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에필로그(3)
세상은 서로의 존속을 건 끝없는 전쟁과 경쟁으로 엄청나게 달려나갔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정말 간단하게 살펴봐도, 함포 화력만 대전쟁 이전에 비해 수십배 이상 강해졌지. 심지어 크기나 소모값은 그대로인데 말이야."
"그렇군요."
"그래서 촌놈아. 넌 어디서 온 놈이냐?"
낄낄 웃던 그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담당 교관과의 면담이 잘 마무리 되는 것 같아 속으로 안도하고 있던 흠칫한 카를의 눈이 흔들렸다. 과거, 연맹에 구출 된 이후.
그는 연맹의 수호자 벤과 인연을 맺게 된 카를은 재능을 인정받아 힘을 기르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벤의 추천으로 연맹 소속의 행성에 보내져 정식으로 수호자가 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집도 마을도 잃은 고향 땅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오게 된 곳이 바로 이곳, 행성 바르크의 수호자 교육기관이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곳이로군."
"최, 최근에 연맹에 합류한 곳입니다."
그는 카를의 고향에 대해 듣더니 묻던 것에 비해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사실 이제 연맹 내부에서 고향이나 출신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특히나 이곳에서는 더더욱. 오직 적과 싸우고 강해진다는 목적 하나만을 두고 있는 곳이었다.
"그 옆에 여자애도 너와 같은 출신이냐."
교관의 눈이 카를의 옆으로 향했다. 카를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그를 대놓고 경계하고 있는 붉은 눈의 소녀에게.
카를과 같이 훈련생의 제복을 입었지만 이렇게 적대하니 교관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맞습니다. 얘가 낯을 좀 가려서요. 이름은..."
"로페즈님. 이제 슬슬 가셔야 합니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예비 훈련생 300명의 면담은 이걸로 종료한다."
다만 일이 바빴던 교관은 그녀의 이름을 듣기 전에 자리를 떠나야 했다. 카를은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말대로 자신들은 수백명의 훈련생들 중 하나였을 뿐이니까.
이 수백명 중 견습이 되는 것도 일부이고 정식으로 수호자가 되는건 더 일부였다.
그리고 그녀도, 애초에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하지만 벤 님이 교관에게 잘 보이라 했는데."
"언제나 같아 카를."
쓰게 웃은 카를이 그녀를 보며 말하니 붉은 입술이 휘며 아름다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실력으로 증명하면 되는거야."
그녀는 웃으며 아무 문제 없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두 사람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이미 잘난 어른이면서, 콧대 높은 왕실 기사들을 정면에서 쳐부수고 실력만으로 이 자리에 온 상태였으니까.
"우리 교육원이 외지에 있긴 하지만 그래도 온갖 세상에서 날고기는 이들이 몰려온다. 살아남으려면, 보통 재능으로는 힘들거다."
그날 이후 훈련생들은 훈련에 들어갔다. 훈련생으로 시작하는건 보통 각지에 파견된 수호자들에게 재능을 보인 유망주들이며, 아직은 원석 단계인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같은 원석이라도 그 근본이 다른 이들이 있는 법.
채 몇 달 지나지 않아 소위 말하는 '싹수가 보이는'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로페즈 상사. 어디 이번 기수는 이거다 싶은 이들이 있던가?"
"당연히 있습니다 학장님."
교관 로페즈는 자신을 찾아 온 노인에게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교관에게 뛰어난 인재들의 육성은 늘 보람있는 일이었으니까.
"견습으로 조기 승급이 가능할 정도로?"
"...조기 승급말입니까?"
"실전을 나가기 위해선 최소한 견습이어야 하니까."
다만 이어지는 말에 그는 당황했다. 학장의 말은 지금 훈련생들을 조기 승급시켜 실전으로 내몰겠다는 소리였으니까.
훈련생들은 연맹을 기준으로도 미성년자가 80% 이상이었다.
"동부 전선이 위태하다더군 상사. 지금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네."
"하지만 훈련생들도 사람입니다!"
"적어도 스스로 싸우기 위해 이곳에 온 이들 아닌가."
그는 본능적으로 반대했지만 학장은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 싸우기 위해 왔다. 그 문장 하나에 그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무언가를 잃고, 지키지 못하고 그 무력함에 분노하는 이들은 질리도록 봐왔기 때문에.
"이들인가?"
결국 로페즈는 학장에게 자신이 정리해둔 몇몇 훈련생들의 정보를 보여주었다. 학장의 눈이 반짝였다. 엄격한 교관이 엄선한 인재들인만큼 확실히 뛰어난 실적을 보여주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중 유독 돋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페어 효율 150%?"
