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미묘한 균형(6)
"뭐, 이브의 방식도 어느 정도 납득은 간다. 먹이를 양식할 수 있다면, 농사 지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맞다. 본디 용사란 키워 먹는 것이다."
"..."
나는 입을 달싹거리다 다시 다물었다. 리하르트, 그리고 라몬. 어디 한군데 나사가 빠진 이놈들에게 상의를 하러 오는게 아니었다.
"대체 뭐가 문제지? 오히려 이브의 거센 확장이 잠잠해져서 다행인 것 아닌가?"
"이브는 분명 성장하겠지. 그것이 수확이든 경쟁이든 간에 말이야. 그 성장이 임계점을 넘으면, 균형이고 뭐고간에 이 우주는 이브의 손에 멸망한다."
나는 리하르트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내 심정을 알아주는건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예측 가능한 데이터 상으로도 이브의 행동은 알아챌 수 있을텐데.
"글쎄...너는 이브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 같은데, 비교적 최근에 군단에 합류한 나도 알만큼은 안다. 그리고 판단했다. 지금 이브나 다른 세력과의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아."
"이브는 늘 이런 상황에서 극적인 성장을 이루어 왔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라몬의 말에 동의할 수 없어 고개를 저었다.
미궁의 생물들, 파멸균, 지상의 마법사 의회, 그리고 우주에서 부딪힌 여러 세력까지.
이브가 압도적인 힘으로 처음부터 짓누른 경우는 거의 없다. 치열한 싸움과 경쟁. 그것을 통해 상대를 쓰러트리고 본인은 강해졌다.
그것들을 전부 봐온 나는 이브가 두려웠다. 아무리 애써도 내 손에 잡히지 않을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으니까.
"군단의 역사는 분명 실존하는 데이터지...하지만 네가 잊은게 있다."
"내가 잊었다고?"
리하르트가 다소 침착해진 목소리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나는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득 내 시선에 화면이 보였다.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군단의 모습이.
연맹의 거대함선 자코프 내부에 침투한 군단병들이 수비병력과 혈투를 벌이며 하나하나 그 시스템을 다운시키고 있는 모습이나, 서브마인드 리암의 기함으로 침투한 연맹 소속 헌터들의 싸움까지.
저건 이브의 전력이 아니었다. 필사적으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연맹측과는 달랐다.
"딱히 잊은 거 없는 것 같은데. 이브는 이미 자기가 만든 판에서 놀고 있어."
"말은 바로해야지. 자신이 '처음' 스스로 만든 판이잖나. 네가, 즉 플레이어의 도움 없이 만든 판 말이야. 어린 딸이 독립하려는게 불안한건 알겠지만, 네가 만들어 온 영향력이 그리 쉽게 사라지진 않을걸."
라몬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잠시 충격을 받아 말을 잃었다.
"내 도움 없이, 오직 자신만의 힘으로?"
"군단의 역사는 나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짧으면서도 격동적인 역사에, 네 개입이 없는 곳이 없어. 네가 하이브마인드가 되기 전, 이브에게 휘둘려 다녔다던 때도 이브는 네 영향을 받고 있었다."
"맞아. 솔직히 이브의 힘은 아직 미지수라고 보는게 맞을 것 같은데."
내가 얼이 빠진 사이 리하르트까지 라몬의 말에 동조했다.
"바, 받아들이기 힘든데."
"사실이다. 그러니 너는 이브를 두려워 하는게 아니라 걱정하는게 맞아.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누가 승자가 될지, 패자가 될지, 우리가 성공할지 실패할지 전부 다."
어딘가 해탈한 것 같은 표정으로 라몬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니 라몬도 어찌보면 비슷한 경우를 겪은 셈이었다.
단지 그는 그렇게 용사를 키우다 마지막 순간 역으로 당해버린게 다른 점이지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네."
"그렇지.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가만히 있을게 아니라, 우리 나름의 행동을 취해야 한다."
내가 인정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 귀신 답게, 어디든 싸우자고 부추기는 것이었다.
"그 말이 맞아 오빠."
그리고 그 순간. 또다른 이가 이곳에 끼어들었다.
"너무 큰 걱정 할 필요 없어. 그러니 우리는 계속 강해져야 해."
"차지연을 비롯한 이브의 서브마인드에게 경쟁심을 느끼는거지?"
"...그렇다고 쳐. 어쨌든 이브가 어떤 길을 걷든지 끼어들기 위해선 우리도 힘이 있어야 하잖아."
강도연은 내 눈을 피했다. 라몬과의 전투 이후, 투쟁 본능에 눈을 뜬 녀석은 은근한 망설임이 있던 전과는 달리 이제는 싸우는데 거침이 없었다.
"원정에도 레이나만 보내고..."
"레이나는 이미 정복군주로 경험도 풍부하니까. 아무튼 알겠어. 방침을 바꿔도 될 것 같네."
