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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247화 (247/254)

247화-의미를 찾아서(7)

"욕심이 좀 나냐 이제."

"그동안 당돌한 짓을 해왔네."

밑에 깔린 이브가 히죽 웃었다. 내 명령을 들은 내 휘하 군단이 자신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하지만 방심해선 안 된다. 이렇게 지독히 아름다운 여체를 하고 있지만, 그 본질은 이미 몇 개의 세상을 먹어치운 우주급 재앙이었으니까.

"착각하지마. 그 재앙에, 당신도 포함이야. 내가 패배하면 당신도 패배해."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그녀가 내 가슴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정작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했다. 그녀는 절대 지지 않는다.

단지 이제 자신의 본능과 존재의의, 그 근원마저 잡아먹고 진정한 의미의 초월체가 되었을 뿐이다.

"맞아. 나도 어떻게 이런게 가능한지 참 궁금해. 정신적 교감이 이런걸까. 이렇게 육체가 이어져 있으니까 마치 당신의 마음까지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고작 고깃덩이인데 말이야."

"내게도 보이고 있어. 네가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전부가."

상기된 그녀의 얼굴 앞에, 화면들이 떠올랐다. 그 화면에 보이는 것들이 모두 그녀의 행동이었다.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부.

그녀는 사실상 내 의지를 이어받았다. 전과 다를바 없어 보이지만 그 본질은 크게 달라졌다. 이제 더 이상 행동을 강제하는 본능 같은건 없었다.

싸우고 싶으니까 싸우고, 먹고 싶으니까 먹고, 죽이고 싶으니까 죽인다.

"진정한 자유. 이것을 위해 그 시간동안 달려온거지."

그녀가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완전히 성장한 하나의 인격체가 되어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시스템 따위가 통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내가 처음부터 원한건 너를 통제하는거였어. 너를 통제해서, 적당히 모두가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지금의 나는 그렇게 해주는게 가능해. 말 그대로 모든 놈들을 먹어치울 이유, 없지."

이브는 내 얼굴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는 그 붉은 눈에 가득한 장난기를 읽어내었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바라는대로 순순히 말을 들어줄 녀석이 아니다.

"하지만 그럴 이유가 있을까. 내게서 살아남고 싶다면 그만한 의지와 힘을 보여줘야해. 적자생존, 우주의 법칙이야."

눈을 번득인 이브가 전 병력을 움직였다.

그동안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성장과 탐식이라는 저주에서 발버둥치며 이것저것 시도하던 실험적인 전쟁 따위가 아니었다. 감정에 휩쓸린 감정적인 전쟁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어느때보다 차분하고 무거운 전쟁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방들은 오히려 지금의 이브를 더 상대하기 힘들어 할 것이다.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더 이상 이브가 그들을 절멸시킬 마음으로 싸우진 않을 것이라는 점. 만약 살아남아 대적자로 인정 받는다면, 영원히 싸움을 계속할지언정 목숨은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대로 해. 이렇게 된 이상, 어차피 모두가 단결하는건 불가능하니까."

애초에 훗날에 닥쳐 올 위험을 아는 나도 모두가 하하호호 잘먹고 잘사는 세상 따위 존재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았다.

결국 돌고돌아서 처음과 같다.

단지 이브를 조절하기 위해 여기저기 선동하고 들쑤실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다면 남는건 또 끝을 모를 전쟁 뿐이다.

"느껴져. 지금 나와, 당신의 애들이 싸우려 해. 상상은 해봤지만 이렇게 되다니."

"연맹이나 연합도 당황하겠지만 네가 정말 모두를 상대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

이브는 즉답했다. 휘어진 눈을 보고 문득 불길함이 들었는데, 그녀가 내뜸 자기 배를 쓰다듬었다.

"혹시 보여? 지금 당신의 진짜 유전정보를 받아낸 김에, 새로운 군단병들을 만들고 있어. 이 애들은 우리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더 이상 나라는 존재에 집착하지도 않게 되었으니까 가능한 일이지. 그 애들이 곧 하나의 작은 하이브마인드가, 즉 여왕들이 되어 이 우주를 휩쓸거야. 당신처럼 자신만의 군단을 만들어서."

"끔찍한 소리 하지마."

"내 이름을 이브라고 지은 의미가 이것이라고 생각할래. 당신이 신시대의 아담이야. 이제 '우리가' 이 우주의 진짜 인류가 된다."

그녀가 말한 우리라는 단어의 의미를 께닫고 소름이 돋은 내가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녀는 무시했다.

실제로 가장 깊숙한 둥지에서 빠르게 분열하고 있는 생물들이 수천 이상 자라나고 있었다.

이브에게 내 유전정보를 넘겨준건 처음 하나가 되었을 때이고 일개 인간의 유전자라 별 신경 안쓰더니 이제는 아닌 모양이다.

"실, 실례합니다. 지금 급히 소집을...꺄아악!"

"아 이런, 문 잠구는걸 깜빡했나."

레비크 중위가 다급히 들어와서 우릴 보더니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갔다. 아무래도 이브가 움직인 본격적인 군단병들에 대한 소식이 벌써 연맹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왜 저러는거지?"

