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의미를 찾아서(1)
'으윽...'
이브는 가까스로 충격을 견뎌냈다. 군체의식이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은건 사실상 처음 있는 일. 그렇기에 충격이 더 컸다.
그나마 불길이 더 번지기 전에 반사적으로 연결을 끊어 내어 망정이지, 조금만 더 늦었어도 피해는 제곱 이상으로 커질 수 있었다.
'이게, 이게 이런 식으로 될 줄이야.'
'...괜찮은거 맞지 이브?'
그동안 숨겨져 왔던 지창현의 힘을 실감한 이브가 침음했다. 함께 타격을 받은 신우 역시 처음 받아보는 충격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건 정말 최악의 상성이야. 놈을 상대로 할 수 있는건 당하는 즉시 먼저 연결을 끊어 불이 번지지 않도록 하는 것 뿐.'
몇가지 조건이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졌다.
우선 지창현의 힘이, 이브의 거대한 군체의식에 타격을 줄만큼 강하다는 것.
비슷한 능력을 가진 이들은 몇 있었으나 그들은 오히려 군체의식에 짓눌려 역으로 당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그밖에도 미처 알지 못한 이브가 하필 연결이 강한 서브마인드 모리스를 잃은 것, 지금까지 군체의식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공격 받을걸 상정하지 못한 것 등등.
'패배다. 렐에 주둔한, 그 주변 모든 군단의 컨트롤을 잃었어.'
이브가 이를 갈았다.
반사적으로, 그리고 가까스로 수습하는데 성공했지만 피해를 본건 사실이었다.
마치 전원버튼 꺼진 로봇처럼 직전까지 격렬하게 싸우던 군단병들이 일제히 생기를 잃고 쓰러졌다.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한 셈이었다.
지금까지 하이브마인드의 정체를 모르고, 군단병들을 별개의 개체로 인식하고 있던 이들에게 의심의 씨앗을 준 것이니까.
"...이건."
실제로 지창현은 당황한 군인들 사이에서 직감적으로 무언가를 알아차렸다는 듯, 자신의 불길이 닿지 않았음에도 죽어버린 군단병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안타깝긴 하지만 어쨌든 그가 너무 큰 적이라는 거니까.'
'글쎄. 지금 지창현이 죽어버리면 의심할거야. 우리가 유닛일 수도 있다는걸.'
'지금 시점에서 이제 그런건 중요하지 않아.'
지창현을 주시하고 있는 신우가 무엇을 하려는건지 알아챈 이브가 의문을 제기했으나, 신우는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마지막 챕터에 들어온 유닛들이 서로간의 경쟁을 그만두고, 연합이나 연맹의 이름아래 뭉치며 군단과 적대할때 척살권이 날아오는 빈도가 늘어났다. 비록 군단이 척살권에 면역인걸 알아도 잠시간은 전장에서 이탈시킬 수 있으니까.
'우리가 유닛이라는건 이미 다 알고 있겠지. 그러니까, 당연히 플레이어도 생각할테고.'
신우는 척살권을 사용했다. 그 대상은 당연히 지창현이다.
한때는 좋은 인연을 쌓으며 교류를 이어갔지만, 아니 사실은 직전까지도 서로 만났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군단의 하이브마인드니까. 가장 큰 위협이 될만한 존재를 살려둘 수는 없었다.
"이럴 수가!"
"지, 지부장님!!"
눈을 부릅뜬 지창현은 마치 저격에 맞은 듯 천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군단의 전멸이라는 예상외의 결과에 기겁한 주변 이들은 또한번 경악하며 그에게 모여들었다.
'...척살권!'
'척살권이다. 설마 배신?! 아니면...설마.'
그들 중에 섞여 있는 유닛과 플레이어들은 이 의문의 저격이 척살권임을 알아차렸다.
"지, 지부장님이 사망하셨습니다. 맥도 안뛰고, 호흡도 끊겼습니다!"
유닛 출신들이 서로를, 그리고 널브러진 군단병들의 시체를 경계하는 사이. 그런 사실을 모르는 현지 병력들은 지창현의 시신을 둘러싸고 패닉에 빠졌다.
"잠깐! 뒤로 물러나시오!"
하지만 사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쩔줄 모르던 사람들은, 갑작스레 그의 몸에서 타오르기 시작하는 불길에 놀라 뒷걸음질쳤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이브는 치솟는 불길을 보며 히죽 웃었다. 이런 결말, 바라지 않았다. 이만큼이나 성장한 자신에게 언제 나타날지 몰랐던, 감히 자신에게 처음으로 손상을 입힌 대적자. 이렇게 허무하게 잃을 수 없었다.
"불이, 날아오릅니다..."
지창현의 몸을 거세게 휘감은 불길이 더욱 거세게 타오르더니, 쓰러졌던 그의 몸을 일으켜 허공에 띄워 올렸다.
사람들 모두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날개와 같이 퍼지는 이글거리는 커다란 불길이 허공을 달구었다.
"..."
