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미묘한 균형(5)
"끄흑...하아..."
고통은 컸다. 그러나 그녀가 기어이 정신을 붙잡을 수 있는건, 한계를 넘은 존재가 가질 수 있는 고양감 덕분.
그리고 죽음을 견딜 수 있는 존재들의 권능인 혈마법 덕분이었다.
고통이 빠르게 가시기 시작했다. 상처도 빠르게 지혈되며 점차 회복되어갔다. 그덕에 이젠 서 있을 힘도 없어 털썩 무릎을 꿇었지만, 어쨌든 다음 단계에 한걸음 내딛는데 성공한 세나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럴 수가!"
"괜찮으냐?!"
잠시 몸을 피했던 다른 사람들이 핏물이 흥건한 옥상을 가로질러 그녀에게 달려왔다. 지금 그녀의 몰골은 끔찍한 상태였지만, 모든 광경을 보아 온 사람들은 신경쓰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 정체가 무엇이든간에 영웅이었다.
"아, 안 돼."
하지만 세나는 탈진한 몸을 쉬게 할 수 없었다. 아직 한쪽 뿐인 팔로 파들거리며 몸을 돌렸다.
흔들리는 눈이, 어느새 눈앞에 나타난 적을 보고 절망으로 물들었다.
"뭐야 이놈은!"
"쏴버려!"
경악한 사람들이 미친듯이 총을 쏴댔지만 소총탄은 상위종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수종의 베리어에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곧, 얇디 얇은 수십자루 유리검이 두둥실 떠오르며 망연자실한 그들을 겨누었다.
'더 큰 상처.'
이곳으로 직행한 모리스는 세나를 제외한 전원을 죽이려 했다. 거기다 세나에게는 더 큰 상처를 입힐 생각이었다.
본래 담금질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으니까.
"으아악!"
"뭐야!"
그 순간. 위에서 난입한 무언가가 모리스의 검들을 가로막으며 강한 충격파를 터트렸고, 세나는 자신을 끌어안은 한 민병대 사내의 품안에서 튕겨 날아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게 되었다.
"민병대 구출 및 적 특수종 저격을 위해 긴급 탈출한 단원 유리에. 착지 완료."
'꼬, 꼬리?'
바닥에서 얼굴을 찡그린 세나가 가장 먼저 본 것은 군용 나노슈트 밖으로 튀어 나온 살랑이는 분홍색 꼬리였다.
그들 앞에 우뚝 서서, 강대한 적을 가로막은 상대의 흩날리는 분홍색 머리칼 위에는 고양이 귀 한쌍이 쫑긋거리고 있었다.
'...연맹의 지원이.'
공격이 막힌 모리스는 마치 거미의 얼굴을 닮은 것 같은 가면 속, 빛나는 8개의 눈으로 하늘을 쳐다 보았다.
지금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고양이 수인처럼, 우주권, 하나 둘 도착하는 연맹의 지원군이 이곳에 도달하고 있었다.
"특수종 검은 파편...등급은 추산 전이지만 급한대로 상대하겠음."
"위험해요!"
세나는 통신 내용을 엿듣고 놀라 그녀를 말렸지만, 피식 웃은 그녀는 손을 쫙 피고 슈트의 강화를 받은 날카로운 손톱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동시에 조금의 예비동작 없이 엄청난 탄력으로 앞으로 튀어나갔고, 코웃음을 친 모리스는 당연히 검들을 조종하여 그녀를 사방에서 베어내렸다.
"혼자가 아니야."
그녀는 몸을 극한으로 비틀며 양 팔을 휘둘러 자신의 전신을 노리던 모든 검들을 쳐냈다.
그 빈틈에 모리스가 직접 검을 들고 찔러들었으나, 어디선가 날아 온 강력한 저격이 베리어에 명중해 쩍쩍 갈라지는 금과 함께 그의 몸에 타격을 주었다.
'영웅, 수호자.'
세나는 은신을 풀며 나타난 새로운 존재가 그녀와 함께 모리스를 압박하는 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의도대로 세나의 성장은 끝나지 않는다. 눈앞의 광경을 보며 상처 대신 희망과 의지를 얻었다.
[나도 기적을 보고 있는 것 같군. 혈통을 초월한 혈마법의 진화가...]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던 플레이어가 그것을 인정했다. 비록 지금은 힘이 다했디만, 세나는 다음 번 전투에서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이런 이들이 세나만 있는게 아니었다.
비록 일개 군인, 일개 민병대라고 해도 이번 일을 계기로 내면의 벽을 넘어서는 이들이 있었다.
'차라리 그렇게 성장한 놈들을 단순한 농산물 수확하듯 베어버린 뒤 써먹을 수 있다면 좋을테지만, 나에 대한 원한으로 만들어진 존재는 역시 힘들겠지.'
'그 잘난 '성장'에 나도 포함인가?'
'당연해. 너희도 내 일부니까. 너희의 성장도 내 성장이라고. 하지만 명심해. 성장은 커녕 마음마저 꺾인다면, 난 그런 놈은 쓰지 않을거니까.'
이브는 지상의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만족했다.
아직은 실험일 뿐이다. 상대의 성장에 대해 그 성과를 확인했으니, 이제는 그것을 이용한 스스로의 성장을 이룰 차례였다.
'어처구니가 없군. 고작 이정도 규모의 함대로 뭘 하라는거지?'
