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미묘한 균형(1)
"이대로 아무것도 못 얻을 순 없어."
남들은 어쩌면 전쟁이 끝날 수 있을거라는 희망에 차올라 기뻐하고 있을때.
결국 카사라스의 본성에서 모든 병력을 철수시킨 이브는 홀로 화를 삭히고 있었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모습은 혼자 꿍얼거리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모습이지만, 또다른 모습인 군단의 하이브마인드는 철수시킨 병력들을 다른 곳에 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 셈인데?"
"적에게서 빼앗는걸 실패해서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얻는건 무조건 있어야 해. 지금 취약해진 연맹의 행성 하나를 공격해야겠어."
"...그렇게 해."
홧김에 내리는 결정 같지만,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다.
슈퍼컴퓨터를 아득히 뛰어넘는 연산력으로 이브는 수많은 데이터를 분석하고 가장 높은 확률을 계산했을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수십억에 가까운 병력으로 지금 대부분이 반파된 연맹의 행성 하나 정도 못먹는건 말도 안될것이고.
"한가지 궁금하긴 하네. 지금까진 직접적인 상황이 별로 없었는데 말이야."
"뭐가?"
"만약 상부가 '헌터인' 우리를 그곳에 파견하면 어쩌지? 우리가 우리와 싸워야 하는 셈인데."
"아아."
나는 눈치를 보다 슬쩍 입을 열었다. 질문을 들은 이브는 무슨 말인가 했냐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러더니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나는, 전우주적 연합기구 가디언의 헌터 이브. 그러니 임무에 따라 그 무엇이든 베지. 설령 그 상대가 최강최흉의 우주괴물들이라도."
씩 웃은 이브가 선을 명확히 그었다. 바로 이점이 이브의 무서운 점이었다. 다른 이들이 어설프게 첩자질을 하는 것은 비교할 수 없다. 이브 본인은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까.
어차피 인간형 아바타 하나가 무슨 짓을 하던간에 뒤집을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말그대로 '영혼까지' 인간을 연기할 수 있는 것이다.
"한가지 더 물어볼까? 보니까 연맹과 연합이 손을 잡은 것 같은데. 만약 그들이 협공하면 어쩌지?"
"그럼 두놈 다 먹어치우는거지. 물론, 도와줄거지?"
"그럼."
이브도 지금 내 병력 일부가 각자의 복수를 위해 새로운 세상을 침략하고 있다는걸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이브를 도울 것이다. 위기에 처한다면.
"두분다 복귀하시죠. 아직 새로운 계획이 정해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의 보좌역인 레비크 중위가 찾아와 철수를 알린게 그때였다. 물론 이브가 병력을 움직이고 있지만, 일단 지금 당장은 평화상태가 지속될 확률이 높았다.
*
'병력들을 그대로 두는건가? 그럼 나쁘지 않지.'
이곳은 침략을 받던 행성에서 거의 유일하게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던 대륙의 구석진 곳.
덕분에 모든 문명을 유지하고 있던 대도시 한복판에서 이브는 혼자 밖에 나와 있었다.
최근들어, 정확히는 군단 둥지 통제 시스템이 급격히 발달한 이후 이브는 이렇게 잡념에 빠질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매크로에 가까운 명령어 시스템과, 이변을 감지하면 자동으로 자극을 보내주는 감지 시스템, 방어 시스템등은 본디 이브에 비하면 그 연산력이 떨어지는 관리자형 서브마인드 리하르트가 고안해낸 것들.
이브는 그것들을 적극 도입하여 본인의 신경 분산을 최대한 줄였다.
'멍청한 인간들. 곧 자기들 편이 또다시 공격 받을걸 모르고.'
난간에 팔을 걸치고 선 이브는 사람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는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통제시스템의 발달로 신경의 부담이 줄고, 그덕에 늘어난 잡념은 이브의 사고에 조금씩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 영향이 부정인지 긍정인지는 그 누구도 몰랐다. 애초에 이브가 신경적, 연산적으로 이렇게 여유로웠던 적이 없었으니까.
변수. 이것 역시 결국은 비틀림으로 생겨난 변수였다. 관조자도, 신우도 캐치 하지 못한, 연합의 비약적인 성장에 가려진 변수.
'...오늘 밥 뭐지?'
정작 그 변수 자체가 된 이브의 자아는 최근 눈을 뜨게 된 미식이라는 새로운 본능에 저녁 메뉴를 고민하고 있었다.
"뭐야. 너 누구야."
그때 기척을 감지한 이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금 옥상으로 들어 온 존재에게 말했다. 예의나 존대 따위는 없었다. 단순히 자아가 어려서 그랬던 때는 지났고, 지금은 그냥 순수하게 건방진 것 뿐이었다. 어차피 현재 자신의 위상정도면 그 누구에게도 숙일 필요도 없었으니까.
"명성이 대단하더군요. 이렇게 직접 만나는건 처음이죠?"