그리고선 천천히 눈을 떴다. 척살권에 맞아 혼과 육신이 이탈해 버렸지만, 다시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마치 불사조처럼.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원인은 모르지만 괴물들이 입은 이 전체적인 타격에서 벗어나기 전에 게이트를 닫읍시다."
그는 멍하니 자신을 보는 사람들을 지휘했다.
게이트는 강한 충격으로 뒤틀리면 다시 여는데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이브는 굳이 게이트를 지키려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나는 오히려 기뻐. 드디어 나타난거야. 내가 뛰어넘어야 할 적이.'
'하지만 그 적은 불을 휘둘러 군단병들의 스트링을 통해 우리 본체에 직접 타격을 줄 수 있는 괴물인데. 무슨 수로 이기려고?'
'방법은 간단하잖아?'
이브는 오히려 진심으로 기쁘다는듯 웃었다.
기존처럼 군단으로 덤벼서는 지창현을 이길 수 없다. 한번 베이기라도 하는 순간 단칼에 쓸려나갈 테니까.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에게 베이지 않으면 되는거야. 1대1로, 그대로 잡으면 끝.'
최근 그와 여러번 겨뤄보아서 안다.
투지를 불태운 이브는 손상된 병력을 수습하고, 살아남은 병력은 전부 후퇴시켰다.
'...지금의 이브는 대처 방법을 알아. 왜냐하면 계속해서 그런 방향으로 성장해왔으니까. 하지만 이런 방식을 모르는, 오직 포식과 파괴의 화신이던 이브는 대체 어떻게 지창현을 이기고 승자가 된거지?'
[뜨거우면 바로 손을 떼어 화상을 최소화 하듯, 이브 역시 군체의식을 조절할 수 있다. 물론 지창현의 공격은 군단병들을 대량으로 잡아낼 수 있지만, 그 또한 혼자 아닌가]
'결국 미친 물량으로 그냥 밀어버렸다는거지 지금? 그 어마어마한 피해를 감수하고서.'
신우는 관조자의 답에서 의도를 파악하고 혀를 내둘렀다.
*
"정말 괜찮으십니까? 역시 그것은 척살..."
"맞습니다. 그리고 괜찮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단련해 왔으니까."
그동안 명확한 적을 선택하기보다는 전체적인 세력전에 집중하던 이브가 자신을 대적자 중 하나로 설정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지창현은, 다소 싱겁게 끝나버린 전쟁의 뒷수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슬쩍 다가 온 사람은 다름아닌 같은 기구 소속의 헌터 유리에. 그녀 역시 유닛이었으며, 그가 당한 것의 정체도 알고 있었다.
"어쨌든 다행입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상 렐은 자기네들의 모든 것을 건 상태에서 큰 피해 없이 전투가 마무리 되었으니."
"...그렇죠."
'왜 이렇게 되었느냐라. 나는 그토록 큰 업화는 본적이 없다.'
귀를 쫑긋거리는 유리에의 말에 지창현은 속으로 침음했다. 사실 그는 어느 정도 감을 잡은 상태였다.
[맞다. 그 거대한 업화는 그 크기만 보면 절대 개인의 것이 아니다. 수억만, 수십억의 생명을 해쳐야만 얻을 수 있는 거대한 업.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업화의 불길이 태우는 것은 오직 하나의 영혼, 즉 단일대상이다]
"그렇다면 저 괴물들, 아니 카테고리 Z가...사실은 하나의 존재라는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불가능은 없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왜냐하면, 너희와 내가 이렇게 연결되었으니까]
지창현은 플레이어와 대화하며 흠칫했다.
맞는 말이었다. 게임 시스템이 개입한 이상 불가능이라는건 없다.
"확, 확인을 해봐야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엔 놈들을 찾아가야겠군]
"그전에 업화를 일으킬 수 있는 후계자를 먼저 찾겠습니다."
그는 한걸음 더 먼곳을 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뒷일을 부탁할 후계를 먼저 찾을 생각이었다.
[마땅한 이가 있느냐]
"확신할 순 없지만, 일단 모든 힘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미친 재능을 하나, 아니 둘 알고 있습니다."
그는 통신기를 꺼내들어 어딘가로 통신을 날렸다. 몇 번의 교환을 거쳐 그의 전화가 전달된 곳은, 그가 직전까지 있었던 행성.
"왜 전화했지?"
어딘가 아픈듯 불편해 보이는, 건방진 단답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붉은 눈을 번득이는 흑발의 여인이었다.
"어디 아픕니까?"
"...데였어."
"치료 받으시길. 그리고 큰 부상이 아니라면, 급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제가 받았습니다."
어딘가 굳어있는 이브 대신 신우가 전화를 대신 받았다. 지창현은 굳이 본론을 숨기지 않았다.
"군단의 약점을 찾았으니, 그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지금 당장 이 기술을 배울 수 있는건 그 공명법을 익힌 두 사람이 유일한 것 같습니다."
"아아...그렇습니까?"
신우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브와 엮인 이후 적어도 자신을 숨기거나 감정을 컨트롤 하는데는 도가 튼 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