"그렇습니다. 개인으로도 최상위지만 둘이서 마치 한 몸처럼 움직여, 개인일 때보다 배 이상의 효율을 보여줍니다. 이미 같은 기수에서 적수는 서로가 아니면 없을 정도입니다."
"이건 마치..."
"그들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하긴 이 우주가 얼마나 넓은데. 그, 여자쪽이 시비가 붙어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것도 비슷하고."
그들은 한 쌍의 남녀에 주목했다. 분명 겉보기로는 평범한 소년소녀에 불과하다. 다만 기록된 그들의 영상은 적수가 없다는 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학장도, 로페즈도 눈을 빛냈다. 이런 비슷한 케이스가 역사에 이미 존재했었으니.
"이거 잘만하면, 큰 도움이 되겠소. 극한에 몰린 사람들은 언제나 영웅을 찾으니까. 그 영웅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전쟁 초기 활약했던 가장 강력한 페어라면 "
전쟁이 끝나지 않는 이상 이 세상은 언제나 영웅에 목마르다. 새로운 영웅이 등장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조기승급이라고요?"
"동의하면 이루어질 수 있다. 다만, 견습으로 승급하는 순간 현장으로 가야한다. Z-01의 군단이 침략을 시도하고 있는 전장으로."
로페즈는 선발된 훈련생들을 불러모았다. 모두들 당황한 티가 역력했다. 조기승급이야 기쁘겠지만 그 대가가 실전이다. 즉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니까.
"하겠습니다."
"저도요."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결단을 받아들이겠다는 추세였다. 결연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손을 든건 카를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여기 온 이들 대부분 자원해서 온 것, 복수든 무엇이든 말 그대로 싸우고자 하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그나마 시큰둥한 사람이 하나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녀에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준비해라. 시간이 많지 않다."
로페즈는 그들의 뜻을 확인하고 상부에 보고했다. 상황이 급박해서인지 일처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례적으로 빠르게 교육원을 졸업한 10인의 훈련생, 아니 견습 수호자들이 곧바로 전장으로 출동하게 된 것이다.
"두려워 하지마."
"그게 쉽게 되겠어?"
수송기 안, 출발 직후부터 안색이 좋지 않던 카를은 그녀의 말에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기회라고 생각하긴 했지. 인정 받고, 더 성장하고, 복수할 수 있는 기회. 하지만 어쨌든 실제로 그놈들과 싸워야 한다는 거잖아."
"Z-01, 그놈들은 무식한 짐승에 불과해."
카를의 말에 그녀는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 있는 것은 명백한 살의, 그리고 깔봄. 이렇듯 그녀의 적에 대한 적의는 원수를 갚으려는 카를조차도 움찔할 정도였다.
"나를 봐. 우리는 그까짓 놈들, 다 베어버릴 수 있어."
"알고 있어."
"그러면 이거라도 마시면서 진정하는게 어때."
그녀는 익숙하다는 듯 카를에게 잔에 담긴 음료를 권했다. 고맙다고 인사한 카를은 그것을 아무 의심도 없이 받아마셨다.
그러나 카를은 알 턱이 없었다. 분명 내용 자체는 평범한 음료였지만, 방금 전 그녀가 고의로 흘려 넣은 피 한 방울이 그 음료에 타고 들어와 축적되어가며 자신의 몸을 어떻게 바꿔가고 있는지.
"곧 도착합니다!"
그러는 사이 수송기는 관문을 통과하여 우주를 가로질러, 전장에 도착했다. 우주에 이미 잔해들이 여기저기 떠다니는 그런 참혹한 전장이었다.
***
"시가지 방어선이 함락 직전. 어서 그곳으로 가주십시오!"
급하게 끌어 온 견습들은 전투 난이도가 급상승하는 우주공간이 아닌 지상의 전장에 투입되었다. 둥지를 펼치고 행성을 침식해가며 미친듯이 몰아치는 괴물들을 향해, 사람들은 화력을 퍼부으며 저항했다.
그러나 아직 초기 개척지에 불과한 행성은 방위능력이 너무나 떨어졌다.
"별거 없다. 너희는 그저 내 명령에만 따르면 돼!"
수호자 한 명이 얼어 붙은 견습들을 지휘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그들을 전면에 내세우진 않았다.
견습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이곳 후방에서 피난하는 사람들을 지키는 것. 카를 역시 마찬가지로 잔뜩 굳은 얼굴로 사방을 살피며 자리를 지켰다.
'...할 수 있어.'
카를은 허겁지겁 대피하는 시민들을 보며, 그리고 그들의 눈에 비치는 자신을 보며 과거의 사건에 현재를 겹쳐보았다.
하늘에서 온 은인들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이번엔 자신이 그 구원자가 되어야 했다. 애초에 그것이, 자신의 목표였으니까.