"...너."
그러나 시큰둥했던 이브도 상대의 목소리를 듣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브를 찾아 온 인물은 검은 코트를 입고 있는 건장한 키의 사내. 하지만 이브도 경계시킬만큼 충분히 거물이었다.
"수호자 연합의 지부장이 여길 어떻게?"
"아실지 모르겠지만, 지구는 이제 마계의 위협에서 안전해졌죠. 그 상태에서 저희 수호자 연합이 가디언과 하나가 되었으니, 이제는 더 필요한 곳으로 오게 된 것 뿐입니다."
지창현, 그는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정작 이브는 그를 경계했다. 이브의 기준에서 그는 너무 고고하고 깨끗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깨끗함, 군단의 하이브마인드에게는 당연히 꺼림칙한 것이었다.
"대충 이해했어. 그런데 내 말엔 대답 안했잖아. 여기, 그러니까 나한테는 왜 왔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까요?"
이브가 자신을 경계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슬쩍 허리춤의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동시에 이브의 기세도 싹 변했다. 경계심을 접고,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었다.
"지구에서 활동할 때부터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 와서 활동하며 그 실력을 더욱 키웠더군요. 그래서 욕심이 나서요."
"난 싸움거는거 안피해."
"싸움이 아니라, 가르치고 싶어서. 더 강해질 수 있도록."
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직 인류의 번영과 발전만을 위해 일하기에, 그, 정확히는 그의 뒤에 있는 플레이어는 수호자 연합을 만든 게임 초기와 마찬가지로 욕심을 내었다.
범상치 않은 재능을 보이는 이브를 제대로 가르쳐 진정한 최강자로 만들고픈 욕심을. 사실 이브만 건드리는게 아니었다.
가능성을 보이는, 이제 연맹에 속하게 된 모든 세력에 포함된 모든 인재들을 건드리고 있었다.
"어이가 없네. 네가 나보다 강해?"
"자존심이 상한다면 증명하면 됩니다. 내가 보기엔 당신도 탐낼 것 같은데. 우리 연합 기구 최강의 검이 되는 것에."
오히려 한발 앞으로 나선 지창현은 이브의 기세에 밀리지 않았다. 코앞까지 다가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지금 그가 가진 확신은, 상대를 잘못 본 것이기도 하고 잘 본 것이기도 했다.
이브는 분명 인류의 존망을 위협하는 최강의 적.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브는 스스로를 인간이라 생각하며 철저히 인간을 연기하는 존재니까.
"참혹한 전쟁이 끊임 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Z라고 불리는 우주괴물들과, 카사라스라고 불리는 고대의 외계인들과, 때로는 마계와 지구의 관계처럼 해묵은 원한들과. 그 과정에서 수많은 희망들이 태어나고 성장합니다. 나는, 아니 우리는 그들을 믿습니다."
"...그런 이들이 끝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줄거라고? 헛소리야. 전쟁을 끝내는건 결국 전체적인 체급, 생산력과 기술, 그리고 회전력이지."
지금은 인간을 연기해야 함에도 이브는 그의 말에 본질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의 승리를 부정하는 말들이었으니까.
"아니요. 제가 말한 희망에는 당신이 말한 것들 모두 포함됩니다. 애초에 인류의 역사를 격변시킨 선구자는 지구든 연맹이든 언제 어디에나 있어왔고, 그들이 발전시킨건 개인의 무력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니."
"...성장할 수 있다고?"
그러나 지창현은 침착했고 오히려 이브가 흔들렸다.
그의 말을 증명하는게 다름아닌 현재의 본인이었으니까.
단순히 군단병 하나를 조합하고, 최적의 형태로 진화시키고 성장시키는 시기를 지나서 이브는 하나의 군체로서 그 시스템과 방향성을 지속적으로 수정하고 발달시켜왔다.
물론 그 이면엔 서브마인드인 리하르트의 공이 지대했다는 것을 이브 본인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 성장이 고팠다. 스스로도 혁신적인 진화를 이루고 싶었다.
'나도 할 수 있어.'
이브의 마음이 점차 크게 흔들렸다. 사실 과거였다면 흔들릴 가치조차 없는 사안이었다.
보다 냉철하고, 단순하고, 동시에 원하는 것이 단순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 감정이 다양해짐과 동시에 욕망 자체가 보다 비대해지고 세분화 되었다.
단순히 승리, 그리고 생존이 전부였던 과거와는 다르다. 원하는 종류와 과정의 승리가 있었고 스스로 만족해야 할 기준점도 점점 높아졌다.
서브마인드들을 굴려서 얻고자 했던 이점들도 이제는 본인 스스로가 얻고 싶은 욕망이 커졌다.
"그럼 한번 시험해볼까? 네가 내게 뭘 줄 수 있는지."
"기꺼이."
끝내 이브는 선택을 내렸다. 그리고 당연히, 지창현은 이브의 요구를 수락했다.