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239화 (239/254)

239화-미묘한 균형(9)

"맞아. 이렇게 나와야지."

이브는 만족했다. 상처 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분노하고 원하는대로 항쟁했다.

이 모든 행위가 이브에게는 그저 농사를 짓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만큼 저항하는 연맹의 힘이 떨어져 있는 탓이었다.

"...?"

하지만 이브의 적은 연맹만 있는게 아니었다. 나는 미리 라몬과 강도연을 파견해서 연합을 공격하고자 했지만, 연맹과 손을 잡았다는 연합도 소식을 들었는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쯧, 귀찮게 굴기는."

"왜? 연합은 그 태생부터가 우리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들이야. 이용하긴 연맹보다 좋은 것 아닌가?"

나는 슬쩍 눈치를 보며 말했다. 이브가 자체적으로 계산한 바에 따르면, 또다시 시작된 연합의 침공은 지금은 조금 부담인가?

"그놈들은 이상한 수작질을 부리잖아. 무엇보다, 아직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도 아니고. 지금은 방해야. 물론 딱히 상관은 없는게 맞아."

대기하고 있던 군단의 예비대가 슬금슬금 다가오는 연합군을 상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애초에 지금 이브는 자신의 힘을 굉장히 아끼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적당히 맞춰가면 그걸로 된거겠지.'

이브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주시해야 했다. 실험을 핑계로 자발적으로 조절하고는 있지만 언제 그 마음이 변해 몰아칠지 모르니까.

다소 애매한 이 균형이 조금이나마 복구되려면 지금 움츠러든 카사라스들이 다시 움직여줘야 하는데, 그들이 언제 다시 움직일지 감을 잡기 힘들었다.

"지창현이 자기도 렐에 가겠다던데. 지구가 아닌 곳에서 참전하는건 처음이래."

"그 사람이? 괜찮은거야?"

"까다로운 놈이긴 해. 어쩌면 지금까지 만나서 나와 싸워봤던 그 어떤 놈들보다도. 심지어 나는 아직도 그놈의 전력을 몰라."

내가 여러가지 계산하는 사이 멍하니 창 밖을 보고 있던 이브가 지창현을 언급했다.

"분명 도움은...되겠지. 애초에 실험의 목적은, 그런 강자들을 만들어내서 싸우는거니까."

경계심이 내게도 느껴질 정도다. 요즘 그와 자주 겨루어 본다는건 알지만 이정도일 줄은. 무엇보다 거대한 집단 그 자체인 이브가 결국 한명의 존재일 뿐인 지창현을 경계하는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옛날이었다면 신경쓰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이기는건 이기는게 아니잖아. 나도 모르겠다. 일단 모리스로는 절대 그놈을 못이겨. 기간티아를 한 개체 더 만들어야 하나?"

투덜거린 이브가 걸음을 옮기더니 왔다갔다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간티아는 지난번 이브가 연합군을 상대할때 선보인, 현재 설계 가능한 가장 크고 강한 아바타.

그것을 동원하려 할 정도로 그를 신경쓰고 있었다.

[이대로 만족하나?]

"지금 당장은. 근데 정말 하나만 물어보지. 이대로 흘러가면, 게임이 안끝나는건 확실한거지?"

[...그렇다]

이브가 잠시 자리를 비운사이. 의자에 털썩 앉은 나는 허공에 떠오르는 글자를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최근 나와 관조자의 대화 주제는 단 하나였다. 게임 시스템을 이대로 멈춰 놓는게 가능한지 불가능한지에 대해서.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이 시스템이 단순한 유희를 위해 만들어진게 아닌 이상 분명 그 목적이 있을거란 말이지. 그 목적이란거, 정말 끝까지 밀려도 문제 없는거 맞나?"

[솔직히 말하면 그것 마저도 확신할 수 없다]

"아니 진짜 개답답하네 너희."

어처구니가 없어 한숨이 나왔다. 이쯤되면 금제니 뭐니 다 소용 없는거 아닌가? 그런데도 왜 속시원히 말해주질 못하는건지.

[가능한한 답해주자면, 시스템의 '목적'은 본디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목적이,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소린가?"

[가장 강한 유닛, 가장 강한 존재를 가리는 프로젝트...그것이 해답이다]

최근 들었던것 중 가장 큰 힌트였다. 물론 전부터 대충 감은 잡고 있던 것이긴 했지만, 초대의 시스템은 이브를 그 끝을 모를 끝장 병기로 만들어 무엇을 하려고 했던걸까.

그 당시의 이브는 보나마나였다. 그 어떠한 상식도 감정도 통하지 않는 잔혹한 포식자 그 자체겠지.

지금처럼 다방면의 성장을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즐기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그런 것도 없다. 여차하면 다른 세력에 직접 들어가 어울리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끝이 아닌거지? 단순히 게임의 승자가 되었다고 해서."

[...]

