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에필로그(1)
"..."
그는 멍하니 화면만 보고 있었다.
사실 이미 유닛과 플레이어들간의 연결이 끊기는 등 대부분의 기능이 다운 상태였지만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던 장막이 뚫리며 시스템은 정말로 소멸해갔다.
무너져가는 재의 공간, 그의 주위에도 이제는 주인을 잃은 가면들만 가득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가면의 주인들은 모두 새롭게 도달한 결과에 만족하고 마땅히 있어야 했을 곳으로 돌아간 것이니까.
"내가 하지 못했던 일."
그는 가면을 벗었다. 반질한 바닥에 자신의 얼굴이 비쳐보였다.
이 얼굴은 붉은 눈을 빛내는 강신우의 얼굴이며 이브에게 완전히 동화되어 먹혀버렸던, 한때 실패를 겪었던 실패자의 얼굴. 그러나 이름 없는 망령으로 남아 살아간 끝에 끝끝내 성과를 보았다.
'그러니 안식의 순간이다.'
다시금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 속에는 여전히 다양한 상황들이 보여지고 있다.
그 대부분이 처절한 전투와, 혈투였다. 하지만 계속해서 보게 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존재했다.
엄청난 숫자로 몰려오는 외우주의 괴물들에 밀리지 않는 숫자로 동등한 세력전을 펼치는 군단도.
그 군단과 사력을 다해 싸웠던 힘으로 놈들과 싸우는 이들도.
심지어 그들은 외우주의 아귀들과 싸우는 와중에도 서로 투닥거리며 싸울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사실 수많은 엔딩을 봐 온 1회차의 망령인 그가 보기에 이정도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시련이었다. '가장 어른스럽게 성장한' 이브가 굴린 스노우볼의 결과였다.
'...보고 싶긴 하다.'
점차 바스라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던 그가 피식 웃었다.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것을 기록해두던 그의 이 이야기는 지금 여기서 끝을 맞이한다.
그러나 하나의 독자로서, 이 새로운 형태로 시련을 이겨낸 이들이 어떤 미래를 맞이할지 보고 싶은 마음도 컸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다.
어쨌든 그는 모든 것을 버린 과거의 망령. 강신우라는 본래의 이름도 쓸 수 없는 몸. 훨씬도 전에 없어져야 할 존재였으니 그냥 이대로 잊혀지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일테니까.
곧 가면 하나만이 바닥에 툭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주인 잃은 가면들만 가득하던 그 공간 전체도 점차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완전히 끝났네."
동시에 직감적으로 무언가를 느낀 '신우'가 길을 걷다 말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자신의 휴대폰을 통해 처음으로 접근했던 하나의 시스템이 지금 이 순간 그 역할을 다하고 완전히 사라졌다.
그때 그 시절로 돌아온 것 같은 가벼운 느낌이 순간 몸을 스쳤다.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지만 지금의 신우는 그때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으니, 감지하는게 불가능하진 않다.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은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신우는 그가 만족하고 떠났기를 바랬다.
"이제 너랑 나랑은 시스템적으로 아무 관계도 아니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신우가 곁에 있던 이브에게 말하자 이브가 피식 웃었다.
"오셨군요! 그런데 지금 방어선이 뚫릴 것 같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알아. 그래서 우리가 온거잖아."
"그, 그렇습니다."
꽤 역사적인 순간이었지만 신우와 이브가 할 일 없이 길을 걸은건 아니었다. 사실 지금 이곳은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다.
자리를 지키던 야전 사령관이 벌떡 일어나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이브는 한결 같은 오만한 태도로 답했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그 태도를 문제 삼지 않는다.
확실한 실력으로 이미 큰 주축이 되어 있었으니까. 절망적이던 부대의 분위기가 그들의 등장만으로 반전 될 정도였다.
"화력도 부족하지만..."
"그렇습니다. 군단의 특수종에 맞먹는다는, 최상급 아귀입니다."
화면을 통해 전장의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치열하게 싸우는 전장을 휩쓸고 있는 유독 독특하게 생긴 괴물 하나.
회백색 피부에 징그럽게 돋은 촉수를 얼굴과 몸등에 휘감은 놈은 다른 아귀들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어딘가 다르다. 일단 두 다리로 꼿꼿하게 서서 마치 인간처럼 양 손을 쓴다는 점이 그랬다.
분명 몇 달 전만해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형태였다.
"진화했다? 설마 우리를 보고."
"맞아. 놈들도 아주 빠르게 성장 하고 진화를 해. 아주 바람직하지."
신우의 말에 이브가 피식 웃었다.
외우주의 아귀들은 군단으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이렇게 상대할 가치가 넘치는 놈들이었으니까. 덕분에 이브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만족스럽게 수확을 거두고 있었다.
"가자. 한 두번도 아니잖아? 감히 우리의 영역에 들어 온 놈들을 처단하러."
이브는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섰다. 쓰게 웃은 신우도 그 뒤를 따랐다.
"...우리도 계속 밀려서야 되겠나. 어서 병사들을 독려하게."
