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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249화 (249/254)

249화-의미를 찾아서(9)

의미 없는 싸움은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전 우주를 뒤덮었던 게임의 처음 의도대로 오직 포식을 위해서, 생존 경쟁을 위해서 지금도 싸움이 계속된다.

"특수종 검은 마도사다! 죽여도, 죽여도 다시 되돌아오는 끔찍한 괴물놈. 그대로 얼려버려라!"

카사라스의 본성 로나스. 한때 수십억에 달하는 이브의 군단병에 습격당했던 이 행성은 이번에도 게이트를 열고 쳐들어 온 군단병들에게 침략당했다.

하지만 이게 두 번째다. 이미 좌표가 넘어갔다는걸 인지하고 있던 그들은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았다.

군단식 공명마법을 폭사하며 난동을 부리는 레이나를 향해 준비해둔 병기가 쏘아졌다.

"순간적으로 일정 공간의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일격이다. 당할 수밖에 없지!"

포탄이 적중한 모습을 보며 병력을 지휘하던 카르코스 하나가 히죽 웃었다. 본디 이 응결 포탄은 함선의 부품으로나 쓰이던 것을 무기로 응용한 일종의 신무기였다.

군단의 특수종들이 죽어도 곧 다시 부활해 돌아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준비한 병기였으며, 동시에 군단이라는 예상 외의 강적과 싸우는 와중에 관측자를 자처하며 오랜 시간 정체되어 있던 그들도 결국 성장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 이럴 수가!"

그러나 그는 포격의 결과를 보고 당황했다. 분명 뛰어난 전술이었고 괄목할만한 성장이었지만 문제는 경쟁을 통해 성장하는건 반대편도 마찬가지라는 것.

상위종을 포함 다른 군단병들은 이 응결포탄에 당해 그대로 얼어버렸지만 표면의 서리를 깨부순 레이나는 당하지 않았다.

'다 알고 있는데, 당할리가.'

가면 속에서 눈을 번득인 레이나가 지팡이를 쳐들었다.

이미 카사라스들이 어떤 무기를 준비했는지, 어떤 전술을 준비했는지 잠입해 있던 오윤아를 통해 알고 있던 상태. 갑작스레 기습당했다면 모를까 뻔히 알고서 맞아줄 이유가 없었다.

'100중첩 공명식.'

촉수로 연결된 어지간한 비행선 크기의 보조무장에서 에너지를 공급받은 그녀의 지팡이에서 함선의 주포에 맞먹는 광선포가 끝내 지상을 향해 쏘아졌다.

대기가 말라 비틀어지고 폭발한 땅이 반으로 갈라지며 지각을 뒤흔드는 일격. 단단히 대비하고 있던 카사라스의 수비군도 덩달아 반토막이 나며 쓰러져갔다.

"다, 당장...당장 지원을 요청해라!"

절망적인 광경에 병력을 지휘하던 카르코스는 경악하며 후퇴했다.

레이나가 이끄는 신우의 군단병들은 이브에 비해 수는 적지만 파악한 정보를 바탕으로 모든 핵심 시설을 타격할 수 있고, 카사라스들의 전술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 목적 자체도 점령이 아닌 철저한 파괴와 난동.

수비에 실패한 카사라스들은 끝내 다시 한 번 본대를 회군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저 지키라고만 했는데 그마저도 못했단 말이오?!"

"하, 하지만 놈들의 전투력이..."

"수도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 않았소!"

당연히 소식을 들은 본대의 지휘관들은 열불을 터트렸다. 플레이어, 라스 역시 그 중 하나였다.

흔들리는 자신의 입지를 위해서도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성과를 봐야 했는데, 지금 제대로 된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내부에서 문제가 터진 것이었다.

"어쩔 수 없소. 돌아가는 수밖에."

"그렇소. 본성을 잃는건 안 되오. 숫자는 몇 없다 하니 우리가 가면 구하는건 가능하오."

본대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적극적인 활동과 전쟁을 주장하는 라스를 비롯한 일부 세력과는 반대로 안정적이고 온건한 태도를 원하는 기존 세력이 다시금 목소리에 힘을 얻어갔다.

