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의미를 찾아서(10)
"목적지 도착. 역시...놈들의 둥지가 있다."
"징글징글 하구만."
행성의 권역, 도달한 함선들이 지상을 살폈다. 그리고 함장 루카스는 관측한 자료를 보고 혀를 찼다.
지상에는 이미 끈적한 점액과 말라 비틀어진 검은 나무들이 뿌리를 내려 자라나고 있었다. 이미 상당한 규모의 둥지였다.
"하지만 더 커지기 전에 제압해야겠지."
"함장님. 사령관님의 명령입니다. 지금 즉시 둥지를 파괴한다 하십니다!"
루카스의 예상대로 함대의 사령관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애초에 이 낯설고 척박한 행성에 군단의 둥지가 뿌리 내리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온 것이니까.
"놈들의 함선체들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쉽게 들어갈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전투준비."
군단은 당연히 그들을 막기 위해 함선체들을 출격시켰고 함대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익숙하다는 듯 대 군단전용 진형을 갖추며 퍼지기 시작했다.
기록된 전투만 수 천번 이상.
그 경험을 바탕으로 서로의 싸움은 이제 당연한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상위종들입니다. 놈들이 함선에 접근하려 하고 있습니다!"
"문제 없다."
함선체들 곁에는 함께 검붉은 방어막을 두르고 있는 상위종들이 저마다의 무기를 빼들고 함께 돌격하고 있었다.
화망을 뚫고 함선에 근접하여 방어막을 뚫고, 내부로 침투하여 단신으로 함선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 버리는 상위종들은 치명적인 독.
그러나 입술을 깨문 루카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까.
상위종들을 상대하는건 그들이 할 일이 아니었다.
"놈들이 옵니다."
"우리가 막지 않으면, 함대가 치명상을 입는다. 충돌 1분 전!"
함포를 쏘며 돌진하는 함선들의 위에 그들이 있었다. 맨몸으로 버티고 서서 상위종들을 저격하기 위한 이들이.
고향도, 종족도, 외형도 품은 힘도 다른 그들이 이렇게 뭉쳐 싸우는 이유는 군단을 저지하는 것 하나뿐이었다.
"꽉 잡아!"
곧 상위종들과 수호자들이 맞붙었다. 이것은 서로의 목숨을 건 전투, 당연히 희생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한 쪽이 쓸려버리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경험을 쌓아 강해지는건 함대전술만이 아니었으니까.
서로 다른 세상에서 발전시켜 온 그들의 무력은 군단이라는 공공의 적 앞에서 교류가 활발해질 수록 더욱 강해지고 개량되어갔다.
"방어선을 뚫었다...!"
많은 희생과 치열한 사투 끝에 그들은 군단의 저지선을 넘어 둥지를 폭격하고 타격할수 있는 지점까지 내려가는데 성공했다.
비록 둥지에서 작동한 방어시스템이 하늘을 향해 포격을 시도했지만 이곳은 아직 완숙하지 않은 개척 둥지.
둥지의 포격을 뚫고 강습부대가 하강을 시도했다. 폭격과 함께 지상에서도 둥지의 자원줄인 신목을 제거하는게 그들이 정립한 군단과 맞서는 방법이었다.
"놈들의 지상군이 몰려옵니다."
"이제 버티는것만 남았어."
한때 이브가 주도한 '실험'에서 발생한 군단과의 전투에서 한계를 맞이했었던, 지금은 수호자의 일원으로 전장에 참여한 흡혈귀들의 계약자 세나는 이제 어엿한 성년의 전사가 되어 싸웠다.
이렇게 강습에 성공한 이들의 목표는 주문식이 발동할 때까지 군단병들의 공격에서 버티는 것.
연합이 사령술과 정령술등을 조합하고 개량하여 개발한 대규모 소환술은 이제 어마어마한 물량을 쏟아내는 군단을 상대하는데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수단이 되어있었다.
'징그럽게 많다.'
세나는 하늘과 지상을 가득 채우며 몰려오는 군단병들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지축을 울리는 초대형종들이 선두에 서서 거대한 망치 머리를 휘두르며 돌진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세나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군단을,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앗아간 적들을 죽이기 위해 싸운다.
언제나 추앙하는 자신의 영웅, 북부지부 제 1검 이브 처럼.
"가자!"
우주에서도 그리고 이제는 지상에서도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들 모두가 목숨을 건 전쟁.
그리고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이 전쟁은, 지금 이 순간 이 우주 전역에서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
"그래. 더 힘내서 싸우고, 더 열심히 힘을 기르는거야."