'너도, 나도 할 수 있어. 지금까지 봐 왔잖아?'
'나참. 함대전은 개인의 노력과 마음가짐으로 어쩔 수 있는게 아니다.'
혀를 찬 리암은 상기된 이브와 달리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카사라스들의 본성 로나스 공략전에 참가했던 그는 이번에 행성 렐을 무대로 한 이 실험에 투입되었다. 그것도 극히 적은 병력만을 부여 받고서.
"한계를 넘는 성장...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에이미?"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기함의 가장 깊숙한 곳. 이곳에 모든 함대를 지휘하는 리암의 머리가 있다. 마치 거미줄이나 촉수 다발 같이 보이는 신경 덩어리에 덩그러니 걸려 있는 그의 머리 곁에는, 언제나 그와 함께 하는 부관 에이미가 있었다.
"별 수 없지. 까라면 까야지. 예나 지금이나 기구하군."
피식 웃은 그는 자신의 몸이나 마찬가지인 이 km급 기함을 포함 함대를 움직였다.
목적은 렐에 도착한 연맹의 함대를 막아, 적들의 함대가 지상군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것.
"섬멸이 아니라 시간끌기라면 혹시 모르지. 우선은, 저것부터 떨어트리든 해야겠는데."
리암은 저 멀리 보이는 것을 보고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큰 피해를 입은 연맹은 아직 제대로 수습도 하지 못한 상태. 이렇게 급한 상태에서, 빠르게 지원을 보내느라 조금 과한 전력을 곧바로 보내게 되었다.
"요새급 함선 자코프!"
리암이 지휘하는 군단의 함선체들이 일제히 퍼져 앞으로 돌진했다. 목표물은 기함급 함선 몇 배의 크기를 가지고 있는 연맹의 초필살기 중 하나.
주변의 호위함들과 함께, 자코프의 포문이 천천히 이곳을 향했다.
*
"놈들의 함선체들입니다!"
"제길! 그 숫자는! 설마 또 십만 단위인가?!"
"그, 그정도는 아닙니다. 기껏해야 수천 단위입니다."
자코프의 사령관은 보고를 듣고 현를 찼다. 수천이나 되는걸 '기껏해야'라는 말을 붙일 정도로, 그동안 겪은 전투는 말이 안되는 것이었으니.
'30년치, 아니 300년치 경험을 최근 1년간 다 쌓는 느낌이다.'
"포격하라!"
속으로 한숨을 내쉰 그는 포격을 명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독한 전쟁 경험으로 모든 과정이 최적화와 숙달이 되어 있었다.
이 압도적인 화력이면 이정도의 숫자 차이는 뒤집을 수 있다 판단한 사령관은 별 생각 없이 뿜어지는 포격을 바라보았다.
'전 함대 회피기동. 그리고 곧장 계획한 대형을 갖추고, 대기함전 특수기동을 시작한다.'
하지만 상대인 리암은 이미 자코프에 대한 모든 정보와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약 백여체를 내어주는 선에서 포격을 견뎌낸 함선체들은 리암의 명령대로 능숙한 함대전을 시작했다.
"사, 사령관님!"
"일제 사격을 중단하고 개별 요격에 들어가라!"
살짝 당황한 자코프도 포신을 사방으로 돌려가며 사방에서 몰아치려는 함선체들을 겨누고 마구 난사를 시작했다.
리암은 기함을 직접 이끌고 그 어지러운 화망을 뚫고 직접 돌진했다.
지금 리암은 인간 시절 익힌 함대전술을 사용하고 있지만, 군단의 함대전은 화력이 아닌 근본적으로 근접전이었다.
"수백척이 떨어져도 된다. 저 거대한 몸체에, 한번 시원하게 박아넣으면 곧바로 정지할 테니까."
연맹군이 착각하는 것과 달리 리암의 목적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화망과 호위를 뚫고 자코프의 몸체에 함선체 하나를 깊숙히 박는 것.
그러면 함선 내부로 침투하는 군단병들이 거대 함선을 안쪽에서 무력화 시킬 것이다.
"지금, 호위함급 함선체 3체가 화망을 돌파했습니다."
"좋군. 설마하니 아무 대비도 안해놓은건가? 하긴 연맹과의 제대로 된 함대전은 거의 없었지."
전후좌우상하까지, 모든 공간에서 몰아치는 공격이 결실을 맺었다.
자코프의 화망을 뚫은 함선체 몇이 일반적인 우주 함선과는 다른 뾰족한 주둥이 끝을 송곳으로 쓰며, 함선의 내부에 푸욱 박아넣었다.
"어서 뛰어!"
"우하단 구역이다!"
폭발과 함께 함선체 내부에서 쏟아져 내리는 군단병들이 서둘러 달려오는 내부 방어 병력과 충돌을 일으켰다.
그것만으로 저 거대한 함선의 1/5가 먹통이 되었으니, 남는 부분으로 다른 함선체들이 접근했다.
"...응?"
"함장님. 지금, 함선 내부에 적들이 침입했습니다."
그러나 연맹군이 대비를 안한게 아니었다. 난장판이 된 자코프 주변을 비행하며 화력을 퍼붓고 현장을 지휘하던 리암의 기함에 쥐도 새도 모르게 침투한 이들이 있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호위 병력이 움직임과 동시에 에이미의 전신이 골격부터 뒤틀리기 시작하더니, 곧 붉은 안광을 번득이는 하나의 상위종이 되어 창을 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