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미묘한 균형(4)
"전쟁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단 하나 뿐입니다."
지창현이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이곳은 급히 마련한 일종의 훈련장.
그 맞은편에는, 마찬가지로 검을 든 이브가 서 있었다. 지금 서브마인드 모리스와 군단병들을 또다른 행성 렐을 공격하고 있는 상태로.
"성장. 그 어떤 형태로든, 살아남기만 하면 우리는 성장합니다."
"그건 나도 깊게 동의해."
이브는 희미하게 웃었다. 실시간으로 전장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몰려드는 괴물들에게 처절하게 저항하는 렐의 군인들...그들의 사투와 투쟁은 곧 이브의 먹이다.
실험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었다. 최근 겪은 대규모 전장에서 상황 통제의 한계를 느낀 이브는 자신의 특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손아귀 안에서 이론상 무한히 돌아갈 수 있는 성장의 사이클을 구상하는데 성공했다.
상대에게 적정 수준의 싸움을 유도하고, 성장시킨다. 자신은 그렇게 성장한 상대와 다시 한번 싸우고 그만큼 더, 더 강해진다.
이것은 신우가 계획했던 계속되는 싸움에 자신도 모르게 동조하는 셈.
확실치 않은 결실을 위해 얼핏 비효율적으로 자원을 쏟아붓는 이 행동 역시 변화하고 성장하는 이브의 자아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성장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힘을 올바르게 다스리고, 적절하게 쓰일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 그렇게 상처와 고통 속에서 태어난 영웅들을 보살피고 치유하는 것 또한 우리의 의무입니다."
지창현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이브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마찬가지로 검을 빗겨든 이브는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 지창현만 보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과는 광년 단위로 떨어져 있는 곳. 그곳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쟁이 있었다.
그가 언급한 상처와 고통은 이브에게 해당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브는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그 상처와 고통을 주는 쪽이었으니까.
"으아아!"
자신을 덮쳐드는 거대한 적을 향해 뛰어드는 소녀가 있었다.
소녀의 눈에는 강렬한 증오가 가득했다. 자신의 부모를, 주변 사람들을, 고향을 파괴한 외부 세력에 대한 증오.
그녀가 뿜어낸 붉은 마력은 칼날이 되어 어지간한 전투기 수준인 군단의 대형 비행종을 절단내었다.
'...그래. 상처, 고통, 증오! 그렇다면 내가 그 양분을 주어야겠지.'
이브는 그녀를 보고 희열에 찬 눈으로 웃었다.
이 모든 행동의 원인은 단 하나였다. 자신의 타고난 본성이자 모든 것인 성장에 대한 열망. 그 열망 하나로 자신의 대적자들을 직접 키우려는 지경에 도달한 것이다.
곧 이브의 명령을 받은 상위종 하나가 다른 비행종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세나를 향해 직행했다.
"...그 눈, 참 무섭군요. 대체 무엇이 그리 즐겁습니까."
우주 저편에서 벌어지는 이런 상황을 전혀 알 수 없던 지창현은, 한껏 끌어올린 입꼬리와 붉은 안광과 광기로 번들거리는 이브의 눈을 보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별거 아니야. 오랜시간 고민하던 답에 대한 실마리를 찾고, 이제 그걸 직접 실험해 보려는 것 뿐."
"그렇다면 그 답을 완전히 찾기를 바라죠."
지창현도, 이브도 서로의 힘을 끌어올렸다. 타오르는 불길이, 검붉은 마력이 각자의 몸에 일렁거렸다.
선공을 취한건 이브였다.
휘둘러지는 검은 이제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지구를 떠난 이후 급격하게 쌓은 경험들, 이브는 그 모든 것을 누수 없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후로도 나름 배우기 위해 남는 시간동안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지식을 습득해왔다.
'체내에 만들어 두었던 동력기관조차 배제했다. 순수한 인간의 육체로,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을지 시험하기 위해.'
지창현의 불길을 흡수한 이브의 반격기가 섬광이 되어 현장을 가로질렀다. 이어지는 대폭발. 어지간한 고폭탄 이상의 화력에도 두 사람은 멀쩡했다.
[이런...이런 이브의 변화는 극적인 것이다. 이, 이게 진실인지 나도 지금...]
"당황한 것만 봐도 무슨 일인지 알 것 같네."
이 모든 광경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던 신우의 눈이 가라앉았다. 자신의 공작질에 절호의 기회를 놓쳤던 이브가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 훤히 알고, 마음이 무거웠다.
'오히려 잘된건가? 하지만, 이브가 이런 방식으로 내면적인, 질적인 성장까지 이루어 낸다면 과연 다른 이들이 감당할 수 있나? 이 균형을 언제까지...유지할 수 있는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당겨쓰기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이브의 모든 성장 과정을 지켜봐 온 존재 조차도, 그 성장력의 한계를 감히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브의 욕심이 과하기를 바래야겠군]
"또다, 또 이브는 내게서 멀어졌어."
신우는 쓰게 웃었다. 겨우 이브를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빠져나간 셈이었으니.
'이제 누가 누굴 집착하지?'