이곳은 세나가 있던 개척지와는 또 다른 전장. 검을 들고 있던 이브가 히죽 웃었다.
하이브마인드의 군체의식을 통해 모든 우주에 퍼진 자신의 세력을 관장하는 이브에게 지금 같은 상황은 너무도 만족스러웠으니까.
모든 상황이 자신의 손 안에 있었다. 치열한 전투와, 자신이 카피하고 모방할 나날이 강해지는 적들도 있었다.
'크...정말 까다롭기 짝이 없는 힘이다.'
그리고 지금 이브가 막아서고 있는 적은 다름아닌 군단의 서브마인드 라몬이었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상대하는 쪽에서 검은 마왕이라 부르며 두려워하는 '특수종'. 그 손에 죽은 수호자들만 세 자리 수고 악명은 자자한지 오래였다.
그런 존재가 지금 전력으로 이브와 싸우고 있었다. 짜고치는 겨루기 따위가 아니다. 정말로 어느 한 쪽을 죽이기 위해 서로의 무기를 휘둘렀다.
"조금 더 힘 내봐. 이번에도 죽으면 2번째 부활 아닌가?"
피식 웃은 이브는 라몬의 신경을 자극했다. 애초에 이 매치업이 처음인 것도 아니었으니까. 대외적으로 검은 마왕, 검은 날개, 검은 번개등의 최상위 특수종들을 조금이나마 상대할 수 있는건 각 지부에서 손에 꼽는 강자들 뿐이었다.
'미친년!'
'미안하다 라몬.'
검을 휘둘러 칼날을 머금은 마력풍을 뿜어낸 라몬이 질색했다. 그러나 그 일격은 금세 파훼당했다. 이브의 곁에는 언제나 그가 함께 있었으니까. 혀를 찬 신우가 끼어들어 이브와 함께 마력풍을 베어버렸다.
라몬이 자기 휘하의 서브마인드인데도 그는 보다 완벽한 연기를 위해 라몬과 싸워야 했다.
"왜 그래. 좋아하잖아. 이 투쟁, 그리고 상처."
그러거나 말거나 히죽 웃은 이브가 검을 치켜들었다.
단순히 파훼하고 베는게 전부가 아니다. 이제는 영웅인 두 사람의 성명절기가 된 공명법은 상대의 힘까지 흡수하여 그대로 이용하는 것.
라몬이 뿜어낸 마력풍은 이브의 검에 휘감겨, 무엇이든 베어내는 참격의 형태로 뿜어졌다.
"이럴수가..."
"검은 날개다. 최상위 특수종이 둘이야"
그러나 라몬이 그 참격을 가까스로 피해냈을때.
오히려 일반종들과 전투하며 그들의 전투를 관심 있게 지켜보던 다른 이들이 경악했다. 하늘에서 음속을 돌파하는 엄청난 속도로 강하해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또 하나의 특수종.
'오빠라도 안 봐줄건데. 후회 안 하지?'
'그래.'
신우의 부름을 받고 도착한, 가면 속에서 붉은 안광들을 번득이는 강도연이 9장의 날개를 펼치며 출력을 끌어올렸다.
"...재밌겠는데. 마왕과 천사, 최강최흉으로 불리는 괴물 페어와 붙게 되었으니."
이브는 오히려 더 크게 웃었다. 단숨에 2대2 듀오 전투가 되어버렸으나, 사실 이브와 신우의 전력은 그 근본부터가 서로 함께 싸울때 터져나온다.
'잠깐만. 이건...'
'이럴수가. 리하르트!'
그러나 서로 충돌하려던 그 순간.
두 하이브마인드는 조금의 전조증상 없이 시작된 이변을 눈치챘다. 군체의식으로 연결된 군단 전체가 이것을 알게 되는 데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나?'
둥지에 있던 리하르트가 군단병의 눈을 빌려 그것을 보곤 피식 웃었다. 애초에 벌어질 일을 상정하고 미리 다 계획을 세워 둔 일이기도 했다.
"뭐야. 무슨 일이냐."
"그, 그게...지금 놈들이 갑자기 활동을 멈췄습니다. 헌터님들의 싸움 역시..."
시가전을 벌이던 부대를 지휘하던 지휘관과 군인들 역시 이변을 눈치챘다. 일단은 미친듯이 싸우려 들던 군단병들이 일시에 싸움을 멈췄다.
"저게 뭐지?"
그리고 또 다른 이변은, 우주에서 치열한 함대전을 벌이고 있던 이들이 발견하게 되었다. 함선체들 역시 지상군과 마찬가지로 급작스럽게 행동을 멈췄으나, 연맹군은 함포로 군단병들을 쓸어버리지 못했다.