"제길..."

"그냥 시간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그래도 나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만."

꼬여만가는 일에 분을 눌러 참는 라스를, 원로이자 동료인 타나스가 위로했다.

"합치와 규율을 그 무엇보다 중시하는 우리 종족이 이렇게 격동적으로, 다른 성향을 가질 수 있을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으니까."

"...그게 저 때문이라 생각하십니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하지만 말했듯 그것이 나쁜가?"

미간을 찌푸린 라스는 타나스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실제로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종족의 상식과 관념을 깨부순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플레이어가 되어, 치열하게 싸우는 이들을 보며 그는 서서히 자신의 생각부터 고쳐먹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조차 그것이 해롭다 생각하지 않았다. 바로 그 길이, 고여있던 종족의 변영과 진리에 맞는 길이라 굳게 믿었다.

"당신은 우리 종족에 기회를 준 것이오. 변화하고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그 결과가 실패라면, 우리는 인간놈들보다도 더 뒤쳐질겁니다."

"하지만 더 성장할 수도 있지. 이미 변화의 톱니는 돌아가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아무도 모르니...이제 회군을 준비하도록 하시오."

라스는 자조적으로 웃었으나 타나스는 고개를 저었다. 곧 그들은 전력을 정비하고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과 충돌을 벌였던 연합은 굳이 카사라스들을 쫓지 않았다. 군단이 시도하고 있다는 확장에 대한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곱게 보내 줄 생각은 없다는건가?"

회군을 서두르는 카사라스의 함대. 그런 그들을 기다렸다는 듯 습격해 온 이들이 있었다.

우주공간에서 커다란 촉수들을 너울거리는 군단의 함선체들과, 실존하는 섬과 대륙의 일부를 통째로 들어올려 개조한 요새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수많은 군단병들까지.

"우리 발목을 잡으려는 것이오. 이대로 가면 본성이!"

"지금 다른 이들에게 전하시오. 이곳은 내가 막겠다고."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깨달은 라스는 피식 웃으며 당황한 동족들을 진정시키고 먼저 워프할 수 있게 조치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함대를 이끌고 자리를 지켰다. 그의 눈에, 그 수많은 적들의 선두에 고고히 떠 있는 존재가 보였다.

하늘빛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여체는, 오직 그가 있는 곳만을 노려보며 가면 속에서 빛나는 6개의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이토록 먼 거리에서도 그 증오와 분노가 그대로 느껴질 정도였다.

"라스, 자네..."

"난 괜찮으니 어서 가게. 나는 여기서 저 악연을 청산하고 갈 테니까. 대신, 자네들은 절대 멈추지 말고."

그는 개인적으로 가까이 지내던 카르코스들도 모두 보냈다. 자신이 하려고 했던 종족의 변화는 그들이 이루어줄 것이다.

그 대신 그는 이 자리에서 꼬이고 꼬여버린 매듭을 잘라버릴 생각이었다.

'내가 어리석었다. 진화와 변화, 처절함과 치열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면서 정작 나 자신은 그것들을 한 발자국 물러나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니. 이것이 현실이었는데도.'

그는 차지연을 노려보며 자신의 무기를 들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종족의 지배계층이자 가장 우수한 씨앗이 아니라, 적과 싸울 하나의 전사였으니까.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해도 억울해 하지 마라. 우리는 종족의 미래를 위해 싸운다."

라스는 소수라 할 수 있는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남았다. 어차피 하위 계급은 거부권은 일절 없이 그의 명령에 따라 죽고 사는 이들.

하지만 지금 라스는 그들에게 일방적인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과연 무엇이 기존의 전력을 초월하는 기적을 만들어내는지 셀 수 없는 전투와 전쟁을 통해 보았다.

'와라. 누가 옳았는지 직접 붙어보면 알 것이다.'

우주공간의 일부를 가득 채운 양측이 서로를 향해 화력을 뿜어내며 돌진했다.

마지막을 직감하고 이를 악문 라스는 천혼술을 최대 한도로 끌어올렸다.