"너도 이제 알텐데? 조금이라도 부끄러운줄 알고 옷이나 입어."

피식거리는 이브의 모습에 혀를 차곤 뒷정리를 하고 옷을 입은채 방을 나왔다. 이미 소문이 퍼졌는지 주변 사람들의 눈길이 심상찮다.

이제 와서 딱히 수습할 생각은 없지만, 어째 골이 아파왔다.

*

"이건 미친 짓이야."

"글쎄, 난 재밌을 것 같은데."

"차지연씨! 그만 둬요!"

군단이, 정확히는 이브가 점령한 행성 센젤.

이곳에서 두 집단이 충돌했다. 특이한 점은 두 집단 모두 비슷비슷하게 생긴 군단병들이 주축이라는 점.

그리고 그 중심에 각자의 하이브마인드를 따르는 서브마인드들이 있었다.

재밌다는 듯 웃고 있는 라몬에 비해 가면을 벗은 강도연은 차지연과, 그녀와 함께하는 에볼루션 출신 서브마인드들에게 그만두라 외쳤다.

"걱정할 필요 없어. 우리는 결국 '군단'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야. 서로 죽여도 다시 살아나지. 그러니까 강도연씨. 당신도 당신의 목적을 위해 그냥 싸워."

"목적이라니요...?"

"예시를 들어줄까? 나는 이브와 거래했어. 너희를 여기서 막으면 다음 전장으로 카사라스의 본진에 보내서, 내 플레이어 라스...그 개자식의 목을 딸 수 있게 해준다 했거든."

차지연은 차갑게 웃었다.

그녀는 과거의 레이나처럼, 복수라는 이름의 광기에 따라 움직인다.

언젠가 그녀도 레이나처럼 그 예기를 잃고 이브에게 내쳐질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맞는 말이군. 내가 군단과 함께하며 바라는 목표는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녀석들과 싸우는 것이다. 그 투쟁과 전투가 나를 있게한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라몬이 차지연의 말에 동조하며 강도연을 흘끔거렸다.

"...난 처음부터 지금까지 강해지는게 목표였어. 지킬 것을 지키고, 벨 수 있는걸 베기 위해."

"그렇다면 지금은 좋은 기회다. 강해질 기회!"

입술을 깨문 강도연의 대답에 히죽이며 가면을 쓴 라몬이 자신의 무장인 태도를 들었다.

차지연 역시 가면을 쓰며 무장을 이용해 거대한 자기폭풍을 폭사했고, 끝내 가면을 쓴 강도연도 자신의 깃털로 만든 수백개의 송곳을 뿜어내며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갔다.

'이건 미친짓이라니까? 비효율적이고 멍청하다고.'

리하르트만이 연신 한숨을 내쉬며 억지로 군단병들을 움직였다.

이렇듯 군단병들끼리 충돌했지만 그동안의 결과들이 미리 답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 전투는 전력 낭비 따위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일종의 훈련에 가까웠다. 그 힘을 폭사할 때를 기다리는 담금질이었다.

"저 미친 퍼런 외계인들이!"

"하지만 그 행동들이 살짝 이상합니다!"

이브가 선포한 진정한 전쟁의 여파는 모든 세력에게 향했다. 서로 전쟁 직전이던 카사라스와 다차원 연합도 마찬가지였다.

연합의 총통 미하일은 카사라스들의 행동에 분노하면서도 이브의 전면적인 침공에 당황했다.

"이건 기회라고 생각하겠소."

"...그게 무슨 소리지?"

"모든 데이터를 살폈지. 하지만 이번엔 늘상 일정한 패턴이나 규칙을 보이던 행동들에 전혀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맞소, 이것은 일종의 시험이오. 게임의 최종 승자가 패자들에게 내는 시험. 이 시험을 통과하면 자격을 얻을 수 있겠군."

곁에 있던 칼타스가 혼자 웃었다. 미하일은 도통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그의 능력은 확실했다.

"그 자격이 뭔데 그러는거요 대체."

"살아남아 자신과 싸울 수 있는 자격? 뭐 이렇게 말하니 전과 별 다를건 없지만. 지금 당장 총회를 소집하고 전군을 움직이는게 좋겠소. 소모전도 아니고 단발성 공격이지만 거치고 나면 분명 몇 개 행성은 떨어질 것이니, 놈들은 더 강해지고 우린 약해질 것이오."

칼타스는 이브의 의도를 대충 읽어냈고 그 결과 이기지 못한다는 결론까지 단번에 내버렸다.

'한낱 짐승이었다면 차라리 모른다. 하지만 결국, 저 괴물들은 또 한 번 성장했다. 지금 이 수준으로는 이길 길이 보이지 않는다. 최소 수십에서 수백년은 필요하다.'

사실상 판정패를 인정한 그는 냉정히, 그리고 길게 보았다.

따지고보면 다차원 연합은 결성한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군단도 성장하지만 연합도 군단과 경쟁하며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이브가 온 우주의 자원을 무한정으로 파먹으며 오직 끝장을 보려는게 아닌이상 길게 길게 본다면 언젠가는 기회가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것도 이번 웨이브를 막아내는데 성공한 이후의 이야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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