"카사라스는 장막을 들춘다는 표현을 썼다. 동시에 그들은 스스로를 관측자라고 말하고. 설마 이 우주 밖에 또 다른 적이 있나?"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쌌다.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3파전인 지금 또 하나의 적이 추가된다. 그리고 그 적은 높은 확률로 매우 강력하며, 3개 세력 모두를 적대할 것이다.

강함 자체는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반복되는 회차에서는 최종 승자가 된 이브의 강함을 그놈들도 감히 견디지 못해 싹 쓸려나간것 같으니까.

문제는 지금의 이브는 그렇지 않다는 것. 기껏 이브를 억제하며 균형을 맞춰놔도, 외우주의 정체 모를 적들에게 다 같이 쓸려나가면 그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이브는 지금 새로운 방향으로 성장하지. 그리고 그 성장은 이브 혼자만의 성장이 아니야. 나는 그것이 나쁘지 않다고 본다]

"..좋아. 그정도만 말해도 무슨 소린지 대충 알겠어."

머리가 아파진 나도 방을 나와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전쟁과 좀 떨어진 이곳은 사람들이 나름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고, 그 풍경은 내게 익숙한 지구의 도심지와 비슷했다.

'결국 서로 쥐잡듯이 싸워서 강해지는게 해답이란건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전쟁에 불안해 하면서도 분주히 자기 일들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우리끼리의 투닥거림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싸운다고 꼭 둘다 성장하고 강해지는건 아니었다.

자원과 인력을 소모하고 둘다 약해지거나 한쪽이 무너질수도 있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

내 눈에, 장비들이 동원되어 부서진 빌딩이 재건되고 있는 건설현장이 보였다.

다시 학교에 가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였다.

이곳, 이 행성에서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연맹도 연합도 카사라스 마저도 그 어떤 상황에 처하든 미래를 보고 움직이고 있다.

적어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싸우기 싫어도 싸워야 했다. 그것이, 과연 성공일지 실패일지 모를 이번 회차의 끝이었다.

'아군이 적들의 행성에 근접하고 있다.'

군체의식을 통해 전달되는 의지에 나는 화면을 활성화했다. 보이는 것은, 침략요새를 이끌고 연합 소속의 행성을 공격하러 떠난 내 병사들의 모습이었다.

명확한 목적 따위 없는, 싸움 그 자체가 목적인 첫 공격이다.

'명령이 뭐지? 점령 시도?'

'아니. 그냥 내킬만큼 날뛰고 와.'

'...그거 아주 마음에 드는군.'

나는 명령 자체를 정해주지 않았다. 요새 위에 있던 라몬은 아주 마음에 든다는 듯 씩 웃더니, 그가 타고 있던 요새가 푸르게 보이는 행성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

"적들도 재정비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개자식들...우리 움직임을 읽은거야. 각개격파는 힘들겠군."

투덜거리는 군인들이 장비를 챙겼다. 행성 렐의 최전방. 연맹의 지원에 힘입어 렐의 임시정부는 영역 내 군단병들을 몰아내고 반격을 기획했다.

시간이 없었다. 군단의 둥지가 더 넓어지기 전에 어떻게든 몰아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고향에서 쫓겨나 다른 행성을 떠돌아야 했다.

"절대 좋지 않아. 누가 뭐라 해도, 고향은 지켜야 해."

"고향을...잃었나요?"

"심지어 같은 동족에게 잃었지. 연맹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절멸이었어."

멍하니 군인들을 지켜보던 세나에게 다가 온 유리에가 핑크색 귀를 쫑긋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고향은 비록 외부의 거대세력에게 노출되지는 않았지만 내부에서 다툼이 있었다. 한창 확장을 시도하던 연맹에겐 협력을 이끌어낼 딱 좋은 조건이었던 셈이었다.

"내 경험을 통해 말해주자면 이왕 이렇게 된거 이 기회를 철저히 이용해."

"이용이라니요?"

"아이러니하게도 생사를 오가는 격렬한 전장 1년이, 20년 넘게 수련한 것보다 더 큰 성취를 주었거든."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전쟁이, 전투가 끔찍하고 지겨워질수록 본인 스스로는 점점 더 강해졌다.

세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육신이 지치고 마음이 갈려나가는 대가로 경험들은 곧 자신의 힘이 되었다.

[조금만 더 익숙해진다면, 별도의 주술이나 장비 없이 가장 어려운 혈마법도 익힐 수 있을지 모른다]

세나의 플레이어도 그것을 인정했다. 세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유리에의 말대로, 이렇게 된 이상 역으로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뭐지?"

"연맹의 기함이다. 새로운 지원인가?!"

저 먼 하늘에서 구름을 가르며 큼직한 함선 하나가 나타난게 그때였다. 두 사람은 물론 근처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 함선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함재기들로 시선이 쏠렸다.

"반갑습니다. 지구인, 지창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곧 누군가가 차량을 타고 현장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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