[영혼공진]

동시에 사용한 영혼공진으로, 이 일대의 모든 카사라스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힘을 폭주시켰다. 그 스스로도 이 거대한 영혼의 울림에 몸을 던졌다.

'죽ㆍ어ㆍ라!'

차지연도 그에 맞춰 거대한 전격 폭풍을 뿜어내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한때 유닛과 플레이어 관계로 묶여있던 두 존재가 함선이 밀려날 정도의 충격을 터트리며 충돌했다.

*

"인간놈들에게 내 둥지의 정보를 팔다니. 너무 비겁한거 아니야?"

"전쟁에 비겁한게 어디있지? 최선을 다하는 것 뿐이야."

"어쨌든 우리 생각은 옳았어. 끝없는 경쟁, 그리고 전쟁. 모두가 강해지고 날카로워지지."

이브가 히죽이며 말했다. 나 역시 화면에서 눈을 떼었다.

카사라스들도 함부로 못 쓴다던 멸절탄이 터지고 카사라스 저항군은 습격한 군단병 수천만과 함께 우주공간의 먼지가 되었다.

하지만 차지연은 자신의 육신이 소멸하는 그 순간까지도 기뻐했다. 어쨌든 그녀는 원수를 갚는데 성공했으니까.

이브는 당연하다는듯 차지연을 미리 만들어 배양해둔 예비 육체에 되살렸다. 적들 입장에서는 토악질이 나올 끈질김이었다.

"이미 늦었지. 계속 달리는 수밖에."

은근슬쩍 고개를 들려는 불안함은 찍어 눌렀다. 후회할 겨를 따위는 없다. 이렇게 하기로 정하고 돌고돌아서 끝내 여기까지 온 이상은.

"맞아. 그딴게 뭐가 중요해."

이브가 웃으며 내게 동조했다. 계속되는 진화와 포식을 거쳐 결국 정점에 다다른 포식자가 자신의 의지에 이 우주의 명운이 달린걸 스스로도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야. 시험, 성장, 경쟁. 우리 모두가 참여하지."

"곧 도착합니다!"

"조금 거칩니다. 놈들의 포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브가 내게 손을 내밈과 동시에 타고 있던 수송기의 기체가 거세게 흔들렸다. 다급한 군인들의 말대로 이곳은 전장이었다.

그것도 이브의 군단과 싸우고 있는 전장.

"가자. 사람들을 '지켜야'지."

곧 수송기의 문이 열리고 거센 바람과 함께 전장이 내려다 보였다. 나는 그 상태에서 이브의 손을 잡았다.

이제 이것도 한 두번 해보는 강습이, 전쟁이 아니지만 엄연히 전과는 다르다.

[승자를 가려내려는 기존의 게임은 끝났다. 승자는 너희 둘이지. 하지만 새로운 게임이 다시 시작되었다. 새로운 게임의 운영진은 너희고, 플레이어와 유닛들은 너희의 의도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메시지가 곧 흐릿하게 사라져간다. 직감적으로 이제 다시는 저 메시지를 볼 수 없을거란 예감이 들었다.

"뛰어."

동시에, 나는 이브와 함께 수송기에서 뛰어내렸다. 우리가 빼든 검에서 동시에 거센 불길이 폭발하듯 타오르며 휘날렸다.

군체의식으로 연결된 군단에겐 치명적인 이 업화를, 이브는 망설임 없이 휘둘렀다.

"봐.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환호하고 영웅이라 부르며 열광하지. 이게 과연 먹어치운 것과 다를게 있을까."

"다른게 있지. 적어도 난, 이게 최선의 결과라고 생각하니까."

나는 목적으로 하던 바를 이루었다. 이브가 본성에 집어삼켜져 자기 자신도 잃은채 나를 포함 모든 세상을 집어 삼키지도 않았고, 고독해지지도 않았으니까.

나와 서로 싸운다 해도, 진심으로 서로를 죽이기 위해 싸우지는 않으니까.

남은건 결국 마지막 남은 적들을 기다리는 것 뿐이지만 이브는 그마저도 더 강해진 모두와 함께 맞서 싸우게 될 것이다.

"참 잘 컸어."

내가 피식 웃자 이브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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