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미묘한 균형(10)
'내가 연맹과 조금 놀아준다고, 여력이 없다고 아주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야.'
지창현을 필두로 한 렐의 방위군과 맞서기 직전. 이브는 다른 쪽으로 잠시 시선을 돌렸다.
연맹의 지원 요청을 받은 연합이 병력을 마련해서 이브가 완전둥지화 시킨 행성 중 하나인 라티스로 쳐들어오는 중이었다.
신우가 따로 병력을 보내 그들의 세력권 한곳을 공격했는데도, 개의치 않고서.
연합 입장에서도 기껏 성과를 내었으니 어떻게든 이브에게 타격을 입히고 싶은 입장이었다.
'요즘 군단으로서의 모습을 덜 보여줘서 그런가?'
그런 그들을 비웃은 이브가 병력을 움직였다. 지금은 잠시 에너지를 비축하고만 있던 둥지에서 빠르게 군단병들이 생산되며, 지난번 카사라스와의 전쟁에 동원되었던 병력의 일부가 휴면을 깨고 모여들었다.
균형을 맞추고 줄다리기를 하며 아슬아슬한 실험을 진행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전력이다.
굳이 길게 상대하지 않고 찍어 누를 생각이었으니까.
"...역시, 놈들의 전력은 숨겨져 있었소."
"그럼 대체 왜, 고작 행성 한 개를 사이에 둔 연맹과의 전쟁을 그리 질질 끈단 말인가?!"
군단의 저력을 확인한 연합군 내부도 혼란에 빠졌다. 그들의 상식으로 갑자기 힘을 아끼는 이브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합의 원정 함대에는 다양한 세상의 다양한 종족들이 모여 있었지만 그렇듯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렴 이브가 고의적으로 사람들에게 압박을 주어 성장시키고 그것을 자신의 성장을 위한 발판으로 쓴다는 해괴하고 괴이한 발상은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었으니까.
'...고의적으로 전쟁을 지속한다. 자원을 소모시키려는 목적인가? 아니 그럴리 없다. 그냥 즈려밟으면 짓밟힐텐데 소모전을 할리가 없다.'
한가지 변수는 연합군 내부에 마계 출신 오크군도 끼어 있었다는 것.
그들은 마계의, 특히 마왕 라몬의 가치관에 익숙했다. 용사마저 키워 먹으려던 그 투쟁의 화신이.
"아니. 무슨 경우든 상관 없소. 우리의 목표는 놈들을 공격하여 간접적으로 연맹을 돕고, 우리의 원한을 갚는 것이오."
연합측 사령관은 한자리에 모인 연합의 일원들에게 단결을 위한 원한을 언급했다.
그들이 가진 군단에 대한 복수심은 연맹과 마찬가지, 아니 오히려 오래된 만큼 더 심했다.
그 복수심이 이질적인 이종족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 연합의 근본이기도 하니 곧 이브의 업이기도 했다.
이브는 어쨌든 자신도 모르게, 이곳에서도 '실험'을 진행한 셈이었다.
"강습 준비!"
"반드시 일정 넓이 이상의 땅을 확보해야 한다!"
곧 함대가 행성의 권역에 접근했다.
그들의 목적은 지상에 착륙하여, 자신들이 만든 대군단전 전용 주술을 가동하는 것.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비효율적인 우주 함대전을 피하는 이브는 함대로 그들을 막지 않고, 방어 기관들의 사정권에 닿는 대기권으로 끌어들였다.
"저걸 봐, 마족이야. 오크종. 그 옆에는 귀쟁이도 있고, 눈 한개달린 거인도 있어."
"...알겠어. 일단 오크는 반드시 죽일게."
"우리의 근본을 알리는거야. 우리가 스스로 멈춘 것이지, 저놈들이 멈춰세운게 아니라는걸 보여줘."
씩 웃은 이브가 아바타의 손을 움직여 지금 한창 강습전을 벌이는 연합군을 가리켰다.
곁에는 하늘색 머리를 흩날리는 차지연이 서 있었다. 인간과의 전투를 거부하는 그녀를, 써먹을 수 있는 전장으로 돌린 것이다.
그리고 연합군 내부의 마족들은 그녀의 참전에 아주 좋은 명분을 주었다.
"최대한 시간을 끌고 자원을 소모시키려는 것이겠지만, 안통해."
자기력으로 움직이는 자신의 무장과 함께 허공에 날아오른 차지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브는 여유롭게 의자에 앉았다.
계산은 완벽했다. 자신의 전력을 모르고 쳐들어 온 연합의 별동대 따위, 바로 부숴버릴 수 있었다.
그런 하이브마인드의 의지에 따라 수많은 군단병들이 적들을 향해 달려갔다.
하늘을 가득 채우는 비행종들이 고도를 낮추는 적들의 함대를 공격하고, 땅을 가로지르는 지상군은 강습한 연합군을 습격했다.
완벽한 최적화를 완료한 군단의 둥지는 기존에 비해 훨씬 빠르게 추가적인 병력을 생산했다.
수십마리가 땅을 울리며 떼지어서 돌진하는 군단의 초대형종들이 이 압도적인 생산력의 증거였다.
'백날천날 흙인형들을 만들어 봐야, 모래성 따위로 바닷물을 막을 수 있겠냐고.'
자신의 시야를 옮긴 이브가 히죽거렸다. 사실 그동안 잠시 봉인해 두었던 폭발적인 힘의 분출을 지금 오랜만에 만끽하는 중이었으니까.
"이럴 수가...놈들이 더 강해진 것 같..."