"그, 그래도 후방이라 놈들이 여기까지 오진 않는건가?"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같은 견습들 사이에서 긴장이 조금씩 풀어져갔다. 아직까지 적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으니까.
"어...저기!"
그러나 그 순간, 말이 씨가 되듯 변수가 생기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말에 모두가 하늘을 쳐다보았다.
동시에 그것들을 본 카를의 눈이 커졌다.
"비행종이다!"
하늘을 지배하는 군단병종 비행종. 새도 벌레도 아닌 이 기괴한 날짐승인 그것들은 가까스로 뿜어내는 대공화망을 뚫고 단숨에 현장을 덮쳐들었다.
"아악!"
"사, 살려..."
한 순간에 사람들이 마음 놓고 쉬던 현장은 아비규환이 되어버렸다. 군인들은 필사적으로 총을 쏘며 저항하고, 몇 안 되는 수호자들은 싸우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당황하지 말고 자리를 지켜! 기껏해야 중형 몇 마리다. 이길 수 있어!"
카를을 비롯한 견습들을 이끌었던 수호자가 검으로 단칼에 덤벼들던 비행종을 베어내더니 당당하게 외쳤다.
그것만으로 희망이 되고 힘이 되었다. 베테랑인 그가 있으니 괜찮다는 믿음이 생겨나갔다.
"대어가 왔는걸."
"어...?"
하지만 그것이 하늘에서 쇄도하여 단숨에 지상에 내려 앉은 순간. 조용히 중얼거린 그녀의 말을 뒤로하고 모두의 눈이 그에게 향했다.
"히이익! 수호자님!"
땅에 내려앉은 비행종의 손톱이 번득이며 핏방울을 흩뿌렸고, 비틀거리다 반으로 쩍 갈라진 수호자의 몸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상위종!"
수호자들의 숙적, 전장의 사신. 함부로 상대할 수 없는 강적이 일말의 예상도 예고도 없이 지상에 강림해 깃털 날개를 활짝 펼치며 검붉은 베리어를 번득였다.
그리고 그 순간 이 일대는 놈의 지배하에 넘어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강적에 대한 공포와 충격이 피난민들은 물론이고 군인들이나 견습 수호자들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다.
죽음. 그것이 모두의 정신을 지배했다.
"뭘 망설여. 카를."
"...그래. 맞아."
다만 그 와중에 움직일 수 있는 거의 유이한 존재들이 있었다.
카를은 이미 검을 빼든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악물고 검을 빼들었다. 상위종 역시, 두 사람을 적으로 인식하고 곧바로 사람 상반신만한 검은 손톱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충돌 직전, 함께 뛴 두 사람의 검이 마치 하나처럼 움직이며 울렸다.
남들이 본다면 미쳤느냐며 기겁할 상황이지만, 이미 전투에 돌입한 둘에게는 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부상자들은 이쪽으로."
"피해가 이만하길 천만다행입니다."
큰 폭풍이 한차례 지나갔다. 분명 죽은 사람도, 다친 사람도 있지만 모두가 이정도면 기적이라고 여겼다.
예비전력에 부상자뿐인 후방에 갑작스레 상위종이 들이닥쳤으니까. 그러나 그것을 틀어막은 덕분에, 기적은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영웅들은 어디 있죠? 한 번 보고 싶군요."
"저기 뒷편에 있을겁니다."
부상입은 군인의 다리를 치료해준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군인은 씩 웃으며 뒷쪽을 가리켰다.
"이미 소문 다 퍼졌습니다. 전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문이 바로 이런 영웅담이니까요."
"그들에 대해 다른 소리도 들리더군요."
"아아. 아마 의사께서도 아실 겁니다."
군인은 이 이야기를 하는게 즐겁다는듯 아픈것도 잊고 말이 많아졌다.
"과거, 전설로 남은 영웅들의 재림 아니냐는."
"무슨 말인지 알겠군요. 전 가봐야겠습니다. 절 찾는 것 같아서."
희미하게 웃은 그는 군인의 이야기에 동조해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서 그를 향해 손짓하고 있는건 수호자 본부의 사람들이었다.
"찾으셨습니까."
"이쪽에도 부상자가 있습니다. 물론 중환자들은 이미 이송이 끝났고, 급한대로 가벼운 처치만 있으면."
환자들은 차고 넘쳤다. 가장 앞장서서 싸운 이들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들었지 간호사?"
"이해가 안 되네. 의사 놀이는 언제까지 할 셈이야?"
"1년도 안 된 것 같은데 왜 그래?"
장소를 이동하며, 그는 자신의 곁에 따르던 여인과 투닥거렸다. 그녀는 그의 행동이 이해가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면서도 행동 자체는 착실히 말에 따르고 있었다.