어딘가 뒤집힌 느낌에 허탈한 마음까지 들었다.겉으로 보이는 두 존재의 관계는 마침내 지금이 가장 대등했으나, 그 내면의 관계는 어느새 역전된지 오래였다.
*
'...상상 이상이다.'
거대한 불기둥을 만들어낸 지창현은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동안 성장해온 이브의 실력이 자신의 예상 이상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전력을 낼 수는 없는데, 이브 역시 전력을 다하는게 아니었다.
'즐기고 있다.'
오히려 자신과의 전투를 적당히 맞추며 즐기고 있었다. 이 기회마저 자신의 성장을 위한 경험치로 써먹는 모습이었다.
"왜 망설이지? 말하지 않았어? 고통과 상처가 없다면, 성장도 없다는걸."
히죽거린 이브가 날려보낸 참격이 경로의 모든 것을 갈라버리며 쇄도했다. 혀를 찬 지창현은 결국 조절하고 있던 마지막 화력마저 전방으로 쏟아냈다.
'...뜨겁다.'
공명법으로도 다 담지 못할 거대하고 뜨거운 백색 불길이 전방으로 휘몰아쳤다.
순간 버티느라 모든 힘을 소진한 이브는 비록 여기저기 그을렸지만, 검을 땅에 박아넣고 견디는데 성공했다.
"여기까지 하죠. 이제 대답을 듣고 싶은데."
"장담하는데, 전부 배우는데 며칠이면 충분할걸?"
"그런건 상관 없습니다. 할 수 있다면 해보시길."
지창현은 검을 집어넣었다.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난 나이, 신우가 이브에게 다가왔다.
"같이 싸웠다면 이겼을까."
"당연하지. 우리는 함께 싸워야 진짜인걸."
그가 넌지시 묻자 이브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해봐서 알아. 이 실험, 충분히 가능해.'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이브가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 보고 있는건 역시 전장이었다.
비행종 몇과 함께 하늘을 가로지르는 스피어 타입의 상위종이 손에 창을 꼬나쥔채 점차 세나에게 근접하고 있었다.
"렐에 지원군을 보냈데?"
"아마, 곧 도착할걸."
"그래...?"
연맹은 당연히 렐에 지원을 보냈다. 그리고 이브는 그 모든 정보를 꿰고 있었으니, 곧 연맹의 지원과 비슷한 규모의 병력을 추가로 파견했다.
"나는 확신해. 압도적인 학살과 정복이 아닌 치열한 전쟁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고. 새로운 곳들에도 병력을 보내야겠어."
이브는 새롭게 찾아낸 스스로의 방식을 마음에 들어했다. 그 사이, 상위종은 어느새 세나의 앞에 도달했다.
"으윽..!"
'더, 더 싸워. 여기서 무너지지 말고 더.'
이브는 아예 상위종의 몸을 직접 조작해, 본인은 이름조차 모를 세나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검붉은 기운이 타오르는 이브의 창술에 붉은 마력이 펑펑 터져나가고 그 충격에 세나는 바닥에 넘어졌다.
"안 돼!"
"쏴버려!"
그러자 기겁한 사람들이 서둘러 가지고 있는 개인 화기를 퍼부었다. 몸에 두른 베리어조차 뚫지 못하는 일격.
무시하고 그대로 창을 내리찍으면 세나의 목을 꿰뚫어 버릴 수 있다.
"그만 둬!"
하지만 이브는 그러지 않았다. 기겁한 세나의 외침을 무시하고 상위종의 몸을 움직여, 단숨에 사람들에게 날아들었다.
찰나의 순간 흩뿌려지는 피와 사람들의 몸 조각들.
'깊게 절망하고 격렬하게 분노해서, 더 성장하라.'
큰 충격을 받은 세나의 눈을 보며 만족스러워 했다. 만약 거기서 주저 앉는다면 이브는 가차없이 세나를 죽일 것이다.
[도망쳐라]
"절대 그렇게 못해."
그리고 그녀는, 이브의 바람대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다시 한번 덤벼들었다.
플레이어의 말조차 무시하고 힘을 폭사했다.
발동한 혈마법으로 쏘아진 강력한 파동탄이 베리어를 부수고, 상위종의 팔 하나를 날려버렸다.
'넘었다.'
하나 남은 팔로 창을 찔러 넣으며 이브는 성과를 보았음을 직감했다. 붉은 마력이 창을 타고 흐르며 단단하기 그지 없는 갑각을 부수고 짓이겼다.
비록 창에 찔린 한쪽 어깨가 팔째로 박살 나서 흩어졌지만 어쨌든 세나는 자신의 힘보다 더 강대한 적을 상대로 기적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봐. 되잖아. 이렇게 기적을 만드는게 가능하잖아.'
상위종은 목을 베였으나, 이브는 오히려 좋아했다. 상대가 할 수 있다면 자신도 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너도 참 대단해 이브."
"나는 원래부터 대단했는데. 너를 만난 그 순간부터. 미궁을 기어올라가고, 행성을 먹어치우고, 우주로 진출한 그 모든 순간들이."
이브는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