왜 레이나 혼자 청산족의 고향에 파견보냈냐며 툴툴거리는 모습에 쓰게 웃었다. 아무튼 이대로 가만히 있는게 손해라는건 맞는 말이었다.
결국은 나도, 우리 모두도 군단이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는 존재들. 끝없이 성장과 탐식을 추구해야 하는 이들이었다.
"이브가 연맹 지역과 투닥거림을 계속하는 사이, 연합이 다시 움직이려 하고 있지. 카사라스는 아직 힘을 회복중이니 우리는 연합을 견제하여 그 시선을 돌린다."
"아아. 드디어 전쟁인가."
라몬이 가면을 쓰며 히죽였다. 살짝 못미더웠지만 어차피 지휘관 역할은 원격으로도 리하르트가 가능하니까.
"좋아. 너희 둘이서 가."
나는 강도연과 라몬 둘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파괴전차 수준인 둘을 함께 보내는게 좀 걸리긴 한다. 하지만 그 무력과 파괴력은 확실하니, 적어도 게릴라엔 충분할 것이다.
'이번엔 우리가, 이브의 방식을 따라해도 되고.'
문득 든 생각에 희미하게 웃었다. 고의적인 투쟁과 경쟁을 이용한 성장. 우리라고 못할 것 없으니까.
*
'네가 먼저?'
'도와달라고 찡찡댄건 너야 이브. 언제나처럼, 마치 내가 널 위해 개미를 비롯한 표본들을 넣어주는 것 처럼.'
'그, 그게 대체 언제적 이야기야!?'
이브는 신우의 통보를 받고 당황했다. 기쁨과 짜증이 공존하는 오묘한 감정이었고, 신우는 그것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아쉬워 하면서도 기뻐하잖아.'
'큭...'
'아무렴, 네가 날 벗어날 순 없지.'
이브는 지금까지 그에게 자신을 숨긴 적이 없었다. 감정조절을 실패하고 속내를 내보이는 이브의 모습에 확신을 얻은 그는 조금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같이 싸우자. 늘 그랬던 것 처럼, 지금도 그러는 것 처럼.'
이미 이브의 뒤통수를 한번 친 전적이 있는 그는 눈하나 깜짝 안하고 이브를 달랬다.
이브는 그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거절하는게 불가능했다.
라몬과 리하르트를 비롯한, 타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서브마인드들이 일제히 입을 모은 것 처럼 아직 어린 딸은 아버지 격인 존재에게서 독립하기 쉽지 않았다.
'칫...다 죽여버려! 자코프 전체를 무력화 시켜!'
애써 관심을 돌린 이브는 전장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대상지는 지금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함선 내부. 그곳에선 지금 함선을 파괴하려는 군단병들이 필사의 각오로 저항하는 내부 인원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반드시, 반드시 사수해라!"
화기로 무장한 병사들이 사력을 다해 군단병들을 막아섰다.
그들이 이렇게 절박한건 다른 이유가 있는게 아니었다. 다른 함선이라면 모를까 이 거대한 함선은, 자코프는 절대 함락당하면 안된다.
한때 내부 세력다툼의 도구로 쓰인 자코프는 이제는 연맹 전체의 희망이었다. 절대 패배하지 않는 무적의 함선. 그 이름이 전쟁에 휘말린 사람들에게 주는 희망을 알고 있기에.
'...저런 잔챙이들은 영양가가 없어. 그냥 다 죽여.'
이브는 그런 그들을 보며 가차없는 살육 명령을 내렸다.
이브가 바라는 성장은 일정 이상의 힘을 조건으로 했다. 일반적인 병사들에게는 설령 그들이 한계를 넘어선 초월적인 힘이나 정신력을 보여주더라도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쓸데 없이 단단하긴.'
"상위종! 상위종이다! 타입은 워리어!"
이브는 병력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직접 조종하는 상위종 하나를 수비병력의 전면에 투입했다.
4개의 팔로 검을 휘두르고, 꼬리로 변칙적인 공격을 시도하는 상위종 워리어.
검을 빼들고 달려드는 이 규격 외의 괴물에도, 악에 받힌 병사들은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화력을 집중시켰다.
'멍청한 놈들.'
이브는 꼬리와 검을 휘두르며 그들을 베어내며 그들을 비웃었다. 그들의 공격은 베리어조차 깨지 못했다. 즉 무의미한 저항이라는 뜻이었다.
"구역 차단해! 그리고 날려버려!"
크게 베인 배에서 피를 질질 흘리던 한 병사가, 통신기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예상대로 찰나의 순간도 붙잡지 못했으니 최후의 방법을 동원할 생각이었다.
그 모든 광경을 보고 있던 상황실은 비통한 마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구역 봉쇄! 그리고 파괴해라!"
결국 해당 구역 제독의 명령에 따라, 상위종이 있던 구역이 통째로 봉쇄되었다. 그리고 군단병들이 그곳을 벗어나기 전에, 외부에서 그곳을 스스로 타격하여 부숴버렸다.
상위종은 다른 군단병들과 함께 우주공간으로 빨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