"술사들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브는 눈을 감고 그들의 비명을 즐겼다. 기껏 착륙해서 흙인형을 일으키는 주술을 사용한 연합군은 그럼에도 군단병들을 밀어내지 못하자 크게 당황했다.
맨틀층까지 박혀 있는 신목의 뿌리가 다치는걸 감수하고 데스웜 같은 초거대 병종들도 아끼지 않았다. 정말 조금의 자비도 없이, 짓밟을 생각이었다. 자신의 본성대로.
"이럴 수가...예상과 전혀 다르지 않은가!?"
오크들의 우두머리 라쉬크. 그는 자신의 무기인 폴암을 움켜쥐고 주춤거렸다.
흙에서 몸을 일으킨 커다란 소환수가 달려가더니, 전방에서 달려오던 초대형종과 충돌했다.
하지만 초대형종은 밀리지 않았다. 고통도 두려움도 모르고 끝도 없이 일어나는 인형들을 상대하는 군단병들 역시 애초에 두려움과 고통을 모르는 존재들이었다.
크고작은 다양한 병종들의 군단병들이 자신들을 복제하는 흙인형들을 천천히 밀어내며 중심부로 향했다.
"버, 버티면 될겁니다. 아무리 놈들이 많다 한들 무한하진 않습니다!"
그들은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았다. 버티면 된다는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이번에도 아무 수확 없이 돌아갈 순 없었다. 카사라스들의 멸절탄을 제외하면 그동안 거의 타격 입지 않았던 군단의 둥지를, 자신들의 손으로 파괴하는게 가장 큰 목적이었다.
"큭...이놈은 또 뭐냐."
"연맹측에서 보고 된 특수종! 검은 번개!"
치열하게 싸우는 그런 그들의 앞에 도착한건 하나의 특수종. 하늘색 머리칼을 흩날리는 그것은, 가면 속에서 안광들을 빛내더니 자신의 곁에 둥둥 떠 있던 장비를 가동시켰다.
"끄아악!"
"말도 안 돼!"
곧 푸른 빛이 응집하다 단숨에 뿜어진 차지연의 전용 무장에서 강력한 전자파 폭탄이 터져나오고, 연합의 주요 장비들을 다운시켰다.
강한 충격에 비틀거린 라쉬크는 화들짝 놀라 폴암을 휘둘렀다. 그러나 뿜어진 검은 번개는, 경악한 그의 몸을 그대로 밀어버렸다.
"이런 멍청한...전부 덤벼라!"
순간적으로 엄호사격이 불가능해진 연합군을 보고 혀를 찬 그는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의 화력을 받아내며 양 팔을 교차시킨 차지연이 출력을 더 격렬하게 끌어올리더니, 이내 응집한 전격 폭풍을 전방을 향해 뿜어내었다.
"역시나."
이브는 쓸려나가는 연합군을 보고 짜릿함을 느꼈다. 그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며 진정한 성장을 위해 참고 있던 원초적인 본능을 마음껏 해소하는 중이었다.
'이정도 기분이라면 여유롭게 받아줄 수 있지.'
히죽거린 이브는 또다시 시선을 바꾸었다. 군단병들과, 차지연의 활약 앞에 무너져 내리는 연합군에는 이미 관심을 껐다.
대신 렐에서는 지금 이곳보다 더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입장이 반대었다. 이브가 침략자이고, 적들이 방어자였다. 당연히 방어하는 입장은 한계를 넘어선 절박함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아. 드디어 보인다.'
이브의 눈에, 저 멀리서 치솟는 불길이 보였다. 스치는 것 만으로 단단한 갑각을 기본으로 부착하고 있는 군단병들을 내부까지 깔끔하게 태워버리는 강력한 불.
이브는 애초에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 저 불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모습으로 붙어보는건 처음이거든. 가서 한번 제대로 맞이해 봐.'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기하던 모리스가 하늘로 날아올라, 소수의 병력을 데리고 지창현을 향해 쇄도했다.
이브는 흥미진진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지창현의 실력을 어느정도 알기에 재밌는 장면이 나올 수 있을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원죄를 태우는 불, 업화. 역시나 상성이 극악이구나 셀 수도 없는 업을 쌓아 온 우주의 괴물들아."
그러나 지창현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검을 들어 휘둘렀다. 순간 뿜어진 불길이 그의 몸과, 눈에서도 타올랐다.
'...!'
자신의 검을 들고 그에게 달려가던 모리스는 그 불길에 직격당했다. 그러나 가장 큰 타격은, 단순히 불길에 적중당한게 아니었다.
'으, 으아아악!'
모리스는 자신의 몸을 세포 하나 하나 태워버리는 불길에 비명을 질렀다.
최대출력의 베리어도, 단단한 갑각도 소용 없었다. 형상력을 잡아먹는 형상력이 그의 불길이었다.
이 지옥불의 원료는 대상자의 혼에 새겨진 업으로, 군단의 일부가 된 상태인 모리스는 졸지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업화에 전신이 끝까지 타 일격에 죽은 것이다.
"크하악..."
문제는 이 불길이 일개 단말에 불과한 모리스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
업화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영혼의 끈, 유독 두꺼운 서브마인드의 스트링을 타고 타올라 군단의 군체의식까지 손상을 주기 시작했다.
본질 자체가 포식과 살육, 즉 업보 덩어리인 이브의 진정한 극상성인 힘이다.
순간 전 우주에 퍼져 있는 군단이 요동쳤다. 이브 본인의 모든 아바타 역시, 생전 처음 겪는 타격에 피거품을 토하며 비틀거렸다.
지창현은 단 한번의 일격으로, 본의아니게 군단 전체에 타격을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