"처치는 다 끝났습니다. 치료주문이나 주술은 또다른 힘이 개입하면 깨지기 때문에...일반적인 처치만 해두었죠."
그는 부상 입은 견습 수호자를 치료했다. 이번 전장에 참여한 10인의 견습 수호자 중 3명이 죽었다. 다친 이들은 반절, 그리고 아직 첫 실전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해 보이는 이들이 나머지 반절이었다.
"아."
그리고 그때 그들이 서로 마주쳤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후유증이 없어보이는, 현재는 이 일대에서 가장 유명할 2인조와 평범한 흑발의 의사, 간호사 듀오가.
"안녕하세요."
카를은 평범하게 인사했다.
"명성...익히 들었습니다."
그 역시 평범하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다만 두 여자는, 아니 두 생물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주시하며 흥미롭다는 듯 훑어보았다.
'귀여운 아이.'
곧 상대의 정체를 꿰뚫어 본 그녀의 눈이 휘었다. 못 알아 볼리가 없었다. 자신의 의도대로, 스스로 성장한 자신의 씨앗이자 파편 중 하나였으니까.
정작 상대는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이 젊은 단발의 간호사가 어떤 존재인지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명성이라니, 솔직히 너무 과해서..."
"어떤 것이 말입니까? 그 어린 나이에 단 둘이 상위종을 잡는건 대단한 일입니다."
그 사이 카를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 되물었다.
"그 두 분에 비하면 저희는 아직 부족하거든요. 그분들은 오리지널의 상위종, 특수종과 싸웠는걸요."
"오리지널이라...이미 이 우주에서 자취를 감춘 존재들 아닙니까. 강신우와 이브 역시,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봉인 상태인 것을."
그는 싱긋 웃으며 카를을 격려했다. 말대로 진정한 공포라 불렸던 오리지널들은 이미 그 계통이 끊긴 것으로 알려졌다.
그것들과 싸우던 초대의 영웅들 역시, 슈리아 같은 장생종을 제외하면 모두 죽거나 봉인 상태가 되어 언젠가 깨어나 싸울때를 기다린다.
"오리지널이 완전히 사라졌을리가 없어."
그때 입을 연 것이 소녀였다. 소녀는, 오리지널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눈을 번득이며 적의를 드러내었다.
"그들은 패배자야. 결국 상대를 잡아먹지 못하고 도태된."
"멍청한 아이야."
갑작스런 소녀의 난입에 카를이 당황한 사이, 이번에는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이익!"
소녀는 자신의 머리를 덥석 움켜쥔 그녀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놀랍게도 가느다랗고 하얀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상태로, 그녀는 얼굴을 소녀에게 들이밀었다.
"오리지널은 패배한게 아니란다. 이렇게 생각해보는게 어떠니,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어 이제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말이야. 자신의 자식들이 각자 장성하여 다시 한 번 우주를 뒤덮었고, 자신은 이미 한 번 이 세상을 손에 넣은 적 있다면."
"헛소리를...이거 안 놔!"
"이제 그만해."
"그만둬. 이브!"
두 남자는 두 여자를 뜯어말렸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손으로 휘감아 자기쪽으로 당겼고, 카를도 소녀의 손을 잡고 끌었다.
"멋진 이름이군요."
"크흠..."
그는 소녀의 이름을 외친 카를을 보며 웃었다.
정작 카를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이브라는 그 이름, 자기 자신이 직접 소녀에게 붙여준 이름이었기 때문에. 그 모티브는 뻔했다.
"크, 큰일났습니다! 다시 한 번 적습!"
요란한 사이렌이 울린게 그때였다.
당황한 카를과 소녀, 이브는 밖을 바라보았다. 지평선 너머에서 몰려오는 또 한 무리의 적들이 보였다.
"가보시죠. 저희도 대피할테니."
"아, 알겠습니다."
카를과 소녀, 이브는 함께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그와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며 대피 준비를 하는 와중에도 흥미롭다는 얼굴이었다.
"위험하지 않겠어? 다른 애들도 다 멀쩡히 참고 살고 있는데."
"하지만 이걸 어떻게 참아. 멋모르고 까부는 어린애에게, 내 손녀에게 한 번쯤은 쓴맛을 보여줘도 되지 않을까?"
그녀의 의중을 단번에 파악한 그가 고개를 돌려 쓰게 웃었으나 이미 그녀는 마음을 굳힌 참이었다.
곧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그녀의 몸이 옷째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점차 형태를 갖춰가는 그 모습은 사라진지 100년이 넘어가는 오리지널의 상위종.
그런 존재가 그저 어린애들을 놀려 줄 목적으로 이 세상에 재등장한 것이다.
'적당히 해.'
결국 그는 연결된 의식을 통해 당부나 전해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