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232화 (232/254)

232화-미묘한 균형(2)

"지창현 지부장이?"

"너한테는 안왔어?"

"왔었지. 단지 곧바로 네게 찾아갈줄은 몰랐을 뿐."

이브의 말에 살짝 놀랐다. 설마 지창현이 단독으로 이브에게 찾아갈 줄은 몰랐으니까.

생각해보니 그동안 이브도 많이 변했다. 극악이던 사회성이 조금씩 좋아지며 다른 사람들과 엮이는 일도 늘어나고, 깔보는건 여전하나 존재 자체만으로 인간을 혐오하던 것도 거의 사라지고 있었다.

"그 사람은 여기서도 한결 같이 활동하더라. 지구에서 수호자 연합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 처럼, 연맹에도 큰 도움이 될거야."

"하. 그래봤자야. 무엇보다 우리가 여기 있잖아."

내가 마계를 싹 정리하고 지구와의 연결을 차단한덕에, 위기에서 벗어난 지구는 여유를 찾았고 그 힘의 일부는 자연스럽게 연맹으로 향했다. 다만 이브는 수호자 연합의 본격적인 활동을 그리 크다고 보지는 않았다.

"...우리가 직접 겪었듯 수호자 연합은 영웅을 만드는데 특화되어 있지. 그런 영웅들은 충분한 동기를 가지고 적들과 싸울거야. 카사라스, 혹은 우리와. 그들 100명 중 1명만이라도 살아남아 한계를 넘어 성장하면 쉽지 않을텐데?"

"물론 그럴수도 있지. 하지만, 한가지 빼먹은게 있잖아."

이브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자기 자신을 손으로 가리켰다.

"나도 성장해. 놈들이 성장한들 고작해야 하나일 뿐이야. 내가 더 빨리 성장해서, 그대로 밀어버리면 돼."

자신감이 철철 넘쳤다.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지금까지 이브는 자신이 원하던 성장은 끝끝내 반드시 이뤄왔다.

물론 나도 딱히 뜯어말린 이유가 없었다. 어떤 이유던 이브가 싸움을 계속해주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연맹이 잘 싸워주길 바라는 수밖에.'

오히려 이브와의 힘싸움에서 지금 여기저기 상처 입은 연맹이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기를 바랬다.

안그러면 내가 또 머리를 써야하니까.

*

"후..."

"이대로 가다간 완전한 수습에 수십년이 걸릴겁니다."

연맹의 행성 렐, 한때나마 카사라스에게 점령당했던 이 행성은 전쟁이 일단락된 지금 생존자들을 중심으로 수습과 복구가 한창이었다.

문제는 사실상 처음 겪어보는 대규모 전쟁에 상상하지도 못한 전례없는 큰 피해를 입은 상태라 복구작업이 더디다는 것.

게다가 다른 곳들도 공격 받은 곳들이 많아 연맹차원의 집중적인 지원도 힘들었다.

"그나마 피해가 적은 대륙 서부를 중심으로 천천히 복구해 나가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희망적인점은 전쟁 지속 시간이 고작 몇십일 수준이라, 놈들의 파괴행위도 그리 크지 않다는 것. 체계만 잘 갖추게 되면 복구속도는 급격히 빨라질 것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피해가 문제네. 건물이야 다시 지으면 그만이고, 땅이야 다시 수복하면 그만이지. 하지만 학살당한 사람들을 어떻게 채운단 말인가."

보고를 받다가 차마 참지 못하고 구식 연초를 입에 문 렐의 임시 통령은 반들거리는 머리를 문질렀다. 그나마 존재는 하고 있던 머리가 극심한 스트레스로 싹 사라진 것 처럼, 지금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배급을 받는 처지에 머리를 다시 심는 것도 어불성설이었다.

"여차하면 정말로 이민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군."

그는 어두운 얼굴로 연기를 내뿜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때 공백이 생긴 인구수를 자연적으로 늘리는건 시간이 너무 오래걸린다. 그래도 복구와 미래를 위해 인구를 늘려야 하고, 가장 쉬운게 이민을 받는것이지만 사실 그 누구도 이런 혼란한 시기에 대량으로 몰려오는 이민자들을 좋아할 수는 없었다.

"가, 각하! 큰일났습니다!"

하지만 이민을 받니 마니 하는 문제를 행복한 고민으로 만드는 급보가 등장했다. 크게 당황한 그는 화면에 보이는 한 장성의 보고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놈들..놈들입니다. 놈들이 대륙 동부, 파괴된 도심의 구 시가지에 둥지를 까기 시작했습니다!"

장성이 보여주는 화면은 전부 파괴되고 파손된 위성 대신 관측용 비행기를 이용해 관측한 영상이었다.

전쟁의 여파로 반파된 도심. 그 폐허 속에서 꿈틀거리는 육벽과 점액질, 자라나고 있는 검은색 나무까지.

'놈들의 게이트가 열린 행성은 오염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놈들이 언제, 어디에서 게이트를 열고 나와 행성을 침식할지 모른다.'

순간 이를 악문 통령의 뇌리에 연맹 정기 회의에서 나왔던 목소리가 스쳤다.

"관측된 결과, 아직 놈들의 둥지는 그리 크지 않다. 반드시 소멸시키고 게이트를 닫으라! 그리고 연맹에 보고하고 재지원을 요청하라!"

