
결국 12시가 되기 전부터, 동료들은 밥 먹는다는 핑계로 에어컨 있는 외부 건물을 찾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정진영도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이 자리에서 벗어나자.
사무실 밖으로 나갔지만, 엘리베이터는 작동하지 않았다.
뭐, 전기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수십 층을 걸어서 내려가야 한다.
사람들이 한숨을 쉬며 계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진영의 입에서도 긴 한숨이 흘러 나왔다.
정진영은 복도를 지나 비상구로 향했다.
계단을 막 밟고 내려가려던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정진영 씨!”
습관이라는 건 무서운 거다.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발을 허공에 둔 상태에서 무리하게 몸을 뒤트느라 균형이 무너졌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고, 한 박자 늦게 생각했다.
하지만 후회해봤자 버스는 이미 떠나갔다.
몸이 조금 뒤로 기운 상태였다.
서둘러 바로잡으려고 했지만, 더위 때문에 축 늘어져 있던 몸은 제때에 움직이지 못했다.
어, 어, 하는데 시선이 천정으로 향하면서 몸이 붕 떴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X됐다.
이제 겨우 스물여덟.
일 년 전에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
주변에서부터 어필해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고, 여자들의 응원을 받으면서 서서히 접근해서, 타이밍을 잡고 고백한 것이 석 달 전이다.
애매하게 대답하며 도망치려는 여자를, 몇 달 동안 살살 몰아 간신히 좋은 대답을 받았다.
그게 이틀 전.
첫 키스도 그날이었다.
이제부터 교제 시작이라고 들떠 있었는데 이꼴이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놈의 세상!
속으로 욕을 하는데, 다시 한 번 온몸에 충격이 오더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은, 이렇게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죽으면 얼마나 웃기는 일이 될까 하는 거였다.
훗날 회사 사람들은 우스개처럼 그를 떠올리면서 말하겠지.
아, 예전에 말이야, 아주 웃기게 죽은 사람이 있었어요. 누가 민 것도 아닌데, 혼자서 계단을 구르는 바람에 죽어버렸지 뭐야. 소설보다 현실이 더 재미있지 않아? 하하하. 이 세상에는 그런 웃기는 죽음도 있는 거야, 라고.
* * *
챙! 챙! 챙!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던 걸까.
어디에선가 철이 강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럽다.
안 그래도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머리가 아파 죽겠는데, 저 소리 때문에 두개골이 빠개지는 것 같다.
그래도 그 뿐이면 괜찮을 것이다.
철소리는 상당히 멀리 들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누군가가 그를 끌어안고, 바로 머리 위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도련님! 도련님! 아아, 도련님! 정신 차리세요.”
여자가 두툼한 가슴에 그의 머리를 끼워 안고 꽥꽥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이가 좀 있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목청이 크다.
여자의 소리가 피부를 통해 직접적으로 울리는 것 같았다.
‘제발 좀 그만! 멀리···. 나한테서 좀 물러나 줘. 당신 목소리 때문에 머리도 아프지만, 가슴에 끼여서 숨도 못 쉴 것 같아.’
하지만 여자의 가슴 때문에 입이 막혀 있다. 당연히 말할 수도 없었다.
“으으···.”
신음 소리를 내며 팔을 버둥거린다.
여자를 손으로 밀어내려고 해봤지만,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게다가 무쇠로 만들었는지, 여자의 힘이 장사다.
산소가 모자라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커헉···커헉···. 진짜 죽는다. 공기···공기를 줘.’
모처럼 계단에서 떨어져도 살아남았는데, 이렇게 웃긴 이유로 죽으면 죽어도 죽지 못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몸부림치자, 그제야 눈치챘는지 여자가 몸을 떼어 주었다.
헐떡거리면서 눈을 깜박인다.
처음에는 캄캄하던 눈앞이 점차 밝아져왔다.
눈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인식하고, 정진영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가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인이 아니다.
외국인이었다.