"장막이 걷히고, 세상은 또 한 번 확장된다. 우리 세상을 넘보는 외우주의 괴물들. 놈들은 과연 어떤 놈들일지."
끌어올린 기세를 다 누그러뜨린채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는 이브가 희미하게 웃었다. 지상에 있는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높은 곳에, 한창 전쟁을 벌이고 있던 함대의 근처에.
검은 공간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곳만 그런게 아니었다.
세나가 있는 개척지에서도, 연합의 권역에서도, 연맹의 세력에서도, 군단의 둥지가 있는 곳에도 카사라스들의 영역권에서도 균열이 일어나며 이 우주에 새로운 법칙이 연결되어 흘러들었다.
"어어어...괴, 괴물들이다! 데이터에 없는 놈들입니다!"
"이런 미친, 저게 뭐야!"
싸우다 말고 정신이 팔릴 수밖에 없었다. 보이지 않는 장막 밖에 도사리고 있던 존재들. 시스템이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으나 끝내 실패한 그들은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심연의 아귀들이었다.
놈들은 이미 외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파먹고 또 다른 먹잇감을 노리고 있다.
'잡아먹고, 부숴버려.'
하지만 어차피 기다리던 일이었다.
이브는 하던 일을 전부 중단하고 우선적으로 이 새로운 적들을 공격하라고 군단 전체에 명령을 내렸다. 동시에 모든 군단병들이 공격의 끝을 반대로 돌렸다. 상대하던 모든 이들이 당황한 광경이었다.
'가봐. 어차피 우리도 따라갈 것 같으니까.'
'좋아.'
신우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 까지만해도 서로 죽일듯 싸우려 했으나 지금 이 순간 그는 자신의 서브마인드 강도연과 라몬에게 올라가 싸울 것을 지시했다.
"단장님...! 놈들이 일시에 물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에 무슨 일이 생겼겠죠?"
"그, 그렇습니다. 지금 정체불명의 또 다른 괴물들이 난입해서..."
"군단은 놈들과 싸우고 있고요."
신우의 태도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너무 침착해서인지 그의 눈이 점점 동그랗게 변해간다. 하지만 망설일 시간은 없다. 이제는 그들도 방금전 싸우던 군단과 함께, 무엇도 가리지 않는 저 외부의 적들과 필사적으로 싸워야 한다.
"다시 싸울 준비 하십시오. 다만 이번에 맞설 우리의 적은 다른 놈들입니다."
그는 피식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이 외우주의 괴물들은 끔찍한 외형은 물론 우주의 일부를 먹어치운 놈들 답게 오만하고 강력하며 징그럽게 많았다.
단번에 우주공간을 휘몰아치며 그 일부가 지상으로, 먹이인 살아 숨쉬는 생명체가 있는 곳을 감지하고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아주 좋아."
그러나 놈들은 알지 못한다.
이곳에 어떤 괴물이 도사리고 있는지, 진정한 포식자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 포식자와 끝없이 사력을 다해 맞서 싸우던 이들이 얼마나 강한지.
히죽 웃은 이브의 의식 중 하나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전부 먹어치울 수 있겠어."
군단이 전체를 장악한 군단의 둥지행성. 이곳의 아바타를 움직인 이브는 행성 전체를 덮은 군단병들을 휴면에서 깨워내었다.
이곳 뿐만이 아니다. 모든 둥지에서 그동안 비축한 모든 군단병들이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 단순히 막아내는것? 그것은 이브의 목적이 될 수 없다.
물리적 정신적 성장도 이미 목표치를 넘긴지 오래였다. 그 이후 계속 힘을 비축해 온 이브는 놈들을 먹어치우고 더 나아가 그 이후까지 넘보고 있었다.
본인이 밀릴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먹어치우고 진화하는거, 늘 하던 것이었으니까.
미리 구상한 설계대로 지금 이 순간에도 우주 전역에서 이 침략자들을 상대로 긴급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고 비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전력을 끌어올린 본인이 가세한다면 가볍게 밀어버릴 수 있을거라 확신했다.
"놀랐나? 너희에게도 감정이라는게 있나? 그런데...이제 시작인데."
함대를 이끌고 우주로 출격한 이브는 충돌 직전, 자신을 보고 당황한 이 외우주의 아귀들을 보며 이를 드러내고 입꼬리를 비틀었다.끝내 벽을 갉아먹어 뚫어버릴 만큼 절대적인 포식자로 살아 온 생존경쟁의 승리자가 실로 오랜만에 잡아먹히는 입장이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