통령의 명령을 받은 전투기들이 일제히 발진했다.

퍼붓던 연맹의 지원은 전쟁 종료 즉시 다른 곳으로 떠났다. 복구작업 밎 난민들 거주에 쓰이는 동력을 제공하는, 얼마 안 남은 함선을 쓸 수도 없었다. 거기다 미사일을 비롯한 고급 병기들은 이미 거의 다 소모한 상태였다.

그래서 결국 결단을 내렸다. 수복해야 하는 자신들의 땅이지만, 일단 핵전력을 사용하자고.

도시에 퍼진 둥지째로 날려버리는게 계획이었다.

"무슨 일이지? 전투기들이 왜..."

"동쪽으로 가고 있어요."

빠른 속도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본 주민들이 웅성거렸다. 통령을 비롯한 수뇌부는 사회 혼란을 우려해 군단의 등장을 안그래도 힘들게 버티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덕분에 영문을 알 수 없던 사람들은 갑작스레 움직이는 군대의 움직임에 술렁거렸다.

'이번 작전에 모든게 달렸다.'

첨단 무인기 전력이 대부분 소모된 상황에서, 구형 전투기를 직접 몰게 된 파일럿이 지상을 흘끔거렸다.

그 역시 이 땅의 주민이었고 피난민들 사이에 가족도 있는 사람.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구형 핵폭탄이 유일한 희망임을 알고 있었다.

"레이더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다."

"말도 안돼. 둥지가 생겼는데 그 징그러운 날벌레들이 없다고?"

더 높은 곳에서 나는 정찰기가 전투기 편재에 정보를 알려주었다. 군단에 대해 알고 있던 파일럿 중 몇은 비행종이 관측되지 않는다는 말에 당황했다.

비행종은 군단이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해 지상의 주력인 돌격형 다음으로 신경쓰는 병종.

그들 사이에 굳어진 군단의 상징이 땅과 하늘을 가득 채우는 대군세임을 생각하면 다소 놀라운 결과였다.

"좋은게 좋은거지. 몰아내는데만 집중하자고."

고개를 저어 잡념을 지운 그는 조종간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이제 전투기 편대는 생의 기운을 찾아 볼 수 없는 폐허 위를 가르고 있었다.

'...생각이 바뀌었어.'

구형이라지만 지구산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력의 핵폭탄을 들고 오는 전투기들이 대륙을 횡단하여 이곳을 향해 날아올때.

군단은 폐허가 된 도심을 갈아 엎어가며 착실히 둥지를 넓혀나가고 있으나 그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다. 카사라스를 함락시키기 위해 끌어모았다가 다 쓰지도 못한 수십억의 병력을 끊이지 않고 쏟아내지도 않았다.

'내게도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브가 적절하게 완급을 조절한 이유는 전부터 내심 신경쓰고 있던 문제기도 했다.

극한의 상황에서 벌어지는 성장, 그리고 초월.

그동안 본게 없는것도 아니기에 최근 성장에 대해 고뇌하고 있는 본인도 그쪽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명백한 약자들을 압도적으로 찍어눌러서야 결국 본인은 제자리 걸음일 뿐이니까.

자신 스스로의 역사를 되짚어봐도, 미궁 시절부터 처절하고 간절했던 비틀기 끝에 성취를 얻어 왔다. 전심전력을 다한 전면전은 보다 강한 이들과 싸울때면 충분하다.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렇습니다.'

이브의 말에 둥지 한쪽에 서 있던 존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갑각으로 몸을 두른 새로운 특수종, 서브마인드 모리스. 차지연과 마찬가지로 연결고리를 끊어내고 군단에 합류한 에볼루션 소속의 헌터이자 유닛이었다.

이브는 이번엔 그에게 임무를 맡겼다. 이미 이브가 주는 힘에 취한 그는 차지연과는 달리, 같은 인간이라도 가차 없이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철저한 계산으로, 지금 이 행성에 있는 인간 놈들을 최소한으로 상대할 수 있을 지원만 제공하지. 그 이후로는 오로지 네 판단에 따라서 이곳을 정복해.'

'해보겠습니다. 반드시.'

동시에 이브는 내심 리하르트 같은 인재를 탐내고, 만들어보려 시도하고 있었다. 잘 키운 관리자 하나가 대체 얼마만큼의 이득을 가져다 주는지 지켜보았으니까.

서브마인드들에게 둥지 경영의 권한까지 줘보는 실험을 진행하는게 그때문이었다.

'우선은...저 폭탄들부터 막고.'

저 먼 하늘에서 전투기가 쏘아낸 폭탄들이 둥지에 쇄도했다. 모리스는 그것에 맞춰, 자신의 능력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차지연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스텝 업을 이루었던 고등급의 헌터.

이브 특유의 과감한 투자까지 받아 그 힘을 극대화 한 그는 자신의 무장을 꺼내었다.

강도연이 자신의 깃털을 변형시켜 수백자루의 송곳으로 이용하는 것처럼 그는 쩍 갈라지는 허벅지와 등갑등에서 튀어나온, 자신의 형상력과 공명하는 종이만큼 얇고 날카로운 수십자루의 검을 공중에 띄우더니 그대로 쏘아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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