옅은 눈썹은 얇게 정리되어 있고, 긴 콧대가 얼굴 중앙으로 곧게 내려와 있었다.
매부리코였다.
영화에서는 가끔 봤지만, 실제로 이런 코를 눈앞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코가 구부러져 있어. 게다가 무지하게 길다.
여자는 구릿빛의 머리카락을 빈틈없이 올려, 이상한 모양의 모자 속에 감추고 있었다.
머리통 만큼이나 큰 모자는 검고 빛나는 천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나이는 사십이나 오십 정도 되었을까.
살집이 좋은 여자였다.
전체적으로 퉁퉁한 편이었고, 무엇보다도 턱이 이중이다.
대단해.
이중턱도 처음 봤다.
여자는 튼튼해 보이는 옷감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갈색의 딱딱한 원단이 터질 것 같은 몸을 단단하게 감싸고 있다.
하지만 몸을 강하게 압박하는 드레스의 윗부분은 완전히 열려 있었다.
가슴이 반 밖에 안 들어가 있다.
가슴의 윗부분은 풍선처럼 부풀어 옷 위로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 가슴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것은 아주 얇은 천이었다.
큰 손수건을 목에 두른 것처럼, 주름진 천이 앞으로 내려와 가슴을 가리며 드레스 속에 들어가 있다.
그림이나 영화에서 볼 법한, 중세 유럽의 귀부인 모습이다.
여자가 비통한 얼굴로 외쳤다.
“도련님!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도련님? 나? 설마 지금까지 여자가 울부짖으며 말한 게 모두 나를 향한 거였나.’
아니, 그건 정말로 이상하지.
그는 스물여덟 살이다.
도련님이라는 말을 들을 나이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신분도 아니다.
정진영은 멍하니 여자의 뒤편을 보았다.
여자 뒤쪽으로 폭 좁은 계단이 가파르게 놓여 있었다.
벽돌로 된 벽에 기묘하게 생긴 등이 드문드문 걸려 있다. 횃불은 아니었지만, 전기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어딘가 중세 영화의 낡은 성을 연상하게 하는 복도였다.
오른쪽 벽에는 커다란 창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뚫려 있었다.
창 너머로 높은 천정과 넓은 홀이 보였다.
홀 안은 싸우는 병사들로 가득했다.
여기저기에서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진영은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향했다.
계단의 위쪽으로 커다란 아치형의 창문이 있었다.
창 너머로 가을을 연상하게 하는 파란 하늘이 보였다. 어쩐지 여름일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창 근처 계단에서 중세 기사 차림의 남자 몇 명이 칼을 휘두르며 싸우고 있었다.
정진영은 눈을 깜박였다.
‘대체 여기는 어디야! 설마, 영화 촬영 중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니겠지. 조금 전까지 회사 사무실에 있었는데 뜬금없이 영화 촬영 장소에 있을 리가 없다.
오히려···.
맙소사, 설마, 혹시, 어쩌면···?
‘설마, 나 이세계에 왔나.’
출퇴근 시간, 전철에서 잠깐씩 읽던 소설에 이런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그건 소설이다.
현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
그래, 아무래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지금 그는 구급차에 실려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머리를 강하게 쳤으니까 구급차에 실려가는 동안 꿈을 꾸고 있는 걸 거다.
그렇지, 분명히 그렇다.
‘제발 그렇다고 말해줘.’
잠시 멍하니 있는 동안, 여자가 허둥지둥 일어나 그를 한 팔로 끌어안았다.
“도련님! 서둘러야 합니다. 적이 성안까지 들어왔어요. 지금 당장 여기를 피해야 해요.”
꿈이니까 괜찮아. 피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정말일까.
“···.”
정진영은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살이 푸짐하게 오른 얼굴에 땀방울이 약간 솟아 있었다. 긴장 때문에 여자의 하얀 피부에 핏줄이 돋아나 있다.
꿈치고는 너무 리얼한 게 아닐까.
눈이 마주치자, 여자가 안심하라는 듯이 빙긋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도련님. 무서워하지 마세요.”