사실 지금 굉장히 들뜬 이브의 목적은 늘 그렇듯 어디까지나 성장의 동력을 찾는 것이었지만, 그 뒷모습을 보는 이들에게 그런건 상관 없었다.
꿈에도 모를 그 속내가 사실은 외우주의 아귀들마저 먹이로 삼는 거대한 군체 그 자체일지언정 같은 적과 싸우는 지금은 그 사실마저도 든든할 뿐이다.
(2)
'떠나라. 떠나서, 먹이를 잡아먹고 너희들만의 세력을 만들어라. 그리고 성장해라.'
적막한 우주의 한 가운데, 그것은 다시금 되새겼다. 그것이 자신이 부여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명령' 이었으며 유전자에 새겨진, 반드시 행해야 할 일종의 본능이었다.
그것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던 척박한 행성이지만 세를 늘리는데 영향은 없었다.
홀로 이곳에 도착한 이후 광합성을 기반으로 기본적인 에너지를 얻고 둥지를 펼쳐 조금씩 행성을 잠식해 들어가며 둥지를 확장시켜나갔다.
그 무엇도 방해하지 않았다. 이곳은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아귀들에겐 볼 일 없는 버려진 곳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나 아귀들이 살아움직이는 생명체에만 집착하며 날뛸때,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그것은 끝내 행성 전역에 자신의 둥지를 덮어내는데 성공했다.
'먹어치우고, 성장해라.'
그 이후 할 일은 당연히 하나 뿐이었다.
둥지에서 그것의 명령을 충실히 따를 군단병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미 자신의 군단을 가진 여왕이었고, 새겨진 본능에 따라 전쟁을 준비했다.
곧 행성 하나분의 수많은 군단병들이 우주로 출격하여 적을 찾았다.
오만한 포식자던 아귀들은 이제 역으로 사냥감이 되어 사냥당했다.
'카사라스의 함선.'
그 과정에서, 여기까지 진출한 한 함선을 발견했다. 카사라스 소속의 탐사선으로 아귀들의 공세를 막아내는게 조금 수월해지자 이제는 장막 너머 자신들이 꿈에 그리던 미지의 세계까지 탐사를 시작한 것이다.
'...공격해라.'
잠시 머리를 굴리던 그것은 자신의 군단병들에게 그들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자신의 어머니이자 뿌리인 이브가 어쩐 생각을 품고 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부모자식의 개념 따위는 없었으니까.
단지 먹어치우고 성장한다는 본능에 충실하여 그 본능을 행할 뿐이다.
"이, 이런 괴물놈들이 여기까지 와서 발목을 잡다니..."
"벗어나라. 빨리!"
그들은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하였다. 그러나 숫자의 차이가 너무 극심해 그들은 포위망을 빠져나올수 없었다.
군단병들의 일격이 그들에게 자비 없이 꽂히고, 그것은 이브가 고의로 물려주지 않은 카사라스의 데이터를 손에 넣게 되었다.
'이것이 성장.'
그것은 과거의 이브처럼 그로부터 짜릿한 성취감을 느끼고 전율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성취를 갈구했다.
이브가 자신과 신우의 데이터를 조합하여 만든 새로운 타입의 군단병, 그들의 자식.
지금의 자신이 도달하지 못했던 회차의 데이터까지 모조리 얻고 싶었던 이브의 욕망이 발현된 존재들로 미숙한 자아와 강렬한 본능은 초창기의 이브를 그대로 복제한 것이다.
그것들은 온 우주에 퍼져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서로 경쟁하거나 때로는 협력하기까지 하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급격히 성장해나갔다.
어떤 개체들은 전투에서 패해 죽기도 했지만, 승리를 거머쥔 이들도 분명 존재했으며 그들은 이브의 기억은 물려받지 않았기에 보다 원초적이고 과격한 생물체로 자라났다.
득실거리던 외우주의 아귀들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놈들이 욕심을 내는 사이, 급격하게 성장한 그들이 아귀들의 본진을 대놓고 침략하기 시작했다.
모든 데이터를 이브로부터 제공받았지만 처음 둥지를 펴고 하나의 독립된 지배종으로 자라난 순간 그들은 지금의 이브와는 전혀 다른 존재.
신우의 도움을 받아 성장하여 본능을 지배하는데 성공한 이브와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그들은 아귀들과 맞먹을 정도로 무차별적이고 파괴적인 모습으로 하나 둘 놈들의 소굴을 정리해갔다.
"...아, 아."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가장 넓은 둥지를 가지진 못했으나 가장 많은 생각을 품고 있던 하나의 개체는, 모방과 흡수를 넘어 스스로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손에 넣었다.
본능적으로 취한 인간을 닯은 신체를 움직이며 자신의 손가락을 멍하니 내려다 보았다. 한 번 터지기 시작한 사고능력의 끝은 알 수 없으니,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조금만, 더."
무언가가 속에서 끓어올랐다. 뜨겁기도 하면서 차갑고, 정적이며 격정적인 표현할 수 없는 미지의 감각. 바로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