지금 알아차린 건데, 여자는 오른손에 둔탁해 보이는 칼을 들고 있었다.
여자의 어깨 너머로, 계단 위쪽에서 싸우던 남자 한 명이 뛰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남자의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아무래도 적인 것 같다.
남자가 들고 있는 칼에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리얼하다. 계단에 흐르는 피도, 벽에 튄 핏방울도, 너무 진짜처럼 보였다.
남자가 가까이 오자, 여자가 번쩍 팔을 들어 올리며 칼을 그었다.
칼과 칼이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바로 앞에서 생생하게 칼이 부딪치자, 겨우 이게 현실이라는 실감이 들었다.
남자가 다시 칼을 높이 쳐든다.
여자는 재빨리 정진영을 등 뒤로 숨기면서 후려치듯 칼을 남자에게 향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칼이 부딪치는 것은 아니었다.
적의 몸이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지더니, 대신 갑옷을 입은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다른 남자들과 달리, 이 사람은 전신을 덮는 은색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갑옷 곳곳에 고풍스러운 장식이 새겨져 있다.
남자의 어깨에는 검은 색의 긴 망토가 걸쳐져 있었고, 손에는 어두운 색의 장갑을 끼고 있었다.
코 밑으로는 멋지게 다듬은 콧수염이 양옆으로 뻗어 있다.
성인 남자의 매력을 물씬 풍기는 사람이었다.
잘 모르기는 해도 상당한 신분일 것 같다.
“경비 대장!”
여자가 안심한 듯 소리쳤다.
경비 대장이라는 남자는 여자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한 뒤, 정진영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작은 주인님! 성은 이미 함락되었습니다. 하지만 집무실로 가면 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비밀 통로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아, 그랬다.
지금 사람들의 모습을 감탄하면서 구경할 때가 아니었다.
뭐가 뭔지 모르지만, 지금 그는 전장의 한가운데에 있는 거다. 그것도 함락되는 측면에.
지금까지는 어딘지 모르게 영화를 보는 감각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비밀통로라는 말을 듣는 것으로 단번에 정신이 들었다.
정진영은 남자의 등 뒤를 보았다.
조금 아까까지 싸우고 있던 적병은 모두 시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경비 대장이 쓰러뜨린 것 같다.
바로 옆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도련님을 안겠습니다. 경비 대장은 이 칼을 잠시 맡아 주세요.”
여자가 말하면서 정진영을 번쩍 안았다.
경비 대장이 여자의 칼을 집어 들고 몸을 세웠다.
“···.”
아까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서양인이 동양인보다 덩치가 좋으니까 자신보다 클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 사람들은 너무 컸다.
게다가 지금 여자는 힘들지 않게 그를 번쩍 안아 올렸다.
정진영은 아까부터 눈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애써 무시하고 있던, 작은 손을 보았다.
‘설마···.’
손가락을 꼼지락거려본다.
그가 의도한 대로 작고 흰 손가락이 움직였다.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걸 보면 분명히 그의 것인데, 아무리 봐도 어린아이의 손이었다.
“···.”
백 번 양보해서, 이세계에 왔다고 치자.
하지만 그건 전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이가 되었다고는 생각도 못했어.
그것도 이렇게 함락중인 한가운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가 되어 있을 거라고는···.
정진영은 자신을 안고 달리는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이봐, 당신이 계속 부르짖고 있던 도련님이라는 것은 누구?
‘나는 대체 누가 된 거지?’
그리고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거야.
평화로운 현대 지구에서 살다 온 그에게, 이런 다크 판타지 같은 현실은 너무 힘든 게 아닐까. 짐이 너무 무겁습니다.
‘어쩌지. 다시 한 번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면 지구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제발 누가 정답을 알려줬으면 좋겠다.
할 수만 있다면 돌아가고 싶다.
아니, 제발 되돌려 주세요.
< 정신 차려보니 이세계, 4살 아이가 되어 있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